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티테르와 가이드는 언제나 공생하는 존재이니, 그들의 활약이 곧 솔리아스의 업적이 아닌가? 짐이 그것을 몰랐어. 숲의 정화라는 큰 업적을 두고도 잠시 눈이 멀었다. 레사스, 네 말이 옳아.”
티테르를 견제할 대상으로 여기던 태도가 무색하게끔 국왕은 보물을 보듯 티테르들을 눈에 담았다. 세이아드는 여태껏 동료라 여기지 않던 티테르들을 향한 동질감을 그 순간 느꼈다. 국왕의 욕망에 좌우되는 도구라는 것이 지금 와 닿았던 탓이다.
레사스의 화술에 넘어간 국왕은 반박을 위해 입을 열려는 아스테르를 제지했다. 그러고는 좌중을 보며 외쳤다.
“실드라스 가문의 죄는 나라의 안위를 위협하는 중한 것이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실드라스에게 주어졌던 티테르의 통솔권을 박탈하고, 반역을 도모한 전대 공작의 죄를 따라 공작의 지위 또한 강등한다. 어떤 지위로 남을지는 대신들과의 회의 후에 정하도록 하지. 실드라스의 일부 영토는 강등된 지위에 따라 왕실에 귀속될 것이다!”
시온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비참함을 꾹 삼키며 고개 숙인 그는 주먹을 쥔 채로 침묵했다. 그러나 국왕의 결정은 절대적이었으며 실드라스의 죄는 그만큼 중했다.
세이아드는 그 순간 어머니가 반역의 죄명을 쓰고도 자신이 지위를 지킬 수 있던 것이, 시온이나 레사스로 인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체감했다.
전대 실드라스 공작은 어머니를 그렇게 몰아가 놓고, 무슨 연유로 아들의 부탁을 따라 나의 가문을 살려 둔 거지…?
자세히 파악하고 싶지 않았던 실드라스 공작의 의중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실드라스 가문에 대해서는 쳐다볼 필요도, 알 가치도 없다고 여겼지만, 아까 전 시온의 말까지 듣고 나자 진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해 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증오해야만 한다고 여겼던 대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그러나 시온 실드라스는 티테르서의 의무를 지켜야 하니 목숨만은 거두지 않겠다. 그대는 아비의 죄를 대신 갚아 나가며 왕국에 헌신하라!”
고개 숙인 시온은 짧은 침묵 후에 허리를 숙이며 국왕의 은혜에 감사했다. 갈라진 목소리가 시온의 처참한 심정을 대변했다.
“폐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국왕은 낮게 웃은 뒤 이번에는 뒤돌아 세이아드를 보았다.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이 잠시 감돌긴 했으나 그는 금세 기꺼운 표정을 지으며 세이아드의 앞에 다가왔다. 검을 잡아 보지 않은 부드러운 손이 세이아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공의 활약이 온 왕국에 퍼져 내 모를 수가 없었네. 전대 악시드 대공의 일 또한, 짐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끝난 비극임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고. 이같이 훌륭한 능력을 지닌 대공을 시르칸 실드라스의 간악한 혀로 인해 잃을 뻔했다니, 참으로 등골 오싹한 일이야. 이 미안한 마음을 아무리 전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국왕은 진중한 목소리로 세이아드를 회유하기 위한 조건을 내놓았다.
“태초부터 북부의 것이었던 권리와 지휘를 돌려주도록 하지. 그간 오명으로 인해 잃어버린 재물 또한 악시드 성의 금고에 채워 줄 것이며, 왕국의 안위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대공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네. 무엇이든 말이야. 솔리아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세이아드는 가만히, 국왕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의 귀로 들려오는 말들이 하나같이 현실적이지 않고 동떨어진 먼 곳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소리가 웅웅 울리고 움직이는 입술이 느릿하게 보였다.
이상했다.
어머니가 처형된 후, 아버지가 몸을 던져 그들을 버린 후, 세이아드는 그때부터 항상 어머니의 누명을 벗기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그것만을 위해 한평생을 살았고 아스테르에게 휘둘려 무엇이든 했다. 비로소 진실을 인정받는 시기가 오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만큼 기쁘지는 않았다.
대체 이게 뭐라고 그토록 매달리고 집착했는지 모를 만큼 그에게 찾아든 환희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이로 인한 기쁨보다는, 자신에게 돌아온 세실리아를 보았던 그 순간이, 절 걱정하며 웃던 퀼리와 있던 찰나가, 그리고 자신에게 사과하던 시온과 브레드히트를 보던 순간이 더 마음을 움직였다. 나아가 이 모든 것보다도 그냥, 레사스와 함께한 순간들이 더 기뻤다. 국왕에게 인정받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보다도.
평온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거였다면 손만 내밀면 되었을 텐데.
