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폐하께서 여길 어떻게….”
당혹스러움을 드러낸 아데나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아스테르 쪽에서 부른 것은 아님이 확실했다. 생각해 보면 그게 맞았다. 아스테르가 이렇듯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을 보면 시온을 제거하고 싶어함이 분명한데, 이 안건이 국왕에게까지 간다면 그를 처벌하는 데 시간이 길어지지 않겠는가. 왕의 권한을 위임받은 상태에서 일을 처리해 버리는 쪽이 그에게는 편할 터.
그렇다면 국왕을 부른 건… 레사스인가?
할 일이 있던 것이 이런 거였나. 수도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대략 하루라, 그가 이런 일을 계획했는지 확신이 서진 않았다. 결과가 어떻든 국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었다. 솔리아스 왕국의 결정권을 가진 이라면 아스테르도 행동을 사려야 할 터.
다만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아스테르의 능력이었다. 세이아드는 방금 시온에게서 들은 정황이 자신이 숲의 끝에서 겪은 일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갑자기 이지를 상실한 듯 구는 것은 꼭 세뇌당한 사람같았는데, 숲에서 아이들을 세뇌했던 청년이 아스테르라면 그에게 세뇌의 능력이 있음이 확실했다.
그가 국왕마저 세뇌한 거라면 어떡하지? 혹은 세뇌할 수 있다면?
아스테르가 정확히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워낙 많은 일이 한번에 일어난 탓에 이같은 정황을 파악하는 것도 조금 늦었다. 세이아드는 아데나를 유의깊게 살폈다. 그의 측근에 있는 이들 모두가 세뇌를 전제로 움직이는 것인지가 의아했다.
“가보지 않고 뭘 하나? 폐하께서 오셨으니 왕실 기사단의 일원으로써 호위하는 것이 우선일 텐데.”
그러나 일단은 아데나를 눈앞에서 치우는 것이 우선이었으므로, 세이아드는 서늘한 음성으로 명했다. 안 그래도 갈등하고 있던 그가 분한 듯 세이아드를 쏘아보았다. 무례한 시선에 세이아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네 무례를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실드라스 공작을 그리 다룰 수 있다하여 티테르가 네 발밑에 있다는 착각은 하지 말거라. 당장 네 옆에 있는 공작이 손 하나만 움직여도 네 하찮은 숨통은 진즉 끊어졌을 터. 그것을 인내하는 것은 티테르가 도리를 아는 존재여서다.”
세이아드는 시르칸 실드라스가 무엇에 염증이 났는지 약간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의 사정은 알고 싶지도 않고, 알 도리도 없지만, 시르칸은 티테르의 입지를 항상 늘리려 했다. 왕국은 어느 순간부터 티테르의 헌신을 당연히 여겼으며 그들의 힘을 불완전한 것으로 취급했다. 전대 국왕의 치세부터는 티테르를 이용하는 움직임이 더했으니, 그같은 성격이라면 실증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한 미친짓에 어떠한 정당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아데나는 세이아드의 말이 무척이나 거슬리는지 오히려 눈을 치떴다.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이의 기세는 다른 기사들을 움찔하게 할 정도로 매서웠으나, 세이아드에게는 위협조차 되지 않는 하찮음이었다.
세이아드는 비틀린 입매를 한층 더 짙게 만들며 아데나를 그저 주시했다. 그러고는 항시 그의 내면에 감도는 힘을 지그시 풀었다. 세이아드의 제어 없이는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덮칠 수 있는 정제되지 않은 살기가 방 안을 감돌기 시작했다. 방 안에 존재하는 모든 그림자가 일렁이고, 공기가 바늘처럼 따가워졌다. 세이아드의 회색 눈동자에 붉은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왜 사람들은 티테르가 오직 그들의 힘을 괴물에게만 쓰는 것이 자비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걸까.
