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레사스는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를 지키던 세이아드 또한 깜빡 잠이 들어 버려서, 손바닥을 간질이는 속눈썹의 감촉에 정신을 차렸다.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은 진즉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게끔 단단해졌던 것 같았는데, 긴 속눈썹이 스치며 만든 간질임을 잘만 잡아냈다. 손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세이아드가 흠칫 팔을 치웠다.
레사스의 눈을 가려주던 손을 치우자 곧장 보인 것은 동그랗게 뜬 보라색 눈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잠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던 예쁜 눈이 뒤이어 세이아드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흰 뺨에 순간 홍조가 어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크게 뜨인 눈이 잠깐 멈췄다. 세이아드는 그런 레사스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이렇게 놀란 거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레사스가 어릴 적에는 이렇게 재웠던 적이 많으니 그리 낯선 상황도 아닐 것 같은데. 고민하던 세이아드는 잠시 헛간의 틈새로 눈길을 주었다. 시간이 늦긴 했다. 길게 잠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면 놀랄 수도 있겠지.
“아직 아침입니다. 그리 오래 주무시진 않았으니 지금 돌아가면 괜찮을 겁니다.”
세이아드가 속삭이자 멈춰 있던 레사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은은한 도홧빛이 돌던 뺨이 순식간에 불긋해지더니, 레사스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일어난 그가 작게 물었다.
“내가 잠결에 이렇게 굴었나요?”
아침이라 잠긴 목소리가 섬세한 외양과 달리 깊었다. 평소보다 더욱 낮은 음색은 세이아드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반년 전, 오두막에 있던 그때보다 완연한 어른의 목소리임이 느껴졌다. 괜히 귓가가 오싹했다. 레사스와 밤을 보낸 이들이 들을 음색이 이렇다 여기니,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잠결에 대공을 귀찮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밀어내도 되었을 것을, 아니, 미안해요.”
평소 능숙하게 말하던 청년답지 않게 레사스는 진심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잠시 구경하던 세이아드가 곧 현실로 돌아왔다. 이미 헛간에서 긴 시간을 보낸 터라 슬슬 그를 진정시키고 출발하는 쪽이 맞았다.
“아닙니다. 전하께서 불편해 보이시기에 제가 임의대로 군 것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레사스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동작을 멈췄다. 그의 표정은 짧은 순간 아주 다채로웠다. 무척이나 기쁜 듯이 눈썹이 둥글게 휘었다가, 서서히 기쁨이 가시며 슬픈 기색을 했다.
“그럴 리가요. 대공이 나를 불쾌하게 할 일은 없어요. 오히려 이건 감히 바라지도 않았던 다정함이라, 나는….”
말끝을 흐린 레사스는 이마 위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작은 한숨을 삼킨 그가 으레 ‘그’ 웃음을 했다. 다 괜찮다는 듯한 의례적인 웃음. 괜찮지 않을 때면 보이는 웃는 얼굴.
“대공께서 이리도 상냥히 대해 주면, 자꾸 참을 수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내게 너무 잘해 주지 말아요. 대공이 바라는 것처럼 거리를 두려면 말이에요.”
지난밤 잠들기 전 제가 했던 말이 레사스의 입에서 나왔다. 티아키의 말을 들은 이후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분명 자신이 원했던 것이기도 하니 레사스의 이런 태도는 외려 기꺼워 해야 함이 맞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렇습니까.”
“이드는 워낙 다정하니 별 의미 없었겠지만, 내가, 그냥, 대공을… 너무 좋아해서요.”
레사스는 그리 말하더니 눈을 피했다. 좋아한다는 말을 듣자 혀 끝에 무언가 얹혀진 듯, 뱉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뱉어 내야 할 말의 형태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 가슴이 홧홧했다.
“저는 다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하께 잘해 드렸던 시기보다 모질게 굴었던 시기가 더 많을 겁니다. 전하께서 기억하는 과거의 저는 지나간 기억일 뿐입니다. 지금도 그다지 전하를 잘 모시는 신하는 아니지요.”
“티테르는 신하가 아니에요. 솔리아스가 탄생할 수 있던 이유이니, 왕실을 모실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대공 또한 내게 예를 차릴 필요가 없어요.”
