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적절한 온도로 주변을 흐르던 기류가 서늘해질 정도로 날 선 음성에 퀼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과일 파이를 작게 잘라 한 입 먹던 세실리아는 퀼리처럼 놀라는 대신, 가만히 세이아드를 보았다.
놀란 것은 그들뿐만 아니라 주변을 지키던 하녀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어린 것이 흠칫 놀라며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스스로도 의도하고 내비친 반응이 아닌지라 세이아드는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마음과 얼굴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아직 그런 말이 나오기에 이른 시기 같은데.”
입맛이 사라졌다. 원래도 식욕이 없던 차에 억지로 쥐어짠 허기가 꺼졌다. 여전히 놀란 눈으로 세이아드를 살피던 퀼리가 얼른 대꾸했다.
“이제 겨우 스물한 해를 사셨으니, 대공의 말씀이 맞지요. 그래도 원래라면 어릴 적 정해진 정혼자가 있으셔야 했던 분이라 약혼을 서두르려는 모양입니다. 그편이 전하의 입지에도 이로울 테고요. 다시 없을 기회라 사교계가 한바탕 뒤집혔어요.”
당연한 이치다. 왕족뿐만이 아닌 귀족 자체의 결혼은 항시 권력의 문제였고, 왕세자가 될 레사스에게 그 같은 절차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스테르가 사클라니 후작가의 힘을 휘두를 수 있듯 레사스에게도 그럴 배경이 필요했다.
놀랄 일이 아닌데 이같이 반응한 자신이 우스웠다. 어리석게 구는 모양이 스스로도 싫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나직하게 퀼리의 말을 긍정한 세이아드는 불현듯 혼자 있고 싶어졌다. 이런 부분에서 그는 자신의 환경이 제법 변했음을 체감했다. 혼자가 익숙했던 그의 옆에 사람이 상주하고, 혼자 있기 위해선 자리를 피해야 하는 환경이 과거와는 달랐다. 번거로울 것 같았던 북적거림은 생각보다 싫은 일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잠시 버거웠다.
“식사는 여기까지 하겠다. 너희는 마저 이곳에 있어.”
“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각하?”
“베트리아 공작이 연통을 넣었으니 지금 가 보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빨리요? 떠날 채비를 하려면 한 시간은 필요할 텐데요!”
당장 일어나 세이아드를 따르려는 퀼리를 세실리아가 붙들었다. 마치 자리를 피하고자 하는 세이아드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녀는 퀼리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오빠가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 그래도 사흘이나 되는 거리니, 기사는 당연히 데려갈 거지?”
은은한 권유지만 실린 힘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세실리아의 말도 옳았다. 영지를 공식적으로 방문하기 위함이니 구색은 갖춰야 했다. 홀로 움직이는 것이 빠를 테지만.
“걱정 말거라.”
“걱정은 할 거야. 가족이 먼 길을 떠나는걸. 하지만 가는 김에 오빠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좋겠어. 영지의 겨울이 시작되기까진 아직 시간도 있으니, 몇 주 정도 자리를 비워도 되고. 내가 있으니까 여긴 걱정하지 마.”
고작 베트리아 영지를 다녀오는 데 몇 주라는 언급을 하는 것이 묘했다. 수도에 가기 위해 걸리는 여정이 딱 저 정도인지라, 마치 그걸 겨냥한 시기 같기도 했다. 실은 세이아드가 멋대로 그리 해석한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실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의식적으로 웃음기를 띠고 한 말에 세실리아는 잘 다녀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배웅하는 누이의 이마에 허리 숙여 입을 맞춰 주자, 가까이에서 그녀가 속삭였다.
