#108
세이아드는 기사들이 다친 것을 적당한 거짓과 사실을 섞어 말했다. 레사스가 자리를 피한 사이 때맞춰 그를 찾으러 온 키릴이 당황한 듯 묻자, 레사스를 암습한 이들을 지키다 기사들이 다쳤다고 말했다. 농부들은 지나가던 길에 같은 일에 휘말렸다고 설명하자 키릴은 어느 정도 납득했다.
암살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저 레사스의 죽음을 바라는 이라고 흘려놓았으나, 현재 왕실의 상황이 공공연한 판이니 그런 짓을 할 이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키릴이 심각한 기색으로 그의 기사들을 불러 주의를 주는 것을 본 다음,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머물 방을 정리했다.
여관방은 협소했지만 깨끗한 편이었다. 가장 큰 방이었음에도 침대는 성인 둘이 눕기엔 비좁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붙어 눕는다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사스와 한 공간을 쓰는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
헌데 왜 이렇게 숨이 막히지.
우뚝 서서 자신보다 한참 작은 침대를 뚫어지게 보던 세이아드는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와 너무 오랫동안 닿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그와 밤을 지샜던 때와 달리 지금은 지나치게 제정신이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말이다.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제법 날씨가 더워졌는지 방 안이 홧홧했다. 열기를 식힐 겸 세이아드는 창문을 열었다. 어느새 저녁에서 깊은 밤이 된 바깥은 짙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어두운 듯 싶으면서도 그 안에 섞인 색은 하나하나 다채로워 마치 레사스의 색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레사스가 홀로 보아야 하는 것이 싫다.
아까 전 추궁할 틈을 놓쳤으나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지금같은 일을 제법 오래 겪었으리라고 확신했다. 습관이 된 것처럼 사람을 기절시키고 자리를 피하는 짓을 저와 떨어진 동안 해 왔다고 가정하자 심장이 따끔하게 조여들었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싶더니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군, 아스테르.
아스테르를 생각하면 자꾸만 스스로의 마음이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아 그간 일부러 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억지로 이성을 붙들고 그를 끌어내릴 방법을 찾는 데에 치중했을 뿐, 아스테르를 파악하려고 굴진 않았다.
여태까지 세이아드는 아스테르가 그저 권력에 민감한, 특권을 즐기는 자라고만 여겼다. 이같은 이유로 그를 왕세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로 청했을 때 그것이 충분히 그의 관심을 돌릴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아스테르의 행동을 보고 있자면 그는 막상 왕위를 찾기 위해 공을 쓰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레사스에게 이 같은 역겨운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아스테르는 정말 악마 그 자체일까. 아니면 악마와 함께 움직이는 존재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어차피 결국엔, 누군가는 죽어야만 끝이 날 테니. 그의 정체를 공공연히 밝힐 수 있다면 세이아드에게는 합당히 그를 죽일 권리가 주어질 것이다.
결국은 손에 피를 묻혀야 할 때가 왔다. 더는 중요한 순간에 주저할 수 없다.
짧은 망설임이 레사스를 크게 다치게 했다. 세이아드는 다시금 그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고, 목숨이 오가는 이 상황에서 아무도 죽이지 않고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는 문득 자신이 ‘살아남고’ 싶어한다는 걸 자각했다.
되돌아온 찰나부터 죽음을 가정한 삶이었다.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고 여겼고, 그럴 자격도 실제로 없으니 언제든 목숨을 바치려 했다. 원수와 함께 죽으리라 믿었지 살아남고자 싸울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세이아드는 아주 당연하게도 살고자 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이런 식으로 무의식의 갈망을 깨닫는 일이 늘었다. 생에 대한 의지를 곱씹자마자 그는 창밖 너머의 숲을 보며 레사스를 찾았다. 길목을 둘러싼 작은 숲은 솨아아, 불어오는 밤바람을 따라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아늑하게 퍼지는 따스한 풀내음이 뱃속을 간지럽혔다. 속이 울렁거리며 그리움이 솟구쳤다.
“…레사스.”
혀 끝에 레사스의 이름이 맺혔다. 늘 삭막한 호칭으로만 불러오던 이름은 소리내어 부르자 아주 예뻤다. 어릴 적, 둘만 있는 궁에서는 그를 잘도 이렇게 칭했는데.
“네, 이드.”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려던 부름에 응답이 왔다. 세이아드는 흠칫 몸을 떨고는 곧장 창문 아래를 보았다. 기껏해야 2층짜리 작은 여관인지라 바로 아래에 서서 절 올려다보는 레사스가 지척에서 보였다.
“…언제 오신 겁니까?”
제가 숨어 있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알아차리는 것까진 느낌이라고 치지만, 저 자신도 느끼지 못하게끔 이렇게 오는 건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세이아드의 물음에 레사스는 환하게 웃고는 손을 뻗었다. 잡아달라는 듯이.
“밤하늘을 달이 밝혀 주자마자 그대가 생각나 참을 수 없었어요.”
대체 저렇게 해맑은 마음을 아까는 어떻게 숨겼던 걸까. 다정한 무표정 아래에 저같은 감정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제 사소한 말 하나에 흔들리는 걸 보면 연기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해야 한다고 믿는 때에는 흔적조차 없이 마음을 숨기는 걸 보면 타고난 것 같았다. 그래서 세이아드는 더더욱, 자신이 레사스를 믿어야만 한다는 걸 느꼈다.