레사스는 입가를 매만지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단숨에 높아진 시선으로 세이아드를 내려다본 레사스가 손을 뻗으려다가, 곧 의식한 듯 팔을 뒤로 뺐다.
“그리고 대공은 언제나 다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의 상황이 결코 좋았던 적이 없는데도, 한 번도 의무를 포기한 적이 없었죠. 나를 미워할때도 내게 크게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았어요. 마땅히 증오해도 당연한 상황이었는데도요.”
전생의 자신이 레사스에게 얼마나 상처를 줬는지도 모르고, 그는 저런 말을 했다. 세이아드는 기꺼이 그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레사스의 소중한 이를 죽게끔 방관했던 죄인이었는데 말이다.
세이아드는 문득 처음으로, 레사스가 자신의 어리석었던 과거를 기억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것은 앞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여태까지는 레사스의 마음이 어떤지 의심하며 그가 지난 생을 기억하지 않길 바랐는데, 지금은 반대로 자신의 행동 때문에 지난 생을 거슬러 오지 않았으면 바랐다.
두 개는 완전히 다른 마음에서 출발했다. 지금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늦어졌네요. 어서 돌아가요, 우리. 형님께서 더 큰 일을 만드시기 전에요.”
덧붙인 레사스의 말에 세이아드는 뒤늦게 수긍했다. 레사스와 있으면 자꾸만 그를 둘러싼 어지러운 일들을 잊게 되는 바람에, 당장 우선시해야 할 것을 깜빡 잊었다. 마음을 다잡은 세이아드 또한 떠날 채비를 위해 일어섰다. 헛간을 나서기 전 서로 눈이 마주쳤다가, 절 보며 방싯 웃어 주는 레사스를 보자 괜히 속이 시끄러웠다.
아무래도 티아키의 헛소리가, 절 어떻게 만든 모양이었다.
세이아드는 농부가 미리 길어 둔 물을 빌려 간단히 세안을 마친 뒤 그에게 사례를 약조했다. 티아키의 협박이 무서웠던 것인지 그는 그저 괜찮다고 말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없는지 자꾸 물었다. 빚을 충분히 졌던 터라 세이아드는 간략히 거절하고 돌아왔으나, 채비를 끝낸 레사스를 보자 후회가 일었다. 간략한 요기거리라도 가져와야 하나 싶었던 것이다.
“시장하시진 않으신가요.”
그러고보니 받아 둔 사과가 있었다. 말을 타기 전 그를 기다리고 있는 레사스에게 걸어가며 묻자, 레사스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나는 괜찮아요.”
“하루 넘게 드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건 대공도 마찬가지인걸요.”
“당장 전투가 있는 게 아니니 저는 괜찮습니다.”
애당초 식사는 열량을 위해 하던 것이니, 지금같은 상황에선 크게 중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한창 어리 나이에 배를 주린 왕자 쪽이 더 걱정이었지.
주저하던 세이아드가 레사스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말 고삐를 쥔 채로 있던 레사스가 눈을 깜빡였다.
“어쨌든 상사를 모시는 것은 제 도리니 이 정도는 불편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사과를 좋아하셨던 것을 기억하는 터라.”
탐스럽게 익은 붉은 사과를 내민 손을 빤히 보던 레사스가 손을 조심스럽게 뻗었다. 한참 고민하다 그걸 받아든 레사스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럼 나눠먹어요.”
“가시는 길에 드시는 게 좋아 보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왕세자 전하께서 무슨 일을 꾸미실지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세이아드는 말에 올라탔다. 그를 올려다본 레사스는 짧은 침묵 후에 물었다.
“대공께서는 실드라스의 멸문을 원하는 거죠?”
레사스의 질문은 세이아드가 고뇌하는 부분을 건드렸다. 그것은 시온이 대중의 앞에서 역적으로 몰릴 때부터 그를 불편하게 했던 점이었다. 레사스의 말대로 세이아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어머니를, 동료를 희생시킨 전대 실드라스의 흔적이 사라지길 원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업신여기던 시온 또한 그 복수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빌어먹게도, 시온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그를 괴롭게 했다. 나아가 그가 단숨에 사랑받던 영웅에서 미움받는 악마로 전락한 그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시온 또한 체스판의 말일 뿐이라는 사실이 와 닿았다.
