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동시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세이아드를 보았다. 밤바다처럼 차분한 그의 음성은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위압감이 있어서, 지금 같은 상황엔 유독 존재감이 확실했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놀랐는지 세실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이아드를 보았다. 손을 내밀던 레사스 또한 우뚝 멈춰선 채 세이아드를 살폈다. 깜빡거리는 보라색 눈동자 위로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누이와 눈을 마주치자 세이아드 또한 속으로 놀랐다. 당연히 정화가 필요한 상황이니 그걸 막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불쾌함과 함께 의문이 치밀었는데, 저답지 않게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말리는 게 맞았다. 세실리아가 아스테르와 손을 잡았다는 말에도 꺼림칙하고 역정이 났으니, 레사스라고 굳이 다를 바는 없었다. 더군다나 레사스는 닿지 않고도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 않았나.
“…전하께서는 불필요하게 접촉하지 않고도 정화가 가능하셨던 걸로 기억하여.”
해명이 필요한 듯하여 세이아드는 건조하게 설명을 붙였다. 오라비의 기색을 살피던 세실리아는 그제야 안도했는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옅게 웃었다.
“오빠, 정화니까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잖아. 나는 괜찮아.”
세실리아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모호해졌다. 레사스를 향해 불쾌함을 느낀 건 맞았지만, 그 색이 아스테르에게 느꼈던 것과는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린 누이에 대한 걱정이 먼저 앞서기 전 그 같은 감정이 들었던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세실리아의 오빠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했던 것이 까마득한 과거이니, 겨우 되찾은 가족을 무엇보다 우선해야 함이 맞는데.
“대공, 그러니까 이건…!”
세실리아가 안도한 것과는 달리 레사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예쁜 눈동자에 불안함이 넘실거리더니 이윽고 그가 세이아드에게로 다급히 몸을 틀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로 레사스가 서둘러 해명했다.
“과한 능력의 사용으로 인한 정화는 접촉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번처럼 니르아와 가깝게 섞였다면 마음을 보살펴야 합니다. 상태를 자세히 살피고 영혼을 달래는 일이라, 그래서 손을 잡았을 뿐입니다. 불순한 의도가 아니에요, 대공.”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애타는 기색으로 레사스가 설명하자, 지켜보고 있던 스텔라나 노바가 놀란 눈을 했다. 여기 있는 모두 과거에는 레사스를 거의 만날 일이 없었으니, 그들이 기억하는 레사스는 아무래도 항시 단정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실책입니다. 하면,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상황을 복잡하게 하는 듯해 세이아드는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레사스가 자신을 붙들려는 것을 못 본 척 몸을 틀고는, 세실리아에게 당부를 남겼다.
“조심히 들어가 쉬거라, 세실. 나는 할 일이 남았으니, 내일 아침에 찾아가겠다.”
“오빠도 쉬어야지.”
걱정스레 그를 붙드는 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세이아드는 노바와 스텔라에게도 눈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절 하염없이 보는 레사스와 잠시 눈을 마주친 다음, 할 말이 있는 듯한 레사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물러섰다.
한참을 뒤돌아보지 않고 걷던 세이아드는 짙게 밤 그늘이 진 나무 근처에 다다른 뒤 멈춰 섰다. 어둠 속에 자연히 녹아든 인영은 이내 그림자와 하나가 되었고, 아무도 그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게끔 기척을 지웠다.
누이에게 한 말은 거짓이 아니다. 세이아드는 저택 내부를 돌며 시온의 상황을 살필 생각이었다. 할 일이 있으니 곧장 물러나는 것이 맞는데, 이상하게 발목이 잡히는 기분에 그는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레사스는 방해받지 않은 채 세실리아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얼굴 표정까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꽤 긴 시간을 그리 보내고는 이윽고 스텔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색해하던 세실리아와 달리 스텔라는 그다지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겨울을 이미 같이 보냈겠군.
새삼스럽게 레사스가 이미 겨우내 시온과 스텔라와 함께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시온과 더한 일을 했으리라 짐작해 놨던 주제에, 방금 같은 상황에 놀란 자신이 우스웠다. 자신의 앞에서 보인 모습이 레사스의 전부가 아님을 매일같이 깨닫고 있으면서도, 무의식중에 그가 자신 외의 이와는 닿지 않으리라 여겼던 모양이다.
못 본 사이 입맞춤이 과할 정도로 능숙해졌다 싶었더니 그런 이유였나.
거기까지 생각하자 속이 서늘해졌다. 파헤치기도 싫은 새카맣게 타는 듯한 마음이 싫었다. 정화 장면을 지켜보던 세이아드는 억지로 눈을 뗀 뒤 밤의 그림자 아래로 사라졌다.
***
시온의 처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다행히 불필요한 잡념이 가셨다. 세이아드는 바깥에서 저택을 살피며 아스테르의 기사단이 어떤 식으로 배치되었는지를 파악했다. 공교롭게도 저택은 평상시와 달리 복도마다 불이 환히 켜져 있었는데, 그 탓에 세이아드가 숨어들 수 있는 그림자가 적었다. 마치 자신이 내부를 활보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하여 숨어드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확실히 기분이 묘했다. 아스테르가 악마와 연결되었다는 결론이 나왔고, 그에 대한 분노가 내내 감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힘을 쓰는 것을 보지 못한 탓인지 반쯤은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아스테르가 정말로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면, 그리고 숲의 끝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도 안다면, 그는 제가 레사스와 같이 움직였다는 사실 또한 알 터였다.
