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93화 (91/147)

#93

이틀간 있던 일이 여러모로 세실리아의 머릿속을 흔들어 놓았는지, 그녀는 바로 며칠 전처럼 시온의 불행을 맹목적으로 반기진 않는 기색이었다.

복잡한 심정이 드러나는 표정을 살핀 세이아드는 내심 안도했다. 아스테르와 보낸 시간이 길지 않은 덕에 세실리아는 중요한 것을 아직 볼 수 있는 상태인 듯했다.

“브레드히트 공작께서 증언을 위해 대동하신 상태고, 우리는 막 오빠와 전하를 찾기 위해 조를 나누려던 차였어. 전하께서 사라졌다는 말에 다들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오빠가 전하를 찾은 거야?”

대략적인 보고를 마친 세실리아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옆으로 다가온 스텔라와 노바 역시 설명이 필요한 듯한 얼굴이었다. 세이아드는 주위를 살폈다. 몰려온 기사들이 하나같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목격자와 소문을 퍼트릴 이가 많을수록 레사스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니,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흘려야 했다.

다만, 어떻게 그것을 포장할지가 모호했다. 세이아드는 스스로를 변호하는 행위나 남들을 휘두르는 것에 익숙지 않았다. 더군다나 레사스의 능력을 저 자신조차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말을 꺼내기 어렵게 했다.

그때, 고민하던 세이아드의 옆으로 레사스가 걸어왔다. 세실리아와 눈을 마주친 레사스가 입을 열었다. 말하는 대상은 티테르였으나 이 자리의 모든 이가 레사스를 보고 있었다.

“숲으로 들어간 것은 태양께서 내게 말을 걸어, 대공을 보호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직한 설명은 또렷하게 모두에게 울렸다. 차분하지만 명확한 음성에 사람들의 이목이 곧장 레사스에게 쏠렸다. 그는 사람들의 앞에 설 때면 언제나 매달고 있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흰 뺨 위에 물든 황금빛 노을이 레사스를 숭고하게 빛냈다. 세실리아마저 거리낌을 잊고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나의 힘은 찾아온 시기가 늦은 대신, 시조이신 라만 1세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각성한 이후로 나는 종종 그분의 계시를 듣곤 했지요. 태양께서 말하시길, 북부의 대공께서는 솔리아스의 평온을 위해 반드시 우리 옆에 계셔야 한다더군요.”

세이아드는 흠칫 레사스를 보았다. 레사스의 말은 따지자면 자신이 들은 것과 같지만, 이렇듯 남들의 앞에서 제 입지를 세우는 말을 하리라곤 여기지 못했다. 힐끗 살핀 옆모습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단호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대공께서 언제나, 스스로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고 숲을 지키는 걸 보아 왔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과 달리 대공께서는 항상 악마로부터 우리를 보살펴 주셨으니, 솔리아스의 피를 이은 자로서 그분을 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가이드는 티테르의 영혼을 지키는 존재니, 그분들의 옆에서 싸우는 게 나의 도리겠지요. 숲에 들어간 것은 그래서였습니다.”

타인의 앞에서 악의적이지 않은 말로 자신을 추켜세우는 행위가 지나치게 낯설어, 세이아드는 입술을 닫았다. 손이 살짝 떨려왔다. 레사스가 하는 말을 괜히 반박하고 싶다가도 묘하게 가슴이 울렁여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는….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저런 말을 들을 가치도 없는 죄인인 것을.

지금의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눈에 비록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이전 생에서 많은 목숨을 방관하고 죽여 온 죄인이다.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일을 만회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뿐. 비록 자신의 행적에 아스테르의 부당한 짓이 개입되었더라 하더라도, 그걸 따르고 선택한 건 세이아드였다. 제 모든 행동을 악마의 탓으로 돌리고 싶진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다. 남을 속이고 헛된 허물로 겉을 감싸는 것이 꼭 기만 같아서, 세이아드의 손이 차가워졌다. 복수를 하고 폭주를 막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이렇듯 대해지는 건 그려 본 적 없었다.

