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99화 (97/147)

#99

공작가로 향하는 길목마다 소문이 무성했다. 영지 내의 모든 사람이 하나라도 더 소식을 듣기 위해 기웃거리며 그들의 영주가 어떤 처분을 받을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밤사이 무슨 말이 퍼진 건지, 악마가 태어난 땅이니 영지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공작저의 성벽 근처로 향할수록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영주에 대한 원망이 폭동을 일으킬 정도로 살벌해 보였다. 이대로라면 아스테르가 시온에게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남부에 분열이 생길 것처럼.

“대공께서는 먼저 들어가세요. 괜한 소문을 만들수도 있으니, 따로 들어가는 쪽이 낫겠습니다.”

세이아드가 제안하기도 전에 레사스가 그리 말했다. 말을 모는 속도를 서서히 늦춘 그를 돌아보았다. 레사스의 손에는 여전히 사과가 들린 채였다. 먹으라고 줬더니 내내 들고 있는 것이 신경쓰였다. 그것뿐인가. 레사스가 먼저 자신을 배려하는 건 알겠는데, 그가 외려 자신들의 사이를 의식하는 것도 거슬렸다.

그런 스스로가 우스웠다. 레사스는 그저 항상 그래 왔듯 제가 원하는 걸 이행하는 것뿐인데 말이다. 속으로 자조한 세이아드가 내키지 않는 답을 했다.

“전하께서 먼저 들어가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안 그래도 왕세자께서 빌미를 찾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대공의 동생이 걱정할 거예요. 나는 기다리는 이가 딱히 없으니, 대공이 먼저 가는 쪽이 나아요.”

덤덤히 읊어 주는 내용이 마음 어딘가를 찔렀다.

“전하의 기사단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다들 진심으로 전하를 아끼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분명 착한 이들이지만, 나를 위해 모은 기사는 아니에요. 원래는….”

뜻모를 말을 이어 가다 멈춘 레사스가 이내 단호히 나왔다.

“그러니 내 말을 들어요. 할 일이 있기도 해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여태 느껴보지 못한 미묘한 서운함이 세이아드를 건드렸다. 반박하고 싶으면서도 레사스가 하는 행동은 다 제가 원했던 것이라는 걸 알아, 결국 세이아드도 말고삐를 돌렸다.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는 공작저로 곧장 달렸다.

도착한 저택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세이아드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실드라스 가문의 기사들이 그를 마중 나왔는데,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저런 침울함이 곧 주군을 향한 원망이 되는 것도 조만간이다. 모두 세이아드가 겪어 온 일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당당히 모셔 왔던 티테르가 실은 나라의 역적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목숨바쳐 그들을 모셔 온 기사에게는 죽고 싶은 수치였다. 그들의 신의를 저버린 주군은 존중받지 못하는 이가 된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말에서 내린 세이아드가 상황을 먼저 확인했다. 기사 중 하나가 나와 보고했다.

“예배당에 계십니다. 안 그래도 막 대공을 비롯한 티테르들을 소환하신 차였습니다.”

“그대의 주군은?”

시온을 찾는 질문에 기사의 표정이 처참해졌다. 중년으로 보이는 그는 겉으로 가늠하기에도 제법 실력이 괜찮아 보였는데, 아마도 지휘권을 가진 이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어제 돌아오신 이후로 쭉, 방에 구금되어 계십니다. 왕실 기사단이 앞을 지키고 있는데, 곧 소환되실 겁니다.”

그리 말한 기사는 크게 주저하더니, 결심을 마친 듯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주군께서 그런 일을 저지르신 겁니까? 저희는 악마를 모시는 집안을 수호했던 건가요?”

세이아드는 기사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내려다보는 냉랭한 얼굴을 잠시 마주보던 기사가, 이내 견디기 어려운지 고개를 숙였다.

“남의 말에 휘둘리는 이들이 신의를 찾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기사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세이아드는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그 길로 저택에 들어섰다. 아스테르의 앞에 시온이 끌려가 멍청한 말을 하기 전, 그가 대체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자신이 먼저 파악할 작정이었다. 대낮이고 지키는 이들이 많긴 하지만 세이아드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세이아드는 대략적으로 저택을 살폈다. 창으로 잠입할 이들까지 막을 작정인지 시온의 방 바깥에도 기사가 많았다. 방법을 가늠하던 세이아드는 곧 복도를 택했다.

하늘거리는 커튼과 복도 곳곳에 세워진 장식품이 천장에 만든 그림자를 흘끗 올려본 세이아드는 힘을 적당히 쓰기로 했다. 복도 위에 숨어든 그는 기사들이 순찰하며 잠시 다른 곳을 보는 틈을 이용해 시온의 방문 앞까지 건너왔다. 문 바로 앞을 지키던 기사들의 뒤로 스며들어 방 안까지 쉽게 이동했다.