그렇다면 아스테르가 어디까지를 알고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본인의 명을 어겼다는 것은 분명히 추궁하겠지만, 세이아드가 그의 정체를 알아냈는지까지 확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짐작하는 게 어려웠다. 적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하니 더욱 그랬다.
‘최대한 아스테르의 곁에서 감시하는 시간을 늘려야 하는 건가.’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기 위해 일부러 데세르투스를 통해 일을 시켰건만, 시간이 제법 지났음에도 돌아오는 소식이 없었다. 지난번 소식을 남겨 뒀던 것에 지금쯤 내심 연락이 닿으리라 기대했는데….
아스테르의 옆에 있어야 한다는 가정에 불쾌감이 치미는 찰나였다. 세이아드는 바로 근처에서 희미한 기척을 느꼈다. 그것은 기척이라기보다는 ‘그림자’가 움직이는 모습이었는데, 오직 세이아드만이 눈치챌 법한 거였다.
“티아키?”
부름에 응하듯 검은 그림자는 세이아드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시기가 좋았다는 생각을 하며 그에게 다가가자마자, 비릿하게 풍기는 피 냄새를 맡았다. 동시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티아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 여긴… 위험해. 나를… 다른 곳으로…, 큭, 데려가 줘.”
복부를 부여잡은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하얗게 질려 죽어 가는 얼굴은 식은땀에 젖어 있었고, 당장 쓰러질 듯 눈꺼풀이 잔경련을 일으켰다. 한눈에 봐도 위중한 상태로 능력을 쓰고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일단 자리를 피한 뒤 의사를 부르지.”
곧장 그에게 다가간 세이아드는 티아키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게 한 후, 허리를 꽉 붙들어 그를 지탱했다. 가까워지자 피비린내가 더욱 짙어졌다.
“의사는, 안 돼. 의사보다는, 가이드를…, 헉, 최대한…, 여기서 멀리….”
거기까지 말한 티아키가 끝내 혼절했다. 의식을 잃은 그를 보고 입매를 굳힌 세이아드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들의 기척을 그림자 속으로 같이 숨긴 후, 세이아드는 일단 티아키의 청대로 최대한 먼 곳을 목표 삼았다.
빛이나 어둠을 속성삼은 티테르는 대대로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여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을 쓸 수 있어서, 세이아드는 얼마 가지 않아 실드라스 공작저에서 상당히 떨어진 민가를 찾았다. 타칸과 실드라스 공작저의 중간 거리쯤으로, 드문드문 떨어진 농가들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그는 가장 기척이 적은 민가로 숨어들었다. 비어 있는 헛간을 발견해 그곳에 티아키를 눕힌 뒤, 지혈할 옷가지와 씻을 물을 얻을 겸 작은 벽돌집의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은 한 명이었다.
“누구신가요? 요한 아저씨?”
늦은 시간의 방문객이 잠을 방해했는지 되묻는 청년의 목소리에 졸음기가 가득했다. 촛불을 켰는지 은은한 빛이 문 아래로 새어 나오더니 문이 열렸다.
“헉…!”
어둠 속에 서 있는 세이아드를 보자마자 청년이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흠칫거리며 고개를 든 그는 한밤중에 찾아온 커다란 남성이 두려운 듯 보였다.
“기, 기사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실까요?”
세이아드의 차림새를 기사로 짐작했는지 청년은 두서없이 물었다. 북부의 영지민이 아닌 이상 자신을 알아보는 일은 어려울 터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이름 모를 기사인 척 구는 쪽이 제게도 좋았다.
“공작 각하의 명을 받고 움직이던 돌아가는 길에 누울 곳이 필요하여 들렀습니다. 괜찮다면 헛간을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음이었지만 반쯤은 강제에 가까운 부탁을 청년은 잘 알아들었다. 눈치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기특한 질문을 했다.
“그, 그럼요. 편히 쓰십시오. 제가 해드릴 것은 없을까요?”
“길어 둔 물이 있으면 좀 빌리고 싶습니다. 쓰지 않는 헝겊이 있다면 그것도.”
“네, 잠시만요.”
귀찮은 요구였지만 두려움이 컸는지 청년은 서둘러 그가 원하는 것을 내주었다. 고개를 까닥여 인사한 세이아드는 혹 그의 뒤를 청년이 따라오지 않는지 감시하며 헛간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그럴 깜냥은 없는지 주변을 흘끗거리는 기척은 없었다.
티아키는 벽에 기댄 채 세이아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정신이 든 것인지 그는 세이아드를 보며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멀리… 온 건가?”
“그래. 누가 네게 이런 짓을 한 거지?”
세이아드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티아키의 앞에 다가가 무릎 꿇어 앉은 뒤, 그는 상처를 살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비틀거리는 머리를 지탱하기 힘든지 티아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닿는 부위가 온통 뜨거운 것이 상태가 최악이었다. 이대로 밤새 두면 죽을 것이다.
“대공의 요청에 따라, 왕세자… 전하를 감시하다가….”
티아키는 꺼져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먼저 가 있던 녀석이 돌아오질 않아서, 헉, 내가, 직접… 갔어. 거기서, 이상한 걸 봤는데…, 뱀이, 검은 뱀이, 갑자기….”
어떻게든 중요한 말을 꺼낸 티아키는 거기까지 말한 후 다시 실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