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105화 (103/147)

#105

세이아드를 보기만 해도 밝아지던 레사스는 이 자리에 없었다.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질 못해 어떻게든 드러나던 동요 또한 자취를 감췄다.

그냥,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단순히 아는 이를 마주한 것처럼.

이 모습이 너무 낯설어 세이아드는 무엄하게도 감히 답하는 걸 잊었다. 순간의 착각인가 싶어 눈을 깜빡였지만 레사스의 낯은 바뀌지 않았다. 말이 없는 세이아드를 잠시 기다리던 레사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키릴에게 말했다.

“대공께서 여기 머물 예정이라면 내가 물러나겠다. 값은 이미 충분히 치러 뒀으니 편히 쉬다 가거라.”

“아닙니다, 전하. 저희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레사스가 악시드 영지에 왔었던 저번 겨울을 기억하는지 키릴은 레사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당황한 키릴이 세이아드의 기색을 살폈다. 결정권자인 자신의 허락을 기다리는 키릴을 보며 세이아드는 정신을 차렸다.

“…전하께서 이곳에 오신다는 연통을 받지 못했습니다.”

말을 꺼내면 조금이나마 반응이 달라지겠거니 싶어, 어떻게든 한 마디를 뱉었다. 하지만 레사스는 큰 변화 없이 담백한 어조로 대꾸했다.

“베트리아 영지로 곧장 향하던 중이라 그랬을 겁니다. 도착한 뒤 대공께도 전령을 보내려 했어요. 동부의 숲을 살펴볼 차례인 것 같아서요. 나는 다른 숙소를 찾아 밤을 보낼 테니 대공은 이곳에서 쉬세요.”

아주 긴 시간 보지 못했다.

그간 잘 지냈는지, 무슨 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얼마나 바빴으면 절 보러 올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 별일은 없었는지, 물어볼 게 뒤늦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에게 이같이 다정한 질문을 하던 것이 까마득한 옛날이라 그랬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떠올려냈으니 레사스에게 물어볼 일만 남았는데, 정작 그 당사자는 사소한 대화를 할 여지조차 주질 않았다.

“전하.”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리 물어보려는데 목이 메었다. 뒤늦게 그에 대한 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가 청했던 바를 따르기 위해서 이렇게 구는 거란 생각을 하면서도, 마지막으로 봤던 몇 달 전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음을 알아서 불안함이 치밀었다.

레사스는 마치 저를 더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던 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네, 대공.”

세이아드의 부름에 레사스는 나긋하게 답했다. 아랫사람을 위해 먼저 잡은 숙소를 양보하는 면모나 자신의 말에 답하는 모습은 남이 보기엔 충분히 다정했지만, 세이아드의 눈에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으로만 비추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절 보자마자 표정이 바뀌어야 했다. 잘 지냈냐는 물음은 저리 간단하지 않고, 자신을 살피며 어떻게든 닿고 싶어 했을 것이다. 저리 간단히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을 터.

레사스가 저를 열렬히 원하지 않는 게 이토록 괴로운 일이었던가?

세이아드는 자신이 생각보다도 더 살갑게 굴어 오던 레사스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반목하고 경멸하는 듯한 사이로 지냈던 것이 무색하게, 다정하게 굴어 주는 레사스의 태도에 벌써 익숙해져 버렸다. 어떻게 밀어내든 상처 입으면서도 다가오던 모습이 세이아드의 안에 굳어진 것이다.

일순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이런 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워, 저 또한 아무렇지 않은 척 물러나고 싶은 욕망이 잠시 솟았다.

그러나 그 같은 욕망보다는 레사스를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자존심을 세우는 짓보다 드디어 마주한 레사스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게 세이아드가 정말로 원하는 거였다.

결정을 내린 세이아드는 차분히 절 기다리는 레사스를 살피다 입술을 뗐다.

“이 근방에는 숙소라곤 이곳 하나뿐입니다. 전하의 기사들까지 묵을 수 있는 규모의 민가도 찾기 어려운 작은 마을이니 저와 함께 이곳에서 쉬시지요.”