시온의 방은 조용했다. 해가 뜬 오전인데도 방 안은 내려앉은 커튼 때문에 어두웠고, 공기는 텁텁했다. 갇혀서 고여 있는 음울한 분위기가 퍽 낯익었다. 세이아드가 평생 접해 왔던 절망이 이런 모습을 했다.

시온은 침대도 아닌 방의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은 그는 항상 보아 오던 밝고, 정돈된 외관이 아니었다. 죽은 듯 침묵하는 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간 세이아드가 그 꼴을 내려다보았다.

약해빠졌군.

세이아드는 시온을 동정하진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안타깝게 보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자신에겐 아니었다. 그와는 겪어 온 일이 많았고, 바뀌기를 택한 현재의 세이아드에게도 여전히 적대적으로 굴어 온 이었으니, 그를 좋아할 일은 없을 것이다.

부모의 죄가 자식의 죄는 아니라는 걸 세이아드가 결국 인정한 것과는 달리 세상은 그런 걸 분리하지 않는다. 시온에게도 죄는 있다. 오만하고 어리석은 것도 죄라면 죄였다. 그러나 성격의 결함이 짓지 않은 일까지 뒤집어쓸 이유는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시온에게 일어난 사건은 고작 일주일간 생긴 일이다. 세이아드는 길고 긴 시간을 어머니의 꾸며 낸 죄와 함께 했었으니, 그의 입장에서 이같은 짧은 시간으로 힘들어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정말로 네가 기사들을 죽였나?”

머리 위에서 떨어진 갑작스러운 음성에 시온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놀란 눈으로 위를 올려다본 그는 세이아드를 보자마자 미간을 찡그렸다. 수치스러운 듯 뺨을 붉힌 그가 입술을 깨물며 언성을 높였다.

“대체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죠?”

“소리 낮춰. 바깥의 기사들에게 들릴 거다.”

상체를 숙이며 위협하는 세이아드를 따라 시온이 벽에 등을 붙였다. 물기 맺힌 금갈색 눈에 힘을 주며 그가 작게 속삭였다. 다행히 상황을 파악할 최소한의 눈치는 챙긴 모양이었다.

“여긴 왜 왔습니까? 잘 됐다고 비웃기라도 하려고 온 거라면 꺼져요. 그딴 말로는 나를 더 비참하게 할 수 없을 테니.”

적대적인 태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세이아드는 저리 지껄이는 시온의 배를 차고 싶다는 열망을 억누르며 물었다.

“정말로 네가 기사들을 죽였는지 확인하러 온 거다. 곧 모두 소집될 거란 이야기는 들었겠지. 왕세자 전하께서는 널 가만히 둘 생각이 아닐 거라는 건 멍청한 그 머리로도 유추할 수 있을 테고.”

“당신이 모시는 그 비열한 자의 명령 때문에 왔나 보군요? 억지로 자백이라도 받아내려는 겁니까? 헛수고예요.”

“너는 내가 왜 아스테르 전하를 모셨는지, 생각해 봤나?”

세이아드의 질문에 시온이 쏘아붙였다.

“당신의 가이드니까.”

“내 어머니의 무죄를 밝힐 수 있다고 했던 이는 그 분이 유일했기 때문이야. 네 아비인 시르칸 실드라스가 누명을 씌워 죽였던 내 어머니 말이다.”

지지 않고 대꾸하던 시온은 그 말만큼은 곧장 대꾸하지 못했다. 믿고 싶지 않다는 부정이 한차례 그의 눈을 스쳤다가, 뒤이어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뒤따랐다. 표정을 수차례 변하게 하던 시온이 시선을 피하며 속삭였다.

“아버지가… 그런 짓을 하셨을 리 없습니다.”

“증거는 모두 나왔다.”

“왕세자가 꾸민 일이에요. 내게 일어난 일도 그렇고, 다 짜고 치는 일이야. 그렇지 않고서는….”

세이아드는 결국 손을 뻗어 시온의 멱살을 쥐었다. 그가 한가하게 자기 연민에 빠질 시간을 줄 수 없었다.

“언제나 실드라스의 편을 들어주던 브레드히트가 한 증언마저도 믿지 못하겠다고? 그렇다면 세상에서 옳은 것은 오직 네 말뿐인가 보군. 그게 얼마나 오만하고 멍청한 생각인지 알고 있나? 멋대로 편한 쪽으로 해석하며 사는 삶이 어느 정도로 편한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고 싶다면 너는 혼자 사는 것이 맞다. 감옥에 처박혀 가문이 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답답함이 올라왔다. 귀를 막아 버리고 원하는 대로 보는 행위는 지긋지긋했다.

“지금 네가 느끼는 이 비참하고 형편없는 감정을 영영 안고 살고 싶으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티테르로서 그 의무를 진심으로 여기고 있다면,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 그리고 살 길을 찾아.”

