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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92화 (90/147)

#92

기실 세이아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 같은 걸 고려하지 못했다. 죽기 전 그가 인지할 수 있던 것은 뼈와 살을 가르고 심장을 찌른 감촉뿐이었다. 세이아드를 내려다보던 표정 없던 흰 얼굴과 핏줄이 돋아난 창백한 레사스의 손이 원체 깊게 각막에 새겨져, 막상 자신을 죽였던 검이 왕국의 보물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 시릴 정도로 흰빛을 발하던 검신은 분명 ‘거룩한 죽음’이 맞았다. 아스테르의 옆에서 숱하게 보아 왔으니 확실했다.

뒤늦은 깨달음에 뒷덜미로 소름이 돋았다. 돌아온 뒤로도 그는 의식이 있던 순간마다 아스테르가 그 검을 쥔 것을 목격했다. 자신을 죽였던 도구가 그리 가까이 있었음에도 눈치채지 못했던 상황 자체가 그저 기이했다. 설명할 수 없는 꺼림칙한 기분에 세이아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다만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어째서 그 검을 레사스가 지니고 있던 거지? 아스테르는 항상 그 검을 떼어놓지 않는데.’

왕세자가 세이아드의 처우를 그에게 맡겼다고 했지만, 그렇다 하여 검까지 건넬 필요는 없었다. ‘거룩한 죽음’은 의식을 위한 보물이지 처형에 쓰이는 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폭주 중에 일어난 일은 세이아드의 의식 밖에 있기에 그가 알고 있는 것이 현저히 적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이아드가 아는 아스테르의 성향으로는, 그리 쉽게 레사스에게 자신의 처우를 맡기지 않았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그사이에 일어난 일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레사스는 세이아드를 기다리며 침묵을 지켰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와 바닥을 짚은 세이아드의 손끝을 매만졌다. 꼭 안심시키는 듯한 동작이었다. 손톱 위로 닿는 감촉이 다정하게 퍼지기 전, 세이아드는 무의식중에 피어오른 서늘함에 손을 빼 버렸다.

“검을 물리적으로 얻고자 하시는 거라면 그분의 거처에서 제가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다. 레사스와 닿는 것은 여태껏 싫었던 적이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껄끄러웠던 시간들도 닿는 순간 이는 감각은 항상 황홀했다. 지금도 그건 비슷했다. 하지만 방금은, 정화를 위한 동작이 아니었다. 어지러울 정도로 서로 얽혔으니 이제는 구분할 수 있었다. 레사스는 그냥 그 자체로 닿으려 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렁임이 가슴에서 일었다. 레사스에 대한 마음은 외려 전에 비해 누그러진 편인데, 갑작스레 이런 느낌이 드는지 모를 일이다.

“…검은 지금 형님의 곁에 없습니다. 그건 이제 세 개의 숲 어딘가, 깊은 곳에 숨겨져 있을 거예요.”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손이 있던 빈자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슬프게 내리깐 눈길이 잠시 그곳에 머물다 세이아드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형님께서 검을 돌려주어야만 하게끔 이제부터 몰아붙일 예정입니다. 그러면서도 검의 소재를 파악해야겠지요. 대공께서 도와주신다면 수월해질 겁니다.”

“제가 내건 조건이니 도와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이아드는 이쯤 해서 대화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분노 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에게는, 하나로 명백히 규정짓기 어려운 마음이 너무나 피곤하게 여겨졌다. 차라리 죽을 만큼 싸우는 것이 쉬웠다. 그러면 생각할 게 없어지니까. 자신을 지우고 죽음 근처를 맴도는 편이 세이아드에게는 오히려 기꺼웠다.

이 같은 걸 생각해 보면, 세이아드 자신이 죽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 돌이켜 봐도 그는 죽는 걸 두려워한 적 없었다.

죽음은 미련이다. 삶에서 놓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는 이들만이 치열하게 죽음과 싸울 힘을 얻는다. 잃기 싫은 것이 자신의 목숨이든, 영광이든, 혹은 소중한 존재든.