“오빠, 나는 이제 전처럼 레사스 전하가 싫지 않아. 남부에서 내가 보고 겪었던 것들은 한 방향만 보던 내 눈을 트게 했거든. 물론 그분은 여전히 의뭉스럽고, 많은 걸 숨기고 있지만, 적어도 오빠를 외롭게 하거나 위험에 처하게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뜬금없는 말에 세이아드가 흠칫 몸을 물렸다. 짙은 검회색 눈썹이 당혹스럽게 휘자, 세실리아가 괜찮다는 듯 손을 잡았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오빠가 알려줬잖아. 나는 요즘 부쩍 그런 걸 느껴. 몇 년 전 오빠의 행동만을 보고 잘못 판단했던 경험이 있으니 더더욱 와닿더라. 레사스 전하와 오빠의 관계도 그런 것 같아. 등을 돌렸다고 여겼던 상황이 어쩌면 오빠를 위해서 했던 일일지도 몰라.”
“세실, 갑자기 왜….”
“그냥. 요즘 부쩍 이상한 꿈을 꿔. 예지인지, 뭔지 모를, 일어나면 기억나지 않는 꿈이야. 이건 돌아오면 말해 줄게.”
세실리아는 손등을 두드려주고는 다녀오라며 웃음 지었다. 가만히 손을 흔드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치 옛날의 어머니가 겹쳐 보였다. 잃어버린 것을 하나쯤은 찾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가 지녔던 다른 하나 또한 찾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것이 무엇인진 명확히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런 마음이 이는 동시에 레사스의 얼굴이 스쳤다.
하지만 레사스를 떠올리기 무섭게 뒤따르는 약혼이라는 단어가 세이아드의 속에 피어오른 불꽃을 흔들었다. 내려가는 길목에 마주한 언덕의 아름다운 풍경은, 오르던 때와 달리 생기를 잃고 건조한 색을 띠었다.
***
베트리아 영지로 향하는 길은 한동안 잘 손보지 않아 제법 도로가 험했다. 원래는 정기적으로 목공들을 시켜 밀던 길목은 방치되어 울퉁불퉁했으며, 그새 자라난 잡초가 많이도 우거진 채였다. 나무들은 가지를 길게 늘어트려 말을 타는 이들을 종종 때렸다.
가는 길에 적당히 길목을 다듬을 겸 세이아드는 기사를 여럿 대동했다. 마차나 말이 지나갈 정도로만 가지를 쳐 내며 그들은 동쪽으로 나아갔다. 곳곳에 망가진 이정표도 보이는 것이, 확실히 손볼 구석이 많았다.
그러나 할 일을 어느 정도 하고 나자 잡념이 무섭도록 일었다. 하룻밤 자고 갈 작은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자 세이아드는 자신도 모르게 레사스를 떠올렸다.
‘끝내 얼굴 한번 비추질 않더니, 약혼 때문이었나.’
함부로 성을 떠날 수 없는 저처럼 레사스 또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서, 간혹 이상한 서운함이 올라와도 참아내곤 했었다. 그러나 약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모든 가정이 뒤집혔다. 세이아드는 제 마음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어수선한지를 곱씹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원했던 일이다. 레사스가 권력을 쥐기를 원했으니 약혼자가 생긴다면 그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질 터. 자신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아스테르를 벌하기 위해서도, 데세르투스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도 무조건 잘된 일이었다.
레사스는 그저 제가 청한 대로 했을 뿐이다.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부탁도 철저히 지키던 사람 아닌가. 불필요할 정도로 과하게 지켜, 헤어지던 순간에도 손조차 잡아 주지 않았다.
너무나 말을 잘 들은 나머지 그리 자신을 찾던 것도 그만두고, 사랑을 읊는 것도 멈췄다. 그러고는 결국 약혼자까지 만드는 날이 왔다. 모두 세이아드의 뜻대로였다.
그러면 기뻐해야지, 세이아드. 죽기 전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할 수 없던 일을 해냈는데.
스스로를 질책하던 그에게 조용히 뒤를 따라오던 기사단장이 거리를 좁혔다.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기사단장이 공손히 고개 숙이며 고했다.
“각하. 가까운 곳에 여관이 있습니다만, 그곳에서 쉬어 가시겠습니까?”