“이드, 괜찮아요.”

동요로 인해 서늘하게 식어 가던 그를 안정시킨 것은 레사스였다. 여전히 앞을 본 채, 다만 세이아드에게만 들리게끔 레사스가 작게 속삭였다.

“프로시어스 가문의 영예를 되찾기 위해서는 다름 아닌 대공께서 사랑받아야 합니다. 이건 대공이 당연히 누려야 했던 사랑이에요.”

마주 붙어있는 팔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작은 온기가 스치자 마음이 일순 진정되었다. 서로의 손등이 마주 비벼질 듯 가까워졌다. 당장이라도 손을 잡고 싶은 듯 움찔거리던 레사스의 손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다시 티테르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나 혼자 안전할 수는 없어요. 기사들과 티테르가 목숨 걸고 싸우는 상황에서 그저 숲 밖에 머물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앞으로도 나는 숲에 같이 들어가, 악마의 흔적이 사라지기 전까지 같이 나서겠습니다.”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피가 직접 기사들과 싸우겠다는 말에, 주변의 기사들이 상기된 얼굴로 그를 일제히 보았다. 사기를 돋우는 말에 기사들의 마음이 레사스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혼자 싸우지 않고, 같이 한다는 기분이 어떤지 세이아드 또한 이제는 알았다. 레사스가 언제나 다른 티테르들과 함께하는 걸 볼 때면 들던 동떨어진 감각이 지금은 들지 않았다. 이 안에 함께 있다는 느낌이었다.

티테르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세실리아마저도 일순 레사스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트리고, 묘한 표정으로 그를 주시한 채였다. 그때 레사스의 말을 경청하던 스텔라가 중요한 걸 물었다.

“가이드가 같이 싸울 수 없던 것은 니르아로부터 가이드를 지키려는 티테르들이 오히려 더 위험에 처할 수 있어서예요. 전하의 마음은 감사하나, 그게 과연 맞는 일인지….”

레사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싱긋 휜 눈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니르아는 나를 죽일 수 없습니다. 시조께서 내게 주신 힘이지요. 그들은 나의 영혼을 탐할 수 없어요.”

“아…!”

스텔라의 눈이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뜨였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바인이 일부러 나섰다.

“저희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전하의 곁에 있으니 니르아가 우리에게 달려들지 않았어요. 전하의 곁에서라면 니르아를 죽이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리그다 또한 모두가 듣게끔 크게 소리쳤다.

“전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겁니다!”

언제나 왕국을 감싸고 있던 어둠으로부터 막연히 벗어나지 못하리라 믿었던 이들은, 역사상 처음 있는 숲의 정화와 더불어 눈앞에 일어나는 일로부터 희망을 보았다. 상기되어있던 얼굴이 곧 기쁨 어린 환희로 바뀌더니, 수많은 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무한한 믿음에 세이아드는 아까보다 더한 울렁임을 느꼈다. 자격 없는 이의 거짓말 같아 소리 내어 아니라고 하고 싶었음에도, 레사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참을 법했다. 가문을 위해서, 그리고 세실을 위해서는…, 제게 과분한 호의라도 일단은 받아넘겨야 하는 게 맞았다.

남부 실드라스 영지의 분위기는 묘한 상황이었다. 영지민들과 기사들 모두, 동시에 닥친 불운과 행운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희소식이라 하면, 남부의 숲인 ‘대낮의 악몽’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화되어, 더는 위험한 곳이 아니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은 기실 희소식이라 치기엔 아주 큰 일인지라, 소문은 빠르게 영지를 벗어나 왕국으로 퍼지고 있었다. 역대 어떤 가이드나 티테르도 거대한 숲을 정화했던 적은 없었다.

