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어른이 되었다고 하시더니 아직도 아이처럼 구시는군요.”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모르는 사람인 것같이 굴다가도 마음이 연결되는 자리가 오면 어린 티가 났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던 남쪽 궁에 고립되어 있던 비쩍 마른 허름한 소년이 레사스의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떤 것도 욕심내서는 안 된다는 상황이 익숙한 소년은, 하염없이 사랑을 원하면서도 막상 그걸 가질 거라곤 여기질 않았다. 지금같이.
“전하께서 부족한 게 대체 뭐라고 그렇게 말하시는 겁니까.”
레사스는 예나 지금이나 그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비단 외양만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걸 제하고서라도 레사스에게는 마땅한 결점이 없었다.
“전하께서는 제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도 노력하는 분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실 땐 주저함이 없이 용기를 내고, 중요한 걸 위해 사사로운 것을 멀리하십니다. 남을 짓밟지 않으면서 나아갈 수 있는 사람만큼 강한 이는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세이아드는 자신이 그와는 특히 어울리지 않다고 여겼다. 태양 옆에 있으면 어둠이 짙어 보이는 것처럼 레사스의 그 같은 성정이 세이아드와 반대되었기 때문이다. 세이아드는 복수를 위해 다른 모든 걸 저버렸지만, 레사스는 그에게 가해지는 공격과 비난에도 똑같이 굴지 않았다. 대신 본질을 보려고 했다.
“지위나 외양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영혼입니다.”
물론 레사스는 왕국에 있는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모난 데 없는 외양을 지닌 데다가, 부족한 것이 없었다. 검술에 능했고 배우는 게 빨랐으니 아마 원한다면 못하는 게 없을 거다. 더군다나 반드시 왕세자의 자리에 올라야만 할 사람이니, 왕국을 통틀어 가히 최고라 불릴 수 있었다.
그러니 레사스가 원한다면 누구든 그를 사랑할 것이다.
당연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레사스가 막상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있을거라는 가정을 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과 그가 연인이라는 형태로 이어질 수 없다고 단정한 건 세이아드 본인이면서 말이다.
“기억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세이아드가 시선을 올렸다. 레사스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삼킬지 모르는 것처럼 그는 애달픈 눈을 했다.
“모두가 끔찍하게 여기던 내 머리칼과 눈을 보고 이드가 했던 말을요.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별들이 마음껏 잠드는 밤하늘 같은 검은색이라고 했고, 눈을 녹여 주는 얼음새꽃처럼 다정한 보라색이라고 했죠. 세상에 하나뿐인 색이니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레사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세이아드도 기억하고 있었다. 저렇듯 아름다운 어투는 아니겠지만, 머리를 염색하려다 실패해 숨어서 울던 레사스에게 저런 말을 했었다.
“모두가 미워하던 나를 그대로 사랑해 준 사람은 이드밖에 없었어요. 보잘것없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달을 찾아갈 거라고 했었죠.”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이야기가 하나씩 되살아났다. 숨죽여 레사스의 말을 듣던 세이아드는 일순 방금 마지막 말이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건 분명 세이아드가 들려주고자 했던 말이지만, 레사스에게 전해 준 적 없는 책에 담긴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되살아난 이후에도 직접 서재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책을 만들기 전 그런 말을 흘렸나?
그랬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세이아드는 레사스로부터 종종 느끼던 위화감을 지금 다시 느꼈다.
무언가 잡힐 듯 앞에서 일렁였다. 그는 휘몰아친 일들 때문에 미뤄 두던 의문을 레사스의 앞에 꺼낼 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레사스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고, 아무도 모르는 것들을 홀로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위화감은 지난겨울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힘을 다룰 줄도 모르던 미숙한 각성자가 고작 반년 사이에 지나치게 강해진 것부터 죄다 이상했다.
“저는 전하께 달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세이아드는 숲에서 조우한 어제처럼 그를 몰아붙이는 대신, 조용히 그의 허점을 짚었다. 먼 곳을 보는 사람처럼 그리운 얼굴을 하던 레사스가 입을 다물었다.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긴 속눈썹이 파득 떨렸다. 분명 당혹의 증거였다.
“어제의 전투만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하루가 꼬박 걸릴 일이라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그리 행동하시는 걸 보고 있자면….”
세이아드 자신도 기실 레사스에게 정확히 뭘 추궁할지 모르는 상태라, 질문을 명확히 그리는 게 어려웠다. 주저하던 끝에 그는 겨우 질문을 하나로 모았다.
“꼭 미래를 아는 분 같이 구시는군요.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을 아는 분 같습니다. 지금보다 앞선 시간을 살아 본 이처럼 말입니다.”
레사스의 행동은 하나로 콕 짚어 말하기 어려웠다. 지난 생에 비해 확연히 다르게 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자신처럼 과거로 돌아온 이라고 느껴졌지만, 그리 묻지 않은 것은 막 돌아왔을 시기의 레사스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습이어서 그랬다.
만약 시간이 정말로 거꾸로 흘러 세이아드를 과거로 데려온 거라면, 시간이 바뀐 시점만큼은 동일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 것은, 눈앞의 그가 자신을 죽였던 이라고는 여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같은 사람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았다. 지난 생의 레사스는 분명 자신을 끔찍이 여기고 망설임 없이 죽여 버린 사람이었어서, 이토록 절절하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너무 많은 게 복잡해졌다.