기사단장인 키릴은 세이아드와 긴 시간 어색한 관계를 유지했던 이였다. 그가 기사단장이 된 시기는 세이아드가 막 대공위를 이어받았던 때였는데, 그즈음 키릴의 아버지이자 전대 기사단장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 목숨을 끊었다. 같은 비극을 공유했기에 서로 양립했지만, 동시에 부모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관계였다.
그와는 죽기 직전까지도 이런 사이를 유지했다. 그는 배덕하지 않았지만 깊이 세이아드를 따르지도 않았고, 그러했던 탓에 기사들 중 많은 이가 세이아드를 두려워하거나 악마라 욕하던 시기에도 딱히 그걸 막진 않았다.
“그러거라.”
하지만 키릴에게는 별 사감이 없었다. 세이아드는 언제나 그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기사에게 충성심을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명을 이행한 것만으로도 키릴은 할 일을 다했다.
평소와 같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명하자, 키릴이 고개 숙여 명을 받들었다.
“하면, 사람을 보내 놓겠습니다.”
그렇게 먼저 숙소를 잡아둘 기사를 차출해 보내놓고서도 키릴은 그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뒤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의아해 그를 보자, 키릴은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그간 뵐 수 있는 기회가 없어 말씀을 꺼내지 못했지만, 각하께 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각하의 힘은 그 누구도 대적할 바 없이 전능한 것을 알지만, 앞으로 다시금 영지를 비우실 땐 저희를 데려가셨으면 합니다. 각하의 기사단이니 마땅히 따라다니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키릴이 자처해서 이런 청을 했던 것은 처음이었다.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하자, 키릴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다시금 청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보랏빛이 은은히 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내려앉으며 얼굴을 잠시 덮었다. 남자답고 굵직한 선을 지닌 그는 외관만큼이나 성격도 그와 비슷했다. 말이 없는 점이 세이아드와 비슷한 터라, 그가 이리 구는 것이 낯설었다.
침묵하며 고민하는 사이에도 말은 천천히 움직여 그들을 여관으로 인도했다. 훤한 불빛이 빛나는 마을의 여관은 의외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바깥에 나와 있는 말이 많았다. 얼핏 보기에도 기사들로 보이는 이들이 여관 앞에 있었고, 거기서 난감한 듯 서 있는 자신의 기사가 있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것을 눈치챈 것은 키릴도 마찬가지인지 그가 서둘러 여관 입구로 말을 몰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들이라 기사들의 소속을 어림잡아 봤지만, 복색에서 느껴지는 특징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기운이 자꾸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낀 세이아드는 말에서 내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한 기사들이 따라오는 것도 무시한 채로 그는 몸을 움직였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리웠던 기운을 따라 세이아드는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벌컥 열자마자 여름 특유의 열기가 훅 끼쳤다. 아찔할 정도로 몰아친 더위에 세이아드가 숨을 들이켰다. 가쁜 숨을 들이켜며 제자리에 멈춘 그는, 키릴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여름임에도 가벼운 망토를 두른 채 얼굴을 반쯤 가린 남자는 세이아드가 들어온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살짝 들어야만 볼 수 있는 보라색 눈동자가 세이아드를 보았다.
짙은 시선이 세이아드의 가슴을 관통했다. 일순 환상인 줄 알았다. 꿈에 나올 정도로 지겹게 상상하고 그리워했던 나머지, 결국엔 헛것마저 보나 싶었다. 어쩌면 오래간 정화를 받지 않아 부작용이 제대로 도졌는지도 모른다.
“대공.”
그러나 나직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것은 환상에서 실체가 되었다. 못 보던 사이 한층 더 짙어진 선과 어른스러워진 모습을 한 레사스가 거기 있었다. 망토를 썼음에도 가려지지 않는 흰 피부와 황홀하게 짜여 있는 이목구비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주변에서 쏠리는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긴 레사스는, 표정만큼이나 덤덤한 목소리로 인사를 꺼냈다.
“간만에 뵙네요. 그간 잘 있으셨나요.”
전처럼 환한 미소는 없이, 그저 타고난 다정함만을 띤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