가족이 그를 모두 떠난 후 세이아드는 아무것도 잃을 게 없었다. 그저 증명해 내야 할 의무만이 있었을 뿐. 그것은 세이아드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지만 이제 보면 언제나 놓아도 무관한 짐이었다.

그러니 레사스가 자신을 죽인 것에 대해 오늘처럼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정화를 꾸준히 받아야 하는데 이 같은 상태면 효율이 떨어질 것이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시간을 가지면 금방 잊을 거다.

“더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는 것 같군요. 이만 떠날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목표가 정해졌으니 이제 움직일 차례였다. 시간을 낭비한 느낌에 조급함이 일었다. 그러자 레사스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는 하늘을 등진 그는 손을 뻗어 세이아드에게 권했다.

“대공이 씻는 동안 내가 경계를 서겠습니다.”

“제가 불경한 짓을 하게끔 하시려는 건가요. 저는 괜찮습니다.”

내밀어진 흰 손이 창백했다. 깊게 숨을 들이켠 그는 잠시 제 손을 움찔거렸으나,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레사스의 도움 없이 일어났다. 앞서 서로의 몸이 하나처럼 얽히던 시간이 무색하게끔 끊어진 느낌이었다.

“당장은 정화가 필요하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그리 거절하고는 일부러 레사스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아름다운 외양을 따라 마음마저 섬세한 왕자가, 자신의 행동에 따라 얼마나 슬픔과 기쁨을 넘나드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걸 더 잘 알기에, 세이아드는 더더욱 지난 삶의 레사스를 이해할 수 없어졌다.

***

바인과 리그다는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가 동이 트자마자 용케 눈을 떴다. 지켜야 할 주군을 두고 잠들었다는 사실에 둘 다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돌아가면 벌을 받겠다는 그들의 말에 세이아드는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바인은 먼저 잠든 죄로 상의를 레사스에게 바쳤다. 헤진 상의를 세이아드 자신이 찢은 탓에 그걸 입고 돌아갈 수는 없었던 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왕족의 몸이다. 분홍기가 곳곳에 맴도는 흰 살갗을 남들 눈에 보일 수는 없다. 아스테르에게는 이러한 행색 자체도 트집 잡을 거리가 될 것이기에, 세이아드는 앞으로 레사스가 책잡힐 틈이 생기지 않길 원했다.

바인은 넙죽 옷을 바쳤고, 자신의 몸이 퍽 자랑스러운지 리그다에게 자랑까지 했다. 지켜보던 리그다가 그를 비웃으며 등을 때렸다. 그래봤자 전하보다는 어깨가 좁다며 놀리는 리그다 때문에 바인이 얼굴을 붉혔다. 그 친밀한 광경을 보던 세이아드는 그들을 혼내는 대신, 숲 밖에 나가기 전의 주의사항을 알렸다.

“너희는 어제 본 일들을 누구에게도 발설해선 안 된다. 앞으로도 전하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말고 주변을 지키고.”

“네, 알겠습니다.”

바인이 착실히 답했고, 리그다는 되물어왔다.

“그러면 저희가 숲에 있었던 것도 비밀로 해야 할까요?”

“아니. 자리를 비운 것을 왕세자께서 반드시 눈치챘을 테니 오히려 이걸 기회로 삼는 게 맞다.”

세이아드는 동의를 구하듯 레사스를 보았다. 레사스의 능력은 세이아드에게는 많은 의문을 불러왔지만, 밖으로 드러난다면 그의 입지를 다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아스테르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아직 짐작이 가지 않지만….

“대공께서 원하는 대로 하세요.”