시온은 분노로 타오르는 세이아드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얼굴을 마주보며 시온은 어떻게든 반박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 욕을 내뱉었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이의 절규였다.

“지금 당장 결정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나와 손을 잡든가, 아니면 네 고고한 태도를 고수하며 어머니와 동생이 죽는 걸 지켜봐라.”

“아무리 그래도 티테르를 죽일 것 같습니까? 그딴 소리를 어디서 함부로…!”

순진한 착각에 세이아드는 조소했다. 입매를 비튼 그가 회색 눈을 형형히 빛내며 스산하게 속삭였다. 사신처럼 살기어린 표정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죽지 않았더냐?”

시온이 끝내 입을 다물었다. 금갈색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니, 그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울기 시작했다. 곱고 선량하게 생긴 귀공자의 낯이 두려움으로 얼룩졌다.

“나는 그들을 죽이려 하지 않았어요. 나는, 구하려 했다고. 한가하게 나무의 핵 따위를 캘 때가 아니었어. 니르아가 몰려드니 피하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아서, 휩쓸려 죽은 기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구하려 했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시온은 세이아드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을 무서워하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갑자기 기사들이 나를 공격했어요. 죄다 한번에 정신이 나간 것처럼 달려드는 데 방법이 없었어요. 방법이, 나는, 내가 죽으면…, 그 근방의 니르아가 모두 다른 곳으로 갈 테니까….”

그때를 회상하자 괴로운 듯 시온이 떨기 시작했다. 이성을 잃은 그가 세이아드의 팔을 붙잡으며 매달렸다.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 나는,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티테르인데…! 하지만 도저히 멈추질 않아서, 아무리 소리쳐도 자꾸 나를…!”

끝내 높아진 언성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방문을 덜컥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기사들이 세이아드를 발견했다.

“대공 각하,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아데나의 목소리였다. 제게 아이처럼 매달리는 시온을 가리며 세이아드는 뒤를 돌았다. 낯을 굳힌 기사단장이 성큼성큼 그에게 걸어왔다. 기사들이 줄지어 그를 따랐다.

“지금 실드라스 공작은 죄인의 혐의로 이곳에 갇힌 상황입니다. 면회는 금지되었다는 것을 안내받지 못하셨습니까?”

세이아드는 표정의 변화 없이 대꾸했다.

“처음 듣는 소리군. 어젯밤 다른 이들보다 늦게 합류한 탓에 그런 걸 살필 겨를이 없었다.”

아데나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푸른 달의 갑옷은 대다수 지위가 괜찮은 귀족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이었고, 단장인 아데나는 달리온 후작가의 둘째였다. 왕세자의 확실한 편인 그는 세이아드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동안 친근하던 모습을 버리고 정색했다.

“그것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대공께서는 왕세자 전하의 명을 어기셨습니다. 어차피 다 같이 예배당으로 가야 하는 참이니, 그곳에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한 아데나는 세이아드를 지나쳐, 앉아 있는 시온의 팔을 낚아챘다. 뒤를 이어 온 기사가 시온의 다른 팔을 잡았다. 존중이라곤 보이지 않는 무엄한 태도는 이미 시온이 죽을 죄인이라는 것이 확실해진 모습이었다. 불안정한 시온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분노해 능력을 쓸 것처럼 눈을 번득였지만, 곧 괴로운 표정으로 손을 폈다. 일순 밝아질 듯하던 대기가 잠잠해졌다.

“잘도 티테르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군. 그게 공작을 모시는 태도인가?”

그것은 세이아드의 어머니도 겪었던 대우였다. 잠시 겹쳐진 모습에 세이아드의 감정이 요동쳤다. 아데나는 그런 그에게도 위축되지 않고 웃었다.

“곧 죽을 목숨인데 지위가 무슨 소용입니까? 지금 이자는 죄인입니다. 왕국의 법칙만큼은 지위를 막론하게 동등하지 않나요.”

그를 굳이 신경쓸 가치가 없어 무시하고 있긴 했지만, 전생의 아데나는 항상 아스테르의 곁에서 세이아드를 무시하던 자였다. 아스테르가 세이아드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늘 못마땅해하며 어머니의 죄를 운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손 한번 휘두르면 죽을 목숨이, 잘도.

세이아드는 온기가 사라진 서늘한 회색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아데나는 물러서지 않고 세이아드를 같이 마주보았다. 비웃는 낯이 서린 푸른 눈이 아스테르와 비슷해 보였다. 살벌한 대치가 이어지던 그때, 방 안으로 기사 하나가 급히 들어왔다.

“단장님, 국왕 폐하께서 행차하셨습니다!”

국왕이 왔다는 전갈에 아데나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의아한 것은 세이아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온다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국왕은 어지간해선 수도를 지키기 위해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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