통치자가 되고자 했다면 티테르는 진즉 가이드를 핍박하여 왕실을 뒤엎었을 것이고, 그들의 힘을 이용해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힘을 가진 이들이 체제에 순응하는 것은 공동의 안위를 위한 합의라는 것을, 그 희생을 모르는 자들이 역겨웠다.
살기가 거세지자 시온이 불안한 듯이 세이아드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바짝 얼은 공기가 버거운지 주변의 기사들이 숨조차 쉬지 못하고 그를 주시했으며, 코앞에서 그의 기운을 받아내는 아데나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그것은 자존심을 앞서는 본능적인 공포였다.
“꺼지거라, 당장.”
세이아드의 축객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아데나가 시온을 잡은 팔을 놓았다.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아데나는 물러서면서도 분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악마와 다름없는, 사이한 힘을 잘도….”
“벌벌 떠는 개새끼처럼 굴면서 입만 살았군. 마지막이다. 실드라스 공작은 내가 예배당으로 데려갈 테니, 내 앞에서 사라져. 명을 어긴다면 내가 직접 너를 이곳에서 사라지게 해 주지.”
눈동자의 붉은 안광이 진해지자 결국 아데나가 입모양으로 욕을 읊조리며 그를 스쳤다. 아데나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던 기사들이 황급히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순식간에 철수하는 기사들을 무표정으로 쏘아보던 세이아드가 멍하니 서있는 시온을 내려다보았다.
“멍청하게 그만 서 있고 움직이는 게 어떤가, 공작.”
국왕의 행차에는 어차피 그들 또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시간에 맞춰 움직이기 위해 시온을 재촉하자, 그가 입술을 꾹 깨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왜 도와줬죠? 당신의 입장에선 오히려 내가 모욕당하는 쪽이 나았을 텐데?”
차라리 그랬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릴 정도로 시온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결코 기대하지 않았던 행동을 적이 했다는 것이 죽도록 싫은 모습이었다.
“나는 너의 아비와 달리 같은 의무를 짊어진 자를 방치할 생각이 없다.”
말을 끝낸 세이아드가 걷기 시작했다. 시온은 굳이 도망가려는 의사없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가 반항하고자 했다면 어떻게든 아까 힘을 썼을 것이다. 티테르의 힘은 일개의 기사들이 제압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시온은 그중에서도 강한 축이었으니 반항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이아드의 어머니나 그가 순응한 것은 왕국의 법칙을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둘은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예배당으로 가는 길은 몰랐지만, 세이아드는 사람들의 기운이 많이 느껴지는 곳으로 발길을 틀었다. 짐작이 맞았는지 시온은 별다른 지적 없이 그를 따라왔다. 여태까지 봤던 중 가장 얌전한 시온의 모습이었다.
예배당으로 짐작되는 거대한 문이 보이는 4층에 다다르자, 그때쯤 시온이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당신을 싫어했던 건 아닙니다.”
뜬금없는 말에 세이아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시온은 이 말을 꺼내는 것이 미칠 정도로 수치스럽고, 자존심이 상하는 얼굴이었다. 이를 악문 그가 말을 이었다.
“…레사스는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당신을 좋아했죠. 당신이 그 애를 버러지보다도 못하게 취급하던 때에도, 당신의 앞에서만 덤덤한 척 굴었어요. 당신을 마주하고 온 날이면 칼에 찔린 사람처럼 창백한 안색을 하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질 않았습니다. 내게는 한번도 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지만, 그 애가 종종 울었던 것도 알아요. 나는 그런 당신이 너무 싫었어요.”
짐작도 못했던 말이라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레사스가 매달리는 것을 그만둔 이후로 마주할 때마다 그는 더는 예전처럼 굴지 않았기에, 세이아드는 당연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레사스가 자신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나라는 좋은 친구가 옆에 있는데도, 고작 어릴 때 먼저 만났다는 이유로 당신을 잊지 못하는 레사스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나는 레사스의 가장 듬직한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당신같은 사람이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화가 났어요. 그런데 지금 보니….”
