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5. Lunar Eclipse
그물처럼 퍼지는 햇살이 창가로 스며든 아침이었다. 반쯤 열린 창틈으로 지저귀는 새소리가 울렸다. 여름 풀벌레 소리와 함께 합창하는 소리가 제법 요란해 세이아드는 읽던 책을 내려 두었다. 오래되고 낡은 흔적이 역력한 두꺼운 서적의 표면에는 금실로 수놓아진 태양이 있었다.
창가로 걸어가 문을 닫으려던 세이아드가 불현듯 멈췄다. 높은 악시드 성의 창가를 가리고도 남는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울새가 여러 마리 보였던 탓이다. 특이하게도 추운 북부에서 겨울을 나는 잿빛 울새는 봄이면 흰색과 비슷한 은색 털을 했는데, 그 탓에 눈에 띄기 쉬웠다. 서로 부리를 비비며 짧게 우는 모습을 보자마자 누군가 생각났다. 위험한 겨울 숲에서 잘도 다친 울새를 주워 갔던 어린 청년 말이다.
‘아직 살아있으려나.’
몇 달 전, 성에서 울새를 봤던 날이 뇌리를 스쳤다. 죽은 것과 다름없던 작은 생명을 살려내 포동포동 살찌운 주인이 있으니 아마도 잘 살아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 주인을 제법 오래 보지 못한 탓에 확신은 서지 않았다.
레사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넉 달 전이었다. 예배당에서 봤던 뒷모습을 끝으로 세이아드는 제법 오래 그를 보지 못했다. 실은 그리 오랜 시간도 아니다. 일 년에 한 번을 겨우 보던 과거를 생각하면 넉 달은 짧은 축에 속했는데, 마치 몇 년은 보지 못한 것처럼 간극이 크게 느껴졌다.
헤어지기 직전까지 매일같이 함께 해서 그런가. 수도에 올라간 뒤로 하루가 멀다 하고 레사스를 마주했던 시간이 우습게도 몸에 익어서, 세이아드는 간헐적으로, 어쩌면 매일같이, 그가 없는 공백을 느꼈다.
뭘 해도 그저 웃어 주던 다정한 눈웃음이나, 괜찮다고 속삭이던 저음, 뜨겁게 그를 녹이던 체온 따위가 자꾸 그리움을 불러오는 기억이 되었다. 싱그러운 나무 냄새 따위나 녹음어린 바람의 향취를 맡아도 그가 떠올랐고, 그러고 나면 세이아드는 사소한 호위 따위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며 기뻐하던 모습이 무척 보고 싶다는 갈망을 느꼈다.
채워질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은 때로는 아픔이 되어 세이아드의 가슴을 눌렀다. 속이 텅 비는 듯하고 배가 끓어 당장 어떻게든 이 감정을 해소하고 싶은 밤이 많았다. 그대로 말을 몰아 홀로 수도로 가고 싶다는 충동을 따라 발길을 튼 적도 있었으나, 영주란 본디 함부로 성을 비워선 안 될 존재였다.
수도와 가장 떨어진 북부는 오가는 길이 원체 길어 함부로 여정을 계획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간만에 북부로 돌아온 제 누이를 교육시켜야 했다. 의무가 발목을 잡았다.
그 같은 몇 달을 보내고 나자, 결국 세이아드는 자신이 품은 마음이 확실히 호감의 범주에 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삭풍만이 몰아치던 그의 삶에서 호감이라는 감정은 눈을 녹이는 봄바람처럼 따듯하고 빛나는 것이라, 세이아드는 한동안 이런 자신의 마음을 다시금 외면하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감정은 피한다고 하여 사라질 것이 아니라, 세이아드가 억지로 고개 돌려 버릴 때에도 항상 세이아드의 마음 안에 있었다. 결국 그것을 덜어내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세이아드는 여름을 맞았다.
한참이나 울새를 살피며 서 있던 세이아드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나무에서 놀고 있던 울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고개만을 슬쩍 돌려 문을 살핀 세이아드는 밖에 있는 이를 짐작하곤 입을 열었다.
“들어와도 된다.”
잔잔한 허락에 문이 열렸다. 나무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 세실리아가 희게 웃었다. 긴 은발을 느슨하게 땋은 그녀는 몇 달 사이 훨씬 더 활기차고 밝아져 있었다. 어릴 적의 장난기 많던 모습이 돌아온 누이를 지켜보는 것이 근래 세이아드의 유일한 낙이었다.
“오빠, 같이 점심 먹자. 퀼리가 도시락을 준비해 놨어. 오랜만에 바깥에 나가서 옛날처럼 먹고 싶어.”