“대공의 배려는 고맙지만, 여관의 규모가 작으니 인원에 맞게 방을 마련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세이아드의 권유를 레사스가 점잖게 거절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도 구태여 자리를 피하겠다는 모습이 오히려 세이아드의 오기를 불러일으켰다.

한순간에 태도를 달리하는 이유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 타당한 뜻이 있을 거다.

지난 몇 달간 레사스를 가까이서 보아 오며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마음을 믿게 되었다. 여태껏 자신이 보아 오고 믿어 왔던 것과 달리 레사스가 항상 자신을 의식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니 분명 저렇게 보여도 레사스는 여전히 자신을 아끼고 있을 것이다.

하여, 세이아드는 그 마음을 믿고 멋대로 굴어 보기로 했다. 몇 달간 자신을 괴롭혔던 이 감정의 실체를 확실히 정의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머물고자 하면 방법이야 있습니다.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는 전하와 같은 방을 쓰고, 기사들은 여럿이 한방을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한방을 쓰자고 제안한 세이아드의 말에 레사스가 순간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주 미세하게 당황하는 표정이 스치더니, 그가 뒤이어 부정했다.

“대공께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왕국의 존귀하신 빛이자 가이드이거늘, 제가 어찌 불편함을 느끼겠습니까. 몇 달간 정화를 받지 못하여 몸 상태도 좋지 못하니 마침 정화가 필요하던 차였습니다.”

그간 힘을 크게 쓰지 않아 고작해야 늘 있던 두통이 돌아온 정도였지만, 세이아드는 괜히 정화가 필요하다고 청했다. 참아도 되는 통증을 핑계 삼는 자신이 염치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말을 이었다.

“아니면 전하께서는 제가 불편하신 겁니까? 북부의 대공이 괴물처럼 무섭다는 세간의 소문을 생각하면 그리 느끼실지도 모르겠군요.”

레사스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지고 세이아드는 일부러 이런 소리를 했다. 그러자 레사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나요? 대공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모두 알 텐데?”

당장이라도 그 같은 소문을 낸 이를 찾아내기라도 할 듯한 어조였다. 제법 사내다워진 얼굴이 표정을 굳히고 정색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갑작스레 어수선해졌다. 그가 저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낸 것만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오래된 평판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전하께서도 아시겠지요. 제가 곁에 있는 것이 불쾌하여 같은 숙소를 쓰기 싫으신 거라면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사스가 부정했다. 곤란한 기색이 반듯한 이마에 살짝 스쳤다가 사라졌다.

“…알겠습니다, 대공. 그리 말한다면 하루만 신세를 지지요.”

원하는 바를 이뤄낸 세이아드는 지체하지 않고 키릴과 레사스의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방의 개수를 파악해 모두 묵을 수 있게끔 배정하거라. 전하는 내가 모실 테니 신경 쓰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키릴이 고개를 숙이며 복종했고, 본 적 없던 레사스의 기사들은 신기하단 눈으로 세이아드를 살핀 뒤 키릴을 따라 고개 숙였다. 은연중에 느껴지는 기사들의 기운이 하나같이 청량했다. 왕궁의 기사들과는 묘하게 달라 보이는 모습에 의아함이 일었다.

평소대로라면 바인이나 리그다를 데리고 다녔을 텐데.

세이아드가 기사들의 모습을 살피며 그들의 정체를 가늠하는 사이, 레사스 또한 상황을 정리했다.

“대공의 말씀대로 하거라. 베트리아 공작령이 지척이니, 평소보다 늦은 아침에 일어나도 괜찮다.”

해산을 명한 레사스는 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더니 이어서 세이아드에게 말했다.

“대공께서는 먼저 쉬세요. 저는 잠시 할 일이 있습니다.”

세이아드가 대꾸할 겨를도 주지 않고 레사스는 여관 문을 열고 나갔다. 자리를 피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여 세이아드는 도망갈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그를 쫓았다. 먹이를 뒤쫓는 짐승처럼 기척을 내지 않고 레사스의 뒤를 밟자, 여관을 막 벗어나 근방의 작은 숲으로 들어가던 레사스가 우뚝 멈췄다. 뒤를 돌아본 레사스는 노을이 지며 드리운 그림자에 숨은 세이아드를 정확히 인지하며 말했다.