시온은 무언가 깨달은 사람같은 표정이었다.
“레사스에게 있어서 당신은 친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 같네요.”
시온은 잠시간 허탈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납득이 된다는 듯이 고개를 홀로 끄덕였다. 그리고 세이아드 또한 잠시간 아무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 괜찮아서, 티가 나질 않아서, 그냥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
레사스가 좋은 연기자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자신의 앞에서 남들에게 하듯 아무렇지 않은 척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 애가 사실은 괴로울 때면 오히려 감정을 숨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손등.
푸른 핏줄이 돋아 있는, 창백한 손등.
괴로울 때면 오히려 웃어 버리던 레사스의 모습 아래로 세이아드는 항상 잘게 떨리는 손을 발견하곤 했다. 사람의 감정은 결국 몸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걸 말해 주듯이, 레사스는 얼굴로는 감정을 숨겨도 어딘가로는 티를 냈다. 먼 과거엔 볼 수 없었던 것을 그는 최근들어 자주 목격하곤 했었다.
그러면 만약에. 만약에 네가….
네가, 지난 삶에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면? 나를 마주하던 모든 시간동안 시온이 말하듯 앞에서만 그런 척을 했던 거라면?
가정하는 순간 숨통이 조여 왔다. 감당이 되지 않는 두려움에 세이아드는 빠르게 생각을 차단했다. 그의 태도를 파악하는 내내 단 한번도 이렇게 여겨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여길 단서가 없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닐 거다. 어느 순간부터는 분명 나를 미워했을 터.
“나는 그냥 대공을 증오하는 것이 맞다고 여겼어요. 아버지께서는 항상 프로시어스 가문의 힘은 삿된 것이고, 전대 가주의 행동이 티테르의 격을 떨어트린다고 들어왔습니다. 상종할 가치가 없는 악마의 하수인들이라고요. 많은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정작 아버지가 악마를 불러낸 장본인이라면….”
시온은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곤,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잘못된 사람을 증오하고 있었네요. 증오해야 했던 것은 나의 아버지와 가문일 텐데.”
가족의 치부를 인정하는 고통스럽고도 수치스러운 순간을 거친 그는, 오히려 후련해졌다는 얼굴로 세이아드를 지나쳤다. 스스로의 의지로 예배당 문 앞에 선 시온이 문을 열기 전 속삭였다.
“죗값은 목숨으로라도 치르겠습니다. 그러나 동생과 어머니는 어떠한 죄도 없으니, 그것만큼은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대공께 저지른 모든 무례는 사라지지 않겠죠. 용서해 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지금도 분할 정도로 수치스럽지만….”
고개 돌린 시온이 예배당의 문을 올려다보았다. 나무 문에 새겨진 높게 뜬 태양과, 그의 옆을 지키는 달, 그리고 사방에서 빛나는 별들을 잠시간 응시한 시온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대공. 죄송합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시온에게는 남아 있었다. 그저 오만하고, 귀족 특유의 아집을 부린다고 여겼던 어린 청년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세이아드는 아주 오래간 자신의 속에 딱딱하게 뭉쳐 있던 덩어리가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긴 시간 겪어 온 시온과의 마찰이 이 일로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세이아드는 본인 또한 확고한 편견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과거의 자신은, 생각보다도 모르는 것이 무척 많았다. 비단 그를 둘러싼 음험한 일뿐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는 존재이면서도, 영혼을 흔드는 일을 마주하면 충분히 바뀔 수 있기도 한 존재라는 걸.
그리고 어떤 마음은, 무수한 일을 겪어도 처음과 같이 그 자리를 지키기도 한다는 걸.
열려 있는 예배당 문 틈으로 비스듬히 햇빛이 퍼졌다. 자신의 얼굴을 덮는 흰 빛을 느끼며 세이아드는 그와 같은 온도를 한 남자가 미칠 듯이 보고 싶어졌다.
너무나도 그리워서, 무서워질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