허락받을 것을 확신했는지 세실리아는 가벼운 외출복 차림이었다. 목이 파인 푸른색 드레스는 활동성을 고려해 간소한 모양이었다. 손목이 드러나는 소매나 치마 끝단에 붙은 레이스 정도가 세실리아가 좋아하는 장식이었고, 대개 누이는 승마복이나 바지 차림을 더 즐겼다. 오늘은 평소보다 나름대로 꾸민 축에 속했다.
“알겠다.”
어차피 영지 시찰을 나설 시간이었으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이상하게 미련이 남아 창가의 울새를 한 번 더 살핀 뒤, 그는 세실리아에게 걸어가 팔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자연스레 받으며 손을 올린 누이가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퀼리가 칭찬을 해 줬어. 이제 제법 장부를 잘 본다고 하더라고. 내 생각에도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아. 오빠처럼 영지를 잘 살피진 못하겠지만 말이야.”
세이아드는 스스로를 향해 냉소지으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세실리아가 모를 자신은 영지보다도 니르아를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된 광인이었다. 오히려 영지에 대한 애정이 어려서부터 컸던 세실리아가 영주에 훨씬 더 어울렸다. 누이는 돌아온 이후부터 왕실에서부터 하사받은 것들을 통해 북부를 어떻게 키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지 시찰을 하면 농민들을 비롯한 상인들과 자주 어울리는 것도 누이의 몫이었다. 한동안 얼어붙어 있던 것처럼 잔잔하던 세실리아의 면모는 아스테르와 거리가 멀어진 뒤부터 녹아서 사라졌다. 사람을 원체 좋아하고 살피던 성정이 돌아온 누이는 사람을 이끄는 일에도 재능이 있었다. 자신이 없던 순간 티테르들을 통솔했던 부분도 그 같은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 사이에 둘은 성 근처의 언덕에 도달했다. 초록색 잔디가 넓게 깔린 둥근 언덕은 북부를 둘러싼 숲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이었다. 세실리아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곳이기도 했다. 눈이 종아리만큼 쌓이는 겨울이면 어린 세실리아는 눈에서 자길 굴려달라고 떼쓰곤 했었다. 그때마다 레사스 또한 이런 놀이를 같이 하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나이가 아니게 되었지만….
밀려드는 씁쓸함에 세이아드는 한숨을 삼켰다. 레사스와 헤어진 뒤부터 항상 속에 무언가 얹힌 듯이 갑갑했다.
“오셨습니까? 오늘따라 두 분께서 함께 오시는 모습이 유달리 귀여우시네요. 이 퀼리의 마음이 아주 흐물흐물하게 풀어지고 있어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던 퀼리가 그들을 반겼다. 바구니에 한가득 담아 온 음식과 접시를 하녀가 능숙하게 차려냈다. 갓 구운 푹신한 빵과 졸여 둔 베리들을 채운 파이, 뿔닭으로 만든 찜 따위가 놓였다. 식욕이 딱히 없던 세이아드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것들을 흘끗 보다 시선을 돌렸다. 목적 없이 흩어진 눈길이 수도가 있는 남쪽을 향했다.
“또 그런 얼굴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대공! 그렇게 식사에 관심이 없으시면 몸이 상하십니다.”
“맞아, 오빠. 좀 먹어야지. 장소도 다르고 하니 훨씬 환기되지 않아?”
그게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세실리아가 자리에 앉으라며 그를 당기곤, 곧장 그에게 음식을 권했다. 곱게 잘린 것을 보고 있자니 둘의 성의가 느껴져, 세이아드는 하는 수 없이 먹는 시늉은 하기로 했다. 움직일 일이 많아 열량을 채울 필요도 있었다.
접시를 앞에 두고 세이아드는 그것을 드는 대신 빵부터 집었다. 창백한 손으로 빵을 찢어 감흥 없이 삼키자, 안심한 듯이 세실리아와 퀼리도 식사를 시작했다. 그들의 시중을 들며 퀼리가 보고를 시작했다.
“오늘은 특별히 요리장에게 힘을 쓰라고 했습니다. 여름이면 북부의 음식이 그나마 제일 맛있을 때니까요. 아, 각하. 그러고 보니 오기 전 막 동부에서 전령이 왔었습니다. 베트리아 공작께서 보낸 전갈이더군요.”
“스텔라 언니가? 급한 일이야?”