선대의 조상들이 꾸준히 숲의 규모를 줄여 왔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은 선망할 영웅의 탄생이었다. 숲의 끝까지 갔던 것이 북부 대공과 둘째 왕자라는 사실은 빠르게 그 몸집을 부풀려, 이윽고 둘의 힘에 대한 별별 과장이 더해졌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반대 급부로 실드라스 가문의 일은 반동이 거셌다. 남부의 사랑받던 영주인 시르칸 실드라스가 악마를 불러냈다는 소문은 쉽게 입에 담을 수 없어 밑으로 깔렸지만, 오히려 음침하고 비난하는 내용이니만큼 남들의 흥미를 더욱 끌었다.

실드라스 공작가를 옹호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시온 실드라스가 이 일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무섭게 몸집을 부풀렸고, 알음알음 기사들을 통해 퍼진 시온의 처분도 저녁이 되자 술집의 안안줏거리가 되었다.

하여, 영지의 분위기가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영지를 책임지는 영주의 안위는 그 안을 사는 이들에겐 삶의 문제였으니, 이같이 좋은 날에 그저 축하만 할 수 없다는 원망이 금세 시온 실드라스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 같은 분위기는 세이아드도 느낄 수 있었다. 공작가로 돌아가는 동안 그는 어느새 숲 근처를 구경하기 위해 몰린 영지민들을 스쳤는데, 온갖 속삭임과 환호가 세이아드의 귓가에 빠짐없이 들렸다. 감각이 유독 예민한 편인 그는 원래도 이런 점 때문에 군중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속닥거리는 온갖 말들은 시온을 향한 모독도 섞여 있었고, 진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그저 ‘처벌’하길 원하는 악의적인 마음만이 가득했다. 세이아드는 사람들의 이 같은 면에 항상 염증을 느꼈다. 군중은 진실보다는 항상 자극적이고, 욕하기 좋은 상대를 찾을 뿐이다.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은 결국 눈이 멀기를 택하는 길이었다.

‘피곤하군.’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 하는 일임을 알아 피하진 않지만, 세이아드는 니르아와 싸울 때보다도 지금이 더 치지는 걸 느꼈다. 다행히 레사스의 정화 덕에 몸 자체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평생 달고 살던 두통이 제법 옅어져 있어서, 이제는 두통이 없는 감각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대들 덕에 무고한 희생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상황이 복잡하지만, 일단은 오늘 밤은 편히 쉬어요.”

공작가로 돌아온 레사스는 기사들을 해산한 후 티테르들에게도 그리 명했다. 시온의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해야 하는 터라, 세이아드는 레사스와 단둘이 남게 될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세실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희, 정화를 못 받았어요. 저는 그렇다 치지만 스텔라 언니와 노바는 전하의 정화가 필요합니다.”

오는 내내 무언가를 한참 고민하는 듯했더니, 저것도 고민의 일부인 모양이었다. 세실리아가 먼저 레사스에게 정화를 청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던지라 세이아드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누이가 자신의 말을 정말로 귀담아듣는 듯하여 기쁨이 일었다.

“아.”

레사스는 정말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무척이나 미안한 기색을 띠고 세실리아를 보았다. 노바나 스텔라를 보던 때와는 달리 기쁨이 드러나는 모습으로 그가 세실리아에게 다가왔다.

“미안해요, 세실리아. 당연히 배려해야 하는 문제였는데, 나의 실책입니다. 기꺼이 그대들을 위해 평안을 불러올게요.”

기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레사스는 고운 얼굴을 활짝 폈다. 그러고는 세실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세실리아의 결심을 기특해하며 그 광경을 보던 세이아드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날카로운 회색 눈이 서늘하게 변하며, 그는 미칠 듯이 거슬리는 감각을 느꼈다. 순간 속에서 불이 일며 굉장한 거부감이 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사스는 그가 보아 온 동안은 한 번도, 남을 만져서 정화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뭘 하시려는 겁니까.”

주저하던 세실리아가 레사스에게 손을 내밀려던 차, 세이아드는 자신이 나서는 줄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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