레사스는 항상 그래 왔듯 세이아드의 의사를 따랐다. 자신과 얽힌 일이라면 본인의 의사라곤 없는 듯 구는 모양이 문득 답답했지만, 지적할 수는 없었다. 레사스의 저런 태도가 세이아드의 일을 방해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그대로 일행은 빠르게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체력 좋은 넷은 쉬지 않고 나무들 틈을 헤쳐 나갔다. 워낙에 큰 숲이었던지라 나가는 데에도 반나절이 꼬박 걸렸다. 이른 새벽 아침에 출발해 그들은 노을이 질 때쯤 숲의 경계에 다다랐다. 오는 내내 보인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살폈지만, 죽은 티테르를 찾지는 못했다.

경계 근처로 오자 세이아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다. 멀리서 일렁이는 횃불들이 보였다. 수백 명의 기사들 속에서 티테르들의 기운 또한 일렁이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세이아드는 사람들을 이끌고 오는 세실리아를 발견했다.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아무리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힘을 지녔다 한들, 세실리아는 티테르였다. 하급 니르아에겐 죽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이 헛되지 않았다. 피로해 보이고 행색이 곱진 않았지만, 그녀는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오빠!”

그리고 세실리아 또한 어렵지 않게 그를 발견했다. 그녀는 루나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왔고, 그 뒤를 따라 노바와 스텔라, 그리고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전하께서 저기 계신다! 전하!”

기사들은 레사스의 소속이거나 실드라스의 표식을 하고 있었다. 아스테르의 직속 기사단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온 역시 그 자리에 없었다.

동생과 조우한 반가움과 별개로 거림칙한 기분에 세이아드가 흠칫하는 사이, 뛰어온 세실리아가 루나에게서 내려 한달음에 달려왔다. 오라비의 품에 안긴 누이가 얼굴을 파묻었다.

“오빠니까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믿었어.”

다급히 뛰어온 세실리아를 따라잡은 노바와 스텔라도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무언가 벅찬 듯한 모습을 했다.

“세이아드, 네가 전하와 숲을 정화한 거지?”

스텔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세이아드가 답하기도 전에 바인이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답했다.

“네, 전하와 대공 각하께서 숲의 끝에 있는 핵을 없애셨습니다!”

“니르아가 사라진 이유가 정말 그래서군요…!”

노바가 믿기지 않는 듯 외쳤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기사들이 순식간에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웅성거림이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와! 악시드 대공께서 남쪽 숲을 정화하셨다!”

세이아드가 평생 들어오던 함성은 그를 향한 적대의 소리였지, 이런 식의 환대가 포함되어있진 않았다. 당혹스러움이 먼저 밀려들었다. 자리를 피하고 싶은 이질감을 억누른 그는, 당장 일어났던 일부터 파악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의 피해였다.

“세실, 무슨 일이 있는지 말해보거라. 다들 흩어져 있던 건가?”

“아니, 오빠와 실드라스 공작만이 흩어졌어. 나는 티테르들과 함께 니르아가 숲 밖으로 나가지 않게끔 막았고. 끝이 없는 싸움에 잠시 아득해질 때쯤, 니르아가 갑자기 증발하듯 사라졌더라. 겨우 숲을 빠져나와 확인한 결과 숲 밖은 안전했대. 기사들을 보내서도 재차 확인한 결과야.”

세실리아는 겁먹어 떨던 사흘 전과 달리 제법 의연했다. 궁금한 점을 잘 설명하는 그녀의 말을 듣던 그는, 앞서 느낀 의문을 표했다.

“그렇다면 실드라스 공작은 어디 있지?”

세이아드와 엇비슷한 힘을 지닌 남부의 공작이 이런 일로 죽을 리는 없다. 지칠 수는 있지만 말이다. 기사들이 저리 있는데 그가 여기 없는 것은 이상했다. 세이아드의 질문에 내내 밝았던 노바와 스텔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실리아 또한 탐탁지 않은 듯 미간을 찡그리더니,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공작은…, 귀환하자마자 아스테르 전하와 함께 공작가에 있어. 숲에서 전하의 기사들을 죽여 증거를 없애려 했다는 죄로 구금된 상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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