안 좋은 일이 있는지부터 걱정되는 건 비단 세이아드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기 전 겪은 일이 심각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실리아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묻자 퀼리가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상황은 아니지만 각하께서 빠르게 동부로 와주셨으면 한다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베트리아령까지는 사흘이면 갈 수 있으니, 살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한동안 끊겼던 동부와의 교류를 늘리면 영지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맞아, 오빠. 내가 여길 지키고 있을게.”
전대 공작이 된 셀피니 베트리아와 사이가 틀어진 이후 몇 년간 교류가 없던 상황을 의식해서인지, 퀼리가 먼저 설득을 해왔다. 셀피니 베트리아를 영지에 머물게 한 뒤로 호전된 관계는 남부에서의 일 이후로 훨씬 더 좋아졌으니, 슬슬 그럴 시기였다.
“다 컸구나, 세실리아.”
청을 수락하는 동시에 누이를 칭찬하자 세실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기쁜 듯 오빠의 팔에 매달린 그녀가 상냥한 말을 했다.
“셀피니 님을 뵈면 다음에 화관을 만들어드리겠다고 전해 줘.”
셀피니 베트리아는 바로 몇 주 전 베트리아 영지로 돌아가게끔 사면을 받았다. 반년 넘게 세이아드의 감시하에 있으면서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국왕이 내건 이유였지만, 실은 그가 티테르와의 관계 회복을 노리고 있다는 게 뻔했다.
어쨌든 잘된 일이다. 셀피니의 폭주가 아스테르로 인해 불거졌던 것임이 지금은 확실하니, 왕세자를 멀리하는 한은 그녀 또한 안전할 것이다.
아. ‘전’ 왕세자라고 해야 하는 것을 잊었군.
국왕은 세이아드와의 약속을 어느 정도 지켰다. 바로 한 달 전의 일로, 셀피니가 사면된 것 역시 이로 인한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레사스는 왕세자로 내정되었다. 장자 승계의 법칙을 어지간하면 어기지 않던 솔리아스에서는 흔치 않은 일로, 당연하게도 많은 반발이 오갔다. 사클라니 후작을 위시한 아스테르의 세력이 협박 아닌 협박과 반대를 외쳤지만, 때 맞춰 데세르투스가 퍼트린 소문이 왕성까지 흘러들었다.
‘솔리아스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낸 악마의 씨앗이 왕가의 피에 흐른다.’
교묘히 아스테르의 외양을 소문에 섞은 티아키 덕에 레사스를 지지하는 쪽에서 강경히 소문을 밀어붙였다. 반박하고자 하면 언제든 반박할 수 있는 그저 소문일 뿐이나, 정작 당사자인 아스테르가 별 반응이 없는 탓에 판세가 기울었다.
그게 문제다. 아스테르의 행적이 불안할 정도로 조용했다.
얼핏 보면 평온이 찾아온 듯한 여름이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북부의 여름은 덥지 않아 항시 시원했다. 영지민들은 전처럼 세이아드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되찾은 프로시어스의 명예에 활기를 띠었다.
위축되어 있던 이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세실리아는 그의 옆에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안온한 나날이었다. 세이아드가 감히 욕심조차 내보지 않았던 그런 찰나가 이어졌다.
하지만 해결된 게 없었다.
악마는 아직 바깥, 아스테르의 옆에 존재했다. 진저리 날 정도로 화를 냈던 아스테르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그가 진즉 무슨 짓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 세이아드를 불안케 했다.
게다가, 검. 레사스가 찾아야 한다고 말했던 ‘거룩한 죽음’의 행방이 묘연했다. 바로 이 점이 레사스가 왕세자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왕세자가 될 수 없는 이유였다. 왕세자를 책봉하는 의식엔 검이 필요했는데, 아스테르는 국왕의 뜻을 거스른 채 검을 되돌려주는 것을 거부했다.
일단은 데세르투스에게도 검을 찾으라 명한 상태고, 세이아드 또한 북부의 숲을 최대한 뒤져 보았다. 그러나 북부의 숲은 크기와 깊이가 남부와는 차원이 달랐다. 혼자의 힘으로는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더군다나 어떤 곳에 그것을 숨겼을지도 짐작가지 않았다. 동부나 서부에 있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러고 보니 전해드릴 소식이 하나 더 있었네요. 레사스 전하의 약혼자 되실 분을 폐하께서 한창 물색하시는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귀족들이 난리가 났어요.”
검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던 세이아드의 귀에, 퀼리의 천진한 목소리가 들렸다. 국가의 행사를 말하듯 즐거워하는 말투에 잠깐 동안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천천히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약혼?”
그리고 저도 모르게 되물은 목소리가, 스산하게 허공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