불현듯 든 깨달음이 세이아드를 후회로 덮었다. 어머니의 명예를 찾기 위해 그의 옆에 있을 수 있던 사람들을 포기해 버린 것이 슬펐고, 언제고 자신을 진심으로 싫어한 적 없었던 레사스와 그렇게까지 어긋났다는 것이 괴로웠다.
악마의 농간에 놀아난다는 게 이런 말이었나.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세이아드는 국왕의 말에도 어떠한 답을 하지 않고, 대신 천천히 고개를 틀어 아스테르를 노려보았다. 세이아드가 제일 취약해진 찰나에 다가와 태양처럼 굴어 주고는, 뒤에서 모든 일을 아스테르가 조종하고 있었음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이것은 본능적인 직감이기도 했다.
그러자 국왕 또한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아스테르와 세이아드를 번갈아 보며 의아해하는 국왕에게, 세이아드가 나직하게 물었다.
“소원을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하면, 지금 들어주십시오.”
세이아드가 이리 빠르게 마음을 정할 줄 몰랐는지 국왕은 놀라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게, 대공. 내 뭐든 들어주지.”
세이아드는 아스테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이 지금 청할 소원에 아스테르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똑똑히 지켜보기 위해서.
“저는 ‘거룩한 죽음’의 주인이 바뀌기를 원합니다, 폐하. 현존하는 어떤 가이드보다 강한 분이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누구도 예상 못한 발언에 예배당이 웅성거렸다. 레사스의 뒤에 있던 푸른 달의 갑옷이 일제히 놀란 숨을 들이켰으며, 아데나는 당장이라도 반박하고 싶어 움찔거렸다. 놀란 것은 기사들만이 아닌 티테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아스테르의 반응이 제일 볼만했다.
레사스를 내내 노려보던 눈이 천천히 세이아드에게로 향했다. 동공이 좁혀진 푸른 눈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세이아드를 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 전체에 그가 느끼는 충격이 드러나고 있었다. 세이아드는 저것이 연기인지, 아니면 진짜로 자신이 이렇게 굴 줄 몰랐는지를 가늠해 보려 했다. 그러나 곧 상관없다는 걸 깨달았다. 뭐든 저 표정을 본 것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대공, 그것은.”
국왕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세이아드를 보았다. 아예 마음에 없던 선택지는 아닌지 곧장 부정하진 않았지만, 이 같은 중대사를 여기서 정할 수 없으니 망설이는 듯했다. 하지만 세이아드는 강하게 주장했다.
“왕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이 아닌데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레사스 전하께서는 이번 여정 내내 가공할 만한 능력을 선보이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티테르를 위해 직접 숲으로 들어왔고, 니르아도 그분을 해치지 못하셨다는 걸 들으셨을 텐데요.”
“세이아드!”
그 찰나 아스테르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국왕이 놀랐는지 흠칫 아스테르를 보았다. 그만큼 듣는 이의 등골이 서늘해지는 노성이었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아스테르를 무시한 채 국왕을 강하게 핍박했다.
“솔리아스의 이름을 걸고 하신 맹세입니다. 제가 바라는 소원은 오직 이것입니다. 부디 신중히 고려하셨으면 합니다.”
더는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듯 말을 맺는 세이아드에게 아스테르가 성큼 다가왔다. 팔을 거칠게 붙든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외면하자 아스테르는 국왕에게 호소했다.
“아버지,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고작 약조 때문에 왕세자의 자리를 바꾸시겠다는 겁니까? 반발이 아주 클 거라는 건 폐하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어디 그뿐인가요? 어머니께서 남기신 유언을 생각하신다면 이 같은 망설임조차 어머니에 대한 모욕입니다!”
그러자 고민하던 흔적이 역력하던 국왕이 일순 표정을 굳혔다. 그는 노기가 들어찬 얼굴로 아스테르를 쏘아보더니, 같이 언성을 높였다.
“무엄하다!”
역린이 건드려진 사람처럼 국왕은 아스테르에게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고 외쳤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네 어미를 생각해 레사스의 힘이 월등함에도 왕세자의 자리를 지켜 주려 했던 것을 대체 왜 모르느냔 말이냐! 이 아비의 마음을 알지도 못한 채로 너는 마치 왕이 된 것처럼 벌써부터 내게 이리 떵떵거리는 것이냐? 두렵구나, 두려워. 너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면 짐의 안위는 바람 앞의 촛불과 다름없을 터!”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소리친 국왕이 세이아드와 짧게 눈을 마주쳤다. 그는 큰 숨을 내쉬고는 몸을 휙 돌렸다.
“대공의 소원은 짐이 이곳에서 멋대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하지만 그래, 일단은 그 자리는 공석으로 두는 것이 맞겠군. 아스테르, 너는 당장 ‘거룩한 죽음’을 들고 왕궁으로 돌아오거라! 레사스, 너는 나를 따라 지금 수도로 가자꾸나.”
아스테르를 보지도 않고 명한 국왕은 용건이 끝났다는 듯 기사단에게 손짓했다. 태양의 빛이 황급히 왕을 호위하며 나섰고, 푸른 달의 갑옷은 주저하면서도 일단은 왕을 배웅하기 위해 그 뒤를 따랐다.