“전하의 앞에 있으면 제가 티테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대체 어떻게 기척을 숨기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작게 타박하면서도 세이아드는 손을 뻗었다. 허리를 숙여 팔을 창밖으로 뻗어 주자, 레사스가 벽을 딛고 도약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서로를 놓치 않겠다는 듯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그는 어렵지 않게 창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다면 좋겠네요. 평범한 이들처럼 짊어질 의무도 없고, 능력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될테니까요.”
앞서 말한 세이아드의 말에 잘도 그리 말한 레사스가 예쁘게도 웃었다. 눈꼬리가 사르르 녹는 모양을 홀린 듯 보던 세이아드가 겨우 답했다.
“…의미없는 가정입니다.”
“글쎄요, 악마가 사라지고 숲이 정화된다면 더는 티테르가 필요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죠.”
아직은 감이 오지 않는 이야기라 세이아드의 안에서는 상상이 되지 않는 미래였다.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있자 레사스가 싱그럽게 웃으며 물었다.
“이드는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뭘 하고 싶나요?”
숲에 있다 온 티를 내는지 레사스의 몸에서는 온통 푸른 향이 났다. 나뭇가지의 촉촉한 껍질이라든가 연두색이 진하게 올라온 나뭇잎 따위에서 향을 묻혀 온 걸로도 모자라 그의 머리카락에는 하얀 조팝나무 꽃잎이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세이아드는 부드럽게 손을 뻗어 꽃잎을 짚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대꾸하자마자 어떤 장면이 하나 생각났다. 어릴 적 그러하듯 레사스를 제 무릎에 눕히고 그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해 주거나, 같이 눈으로 장난을 치는 것 따위가. 한층 더 나아가, 그에게 입을 맞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쁘지 않은 것 이상으로 좋을지도 모르고.
“나는 대공의 옆에서, 어떤 근심도 없이 있고 싶어요. 그런 순간이 허락된다면요. 대공이 좋아하는 승마를 실컷 하고 돌아온 다음, 그대가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먹여 주고 싶어요.”
아이처럼 단순하고 원초적인 소원이었다. 그러나 듣기에는 좋았다. 상상한 내용은 다르더라도 서로가 비슷한 미래를 원한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꿈이 소박하시군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을 원하는데 그게 어찌 소박한가요? 욕심이 아주 많다고 해야죠.”
레사스는 그리 말하더니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레사스를 끌어올린 뒤부터 쭉 마주잡고 있던 손이 그대로였다. 세이아드의 손을 꽉 쥐는 힘이 더해지더니 그가 열망어린 표정으로 속삭였다.
“지금도 나는, 이드가 나를 옆에 있게 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하고 싶은 게 미칠 듯이 많거든요.”
“…뭘 하고 싶으신겁니까.”
“글쎄요.”
레사스는 그리 속삭이면서도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안다는 듯 몸을 겹쳤다. 꽃이 흐드러져 비처럼 내리던 봄날, 그들만이 기억하는 남쪽의 궁에서 만났던 그날처럼 레사스의 팔이 그를 휘감았다. 단단한 팔뚝이 체구에 비해 늘씬한 허리를 꽉 붙들었다.
“너무 많아서, 하나를 고르지 못하겠어요.”
몸이 바투 붙었다. 서로의 심장소리가 한데 뒤섞여 쿵쿵거렸다. 온 감각이 예민해지더니 세이아드는 지나칠 정도로 저를 원하는 레사스의 체온과 터질 듯한 박동을 느꼈다. 그걸 인지하자 무서운 욕망이 피어올랐다.
눈앞의 저 예쁜 청년을 긴 시간 맛보지 못했으니, 아까 상상했던 짓을 저지르고 싶다는 열망이 튀었다.
세이아드는 자신이 욕구에 상당히 취약하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했다. 과거엔 레사스가 육욕에 눈이 멀어 자신을 좋아한다고 여겼는데, 이제보니 정작 그렇게 휘둘리는 것은 세이아드 저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굳이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가 고르겠습니다.”
세이아드는 정화라는 단어는 입에 담지도 않고 그대로 손을 뻗어 레사스의 뺨을 감쌌다. 체구에 비해 유달리 작은 얼굴이 세이아드의 한 손에 감겼다. 황홀한 살결을 감싸며 그는 상체를 숙였다. 그러고는 어떤 과일보다도 달콤한 입술을 부드럽게 깨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레사스가 그를 꽉 안으며 들어올렸다. 어느새 세이아드의 방식에 길들여져 그가 원하는 대로 혀를 섞은 레사스는 그들의 뒤에 있는 침상으로 세이아드를 넘어트렸다. 그와 닿는 것만으로 몇 달간 그를 괴롭히던 두통이 말끔히 가셨지만, 레사스가 정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저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몰아치는 쾌감에 몸을 맡긴 채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어깨를 끌어 당겼다. 정신없이 혀가 섞이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귓가를 울리자 맞닿은 몸이 체온을 느끼고자 비벼졌다. 헐떡거리며 낮은 신음을 흘리는 세이아드의 행동 하나하나에 레사스가 반응했다. 그는 실드라스 영지에서 배웠듯, 세이아드의 목을 깨물며 짙은 자국을 남겼다.
“하아, 흣…!”
목을 뒤로 젖히며 예민하게 반응한 세이아드는 그대로 레사스의 목을 껴안았다. 레사스가 더욱 목에 자국을 남기게끔 허락해 주며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고작 흔적을 남기는 것뿐인데도. 머릿속이 녹아 버리는 것처럼 황홀했고 눈이 아릿할 만큼 행복했다. 너무 기뻐서 두려울 정도라서, 어떠한 근심도 떠오르지 않는 이 찰나가 끝이 나지 않았으면 했다.
정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지금에 머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