“그렇다면 이번만큼은 형님을 막지 않는 것이 답일수도 있어요. 형님께서 원하는 것은 실드라스의 죽음일 테니까요.”
그저 마음같아서는, 긴 시간 자신을 괴롭혀 온 감정을 따라 시온과 그의 일족이 절망하는 것을 두고 보고 싶기도 했다. 방관은 세이아드가 종종 선택했던 것이니, 그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는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그러나 방관은 영혼을 가장 괴롭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옳지 않은 것임을 내면에서는 알면서도 외면하는 건,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평생 영혼을 괴롭히는 짓이었다. 잊은 척 묻어 버려도 꿈에서는 반드시 그를 찾아올 것이다.
“나는 대공이 원하는 것은 들어주고 싶어요. 그러니 실드라스에 관한 일만큼은, 복수에 관한 것이라면 그대를 따르겠습니다.”
레사스는 그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담담히 그의 결정을 기다리며 올려다보는 눈을 마주치고 있으려니 속삭임이 일었다.
죄는 이어지는 것이 아니야. 복수는 오직 죄를 지은 자에게만 해야 한다. 가담하지 않은 이를 그저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삿대질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난 속삭임은 기실 아주 오래전부터 세이아드가 생각해 온 거였다. 레아나 왕후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레사스를 끊임없이 미워하기로 한, 오랜 과거부터 말이다.
“저는….”
지금 자신의 결정은 시온을 돕는 게 아니다. 그저 옳은 일을 하는 것뿐.
“왕세자 전하께서 원하는대로 굴러가고 싶지 않습니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을 보는 실수는 그만 하고 싶군요.”
아스테르가 시온을 없애기 원한다면 세이아드는 그걸 막아야 했다. 티테르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에서 사감을 따라 전력을 잃는 것은 해선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반드시 그대가 원하는 바를 이뤄 줄게요.”
세이아드의 대답을 들은 레사스가 기쁜 듯 웃었다. 곱게 접히는 눈을 보자, 감정과 어긋난 결정을 내려 껄끄럽던 마음이 편해졌다. 예쁜 웃음이 눈을 어지럽혀 살짝 고개를 돌리려는데, 레사스가 생각났다는 듯 다가왔다.
“사과는 대공께서 가져가주세요. 그대가 좋아하는 거잖아요.”
절 향해 내미는 빨간 사과를 흘끗 내려다본 세이아드는 무심한 얼굴로 그걸 살폈다. 짧은 고민을 마친 세이아드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내밀어진 손 위의 사과가 입술에 닿을 정도로 몸을 숙인 그는 이내 하얀 이를 세워 사과를 깨물었다.
아삭, 하는 소리가 울리며 베어먹은 자국이 사과에 남았다. 혀를 즐겁게 하는 과즙이 입 안으로 퍼졌고, 세이아드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아까 전의 불쾌함을 씻어주는 맛이었다.
“나눠 먹자고 하셨으니, 저는 이 정도로 만족합니다.”
입술에 묻은 과즙을 혀로 핥은 세이아드가 앞서 나온 말을 핑계삼았다. 레사스는 또다시 무엇에 그리 놀란 건지, 아까 일어났던 때처럼 굳어서 세이아드를 보고 있었다.
“불쾌하셨다면 버리셔도 됩니다.”
“아뇨. 이드, 그게 아니라….”
레사스는 혹여나 세이아드가 사과를 빼앗기라도 할 것처럼 사과를 얼른 움켜쥐었다. 뒤로 물러선 그가 말고삐를 꽉 쥐고는, 휙 고개를 틀었다. 가슴팍이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그대가 이럴 때마다, 기뻐서 죽고 싶어져요.”
기쁨과 고통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 레사스가 말 위에 올라탔다. 세이아드는 그의 얼굴을 살피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다. 한 손으로 고삐를 당긴 그가 먼저 달리기 시작했고, 세이아드가 그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평소와 달리 도통 뒤를 돌아보지 않는 레사스의 너른 등을 보면서 세이아드는 살면서 처음으로, 했던 말을 되돌리고 싶어졌다.
…생각보다 더, 자신을 피하는 레사스가 낯설었던 탓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