“대공, 따라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부터 느꼈지만 같은 티테르조차도 눈치챌 수 없을 자신의 기척을 레사스는 잘도 알아차렸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세이아드가 모습을 드러내어 그에게로 걸어갔다.

“전하께서는 대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그냥 느낌입니다. 설명할 수 없어요. 대답이 되었다면 이제 돌아가세요.”

“왕족을 혼자 두는 것은 불경한 짓입니다. 전하를 지키는 것은 티테르인 제 도리이기도 하죠.”

“대공, 나는….”

레사스는 설명하기 곤란한 것처럼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옛날과 다름없는 습관이 나오는 것을 본 세이아드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물러나지 않게끔 조심스레 거리를 좁힌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뒷걸음질 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천천히 그의 앞에 멈췄다.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통에 붉어진 하늘빛이 그들의 뺨에 고였다. 밤이 찾아오며 식어 버린 바람이 잔잔히 불었다. 레사스의 고운 머리칼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내려앉는 것을 하염없이 보던 세이아드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입술을 또 깨무시는군요.”

하얀 손이 뻗어 가 레사스의 불긋한 입술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움직이는 손끝에 레사스의 시선이 닿았다. 긴 속눈썹이 미동도 없이 가만히 멈춰 있더니, 세이아드의 손가락이 입술을 스치자마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은 얼핏 보면 세이아드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날렵한 턱선 아래 목울대가 떨리는 게 보였다.

“밤은 위험하니 어서 들어가세요, 대공.”

“왜 이름을 불러 주시지 않는 겁니까?”

세이아드가 그리 말하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는지, 흠칫 되돌아온 시선이 세이아드를 짧게 담았다 다시 다른 곳으로 향했다. 마주친 이후부터 야속할 정도로 침착하던 면모가 조금씩 무너지는 것이 보여서, 세이아드는 좀 더 용기를 냈다.

“지난번 제가 했던 말씀 때문에 지금처럼 거리를 두시는 겁니까?”

만나지 못하는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어리석었던 제안을 끊임없이 곱씹었다. 서로 이어질 수 없는 사이에 거리를 두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은 이성적으로는 맞는 말이었지만, 하루가 지날수록 세이아드는 그 판단이 저를 괴롭게 한다고 여겼다. 그것은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오늘 확신이 되었다.

레사스의 다정함이 다른 이에게 가는 것이 싫다.

흐드러지게 피는 보랏빛 미소나, 마음이 아릴 정도로 맹목적인 그 모습이 저에게만 향했으면 싶었다. 저를 감싸 주는 따듯한 체온을 나누고 싶지 않았고, 그의 달콤한 입술은 오직 세이아드만이 맛봐야 하는 것이었다.

끔찍한 괴물처럼 느껴지던 자신을 그렇지 않은 다른 존재로 생각하게 한 것도 레사스였고, 정작 세이아드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부상에 눈물짓는 사람도 레사스였다. 그를 보고 있으면 세이아드는 꼭 스스로가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물론 지금의 세이아드는 제 누이나 가신들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걸 알았다. 깨닫지 못한 주변의 이들이 자신을 생각보다도 더 살핀다는 것도 이젠 알았다. 하지만 세이아드는 다른 누구보다도 레사스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 말을 무르겠습니다, 전하.”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이 떳떳한 행동이 아님을 알지만, 그는 한 번쯤은 욕심을 내고 싶었다. 놓아주거나 포기하는 것이 맞았던 삶에서 이번만큼은 하고 싶은 대로 굴어 보기로 했다.

“전하께서 이렇게 구시는 게 싫습니다. 제 이름을 불러주시는 걸 듣고 싶습니다.”

세이아드는 이제 레사스가 숨겼던 것이 무엇이든, 그 사실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레사스가 자신에게 그토록 모진 말을 했던 것도, 제 심장에 칼을 꽂았던 것도 결국은 지나가 버린 일이 되었다. 그 행동에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믿게 되었기도 하지만, 세이아드는 달라진 이번 생에 계속해서 과거를 겹쳐 보는 것을 멈췄다.

중요한 건 지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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