레사스는 왕을 따라 나가기 전 크게 걱정하는 눈으로 세이아드를 보았다. 말을 섞을 틈도 없이 나가는 레사스의 존재가 아쉬워 세이아드 역시 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움직이려는 그를 아스테르가 꽉 쥐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인간 같지 않은 힘이 세이아드를 움켜쥐었다. 등골에 소름이 돋아 세이아드는 흠칫 몸을 틀었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널 위해 약속했던 것을 들어준 내게, 감히 네가 이러는 건가? 너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은 버러지를 위해 또 나를 버려?”
아스테르의 눈은 기이한 빛을 띠고 있었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하얗게 변한 눈이 세이아드를 집요하게 잡아당겼다.
“그 답은 전하께서 제일 잘 아시겠지요.”
그의 기세는 섬뜩했으나 세이아드가 두려워할 것은 아니었다. 서늘함을 담은 목소리를 들은 아스테르가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기이한 반응을 보였다. 붉은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리더니 곧 웃음이 그의 입가에 맺혔다.
“하하, 아하하!”
터져 나오는 웃음이 허공을 울렸다. 그러자 레사스가 단숨에 그의 옆으로 와, 세이아드를 쥔 아스테르의 손목을 붙들었다. 팔을 뜯어 낼 듯이 쥐고 있는 아스테르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형님, 이만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가야지. 가고 말고.”
즐겁다는 듯 웃은 아스테르는 짙게 웃으며 세이아드의 팔을 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제지하는 레사스의 손까지 훑고 다시 올라온 시선이 새카맸다.
“좋아.”
집요했던 힘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아스테르는 손을 놓고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물러섰다. 레사스가 세이아드를 막으며 그들의 사이에 섰다. 그런 둘을 바라본 아스테르는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이상하리만치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드. 너를 위해 최대한 평온한 방향으로 일을 해결하려 했어. 너를 나의 곁에 오게 할 가장 쉬운 방법을 두고도, 네가 슬퍼하지 않게끔 귀찮은 길을 무릅썼지. 이 점만은 기억해.”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이상하리만치 불안한 기분에 세이아드가 낮게 반박했다. 아스테르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더니, 하아, 깊은숨을 내쉬었다.
“잠시간은 멋대로 굴게 해 주지. 가장 기쁠 때 마주하는 절망만큼 달콤한 것이 없으니 말이야.”
아스테르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자세를 단정히 했다. 방금 전의 흐트러짐은 없었던 일인 것처럼 반듯하게 허리를 편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들을 지나쳤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레사스를 흘끗 보며 아스테르가 낮게 웃었다.
“죽은 별의 껍데기에 잘도 숨어 있었군. 버러지같이 굴며 잘도 내 눈을 속였어. 제법이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아스테르는 할 일을 끝낸 사람처럼 우아하게 걸어 예배당을 떠났다. 그를 위해 남아 있던 호위 기사들이 뒤따라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그들뿐이었다. 레사스는 우두커니 서서 잠시간 말이 없더니 지친 듯한 얼굴로 세이아드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따스한 보라색 눈동자가 소중한 존재를 보듬듯 그를 살폈다. 분명 레사스에게는 잘된 상황임에도 그는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크게 두려운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이다가 작게 속삭였다.
“다시 볼 때까지, 아프지 마세요. 그대가 좋아하는 것만을 보고, 소중한 사람들과 있어요. 대공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할게요. 나는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상하게 불안해져 물어보는 말에 레사스는 그저 웃었다. 부드럽게 웃은 그는 세이아드를 만지고 싶은 듯 손을 움찔거리다가, 물러섰다. 겨우 만났는데 닿을 새도 없이 물러서 버리는 그를 잡기 위해 세이아드가 움직였으나 레사스가 더 빨랐다.
“그대들은 다음 토벌 전까지 각자의 영지에서 휴식을 취하세요. 조만간 전령들이 갈 겁니다. 부디 달의 가호가 있기를.”
레사스는 솔리아스의 인사법과는 묘하게 다른 인사를 남기곤 몸을 틀었다. 등을 돌린 레사스는 뒤돌아보지 않고 어딘가 급한 사람처럼 문을 나섰다. 그를 잡기 위해 저도 모르게 뻗었던 세이아드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왕족들이 모두 물러가자 드디어 예배당이 소란스러워졌다. 세이아드는 그에게 가장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세실리아에게 답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닫힌 문을 응시했다.
이제야 레사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불길한 예감이 세이아드를 휘감았다. 문을 바라보는 세이아드의 뇌리로 죽기 전 보았던 환상이 스쳤다.
무수히 죽어 버린 사람들과 레사스를 삼키는 뱀. 보는 것만으로도 피비린내가 물씬 풍겼던 끔찍한 광경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일어날 미래를 미리 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