혹여나 정말로 눈앞의 레사스가 시간을 되돌아온 레사스라면…, 그는 자신을 사랑했으면서도 죽인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런 척 연기하고 있는 거였다.
섬찟한 가정에 세이아드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뭐가 되었든 그 자체로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질 듯한 전제라, 세이아드는 그것만큼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둘 중 하나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기실 레사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명이 되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이라면 사랑이 아닐 것이고, 사랑하지 않기에 이렇게 구는 거라면 그것 대로 사랑이 아닐 것이다.
극렬하게 밀려드는 거부감에 세이아드가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거부감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레사스와 연인이 되지도 않을 거면서 왜 이런걸 신경쓰는 거지?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들 그게 뭐라고? 이 정도의 사이만을 유지하고 서로의 목적을 이루면 그만인데.
그러나 이성과 마음은 따로 놀았다. 차가운 머릿속과 달리 대답을 기다리는 찰나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졌다. 레사스는 하얀 얼굴 위로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다가,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불현듯 스친 시선 너머 핏줄이 푸르게 선 손등이 보였다. 유독 창백한 색이었다.
“맞아요. 나의 옆에는 언제나 태양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레사스는 긴 고민 후에 입을 열었다. 설화 같은 묘사라 한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태양이라고 하셨습니까? 신을 말하시는 겁니까?”
“나는 대공께서 직접 알아낸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어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통해 알게 된 거니, 그걸 발설하는 것은 금기입니다. 말은 그 자체로 힘이 되고 인과를 만들기 때문이에요. 나의 한마디가 많은 걸 바꿀 수 있으니 당장 말할 수 있는 건….”
세이아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이 터무니없어서가 아니라, 레사스가 이 같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 낯설어서였다. 뭔갈 분명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신과 비슷한 무언가가 그의 옆에 있다니.
“금기를 어기면 어떤 일이 생기는 건가요. 전하의 안위와 연관되어 있는 겁니까?”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납득할텐데, 레사스는 그마저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하면, 말씀해 주실 수 있는 게 대체 무엇인가요. 이렇듯 두루뭉술하게 말하시는 전하를 제가 어떻게 일방적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앞서 그러셨듯 아름다운 말로 넘어가려 하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 제가 원하는 건 적어도 하나의 확실한 사실입니다.”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밀려드는 감정은 묘한 서운함과도 닮아 있었다. 그것은 레사스에 대해 자신이 다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던 지난날과는 달랐다. 그때는 그저 낯선 면모에 대한 어색함이었다면, 지금은 그가 자신을 그리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다 터놓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숨기는 게 많은 이를 어떻게 마음 놓고 믿는단 말인가.
“애당초 그 같은 능력은 언제부터 있으셨던 겁니까? 절 만난 순간부터 속여 오셨습니까? 이렇게 많은 걸 알고 계셨다면, 왕세자가 저에게 하는 짓을 알면서도 언질을 주지 않으신 겁니까?”
“아니에요, 이드!”
앞서 생각만 하던 원망이 결국 모습을 비췄다. 아까 전만 하여도 한없이 연결되는 듯했던 서로의 영혼이 멀어지는 듯한 느낌에 온몸이 시려 왔다. 그러자 레사스가 절박하게 그를 붙들었다. 겁먹은 보랏빛 눈동자에 날선 마음이 잠시 멈칫했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완전한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진 숨기려 했던 거예요. 하지만 이드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알고도 내버려 둔 게 아니에요. 나의 힘은, 항상 너무 늦게 나를 찾아오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내뱉고 싶어 미칠 듯한 목소리가 억지로 이성을 찾았다. 이를 악문 레사스가 괴로운 듯 눈을 꾹 감았다.
“건국 설화에 나오는 악마가 지금 우리의 옆에 있는 것처럼, 태양과 달 또한 바로 우리의 옆에 있습니다. 악마가 원하는 것은 숭고한 달을 타락시켜 영원한 밤에 가두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태양을 죽여야 했고, 달을 외롭게 만들어야 했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뿐입니다. 이미 너무 많은 걸 말했어요.”
레사스는 여태껏 그에게 보여 준 적 없는 단호한 목소리를 했다. 그에게 언제나 다정하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게끔 말이다.
“그 이상 말하면, 마치 죽기라도 하시는 것처럼 구시는군요.”
그 태도가 과거의 서늘한 레사스를 떠오르게 해 세이아드의 마음에도 여유가 사라졌다. 날카로운 칼날을 세운 말에 레사스는 다시금 그가 아는 얼굴로 돌아왔다.
“아뇨, 그것보다 소중한 걸 잃게 될 거예요.”
“그렇다 하시니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대체 뭐가 있다고. 보통의 사람에게는 가장 귀한 것이 목숨이니, 레사스에게 걸린 금제가 그와 같은 것이라면 차라리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귀한 것이 있다고? 와닿지 않는 변명이었다.
세이아드는 냉소를 더하며 잠시 과거의 자신처럼 굴었다. 레사스는 불안한 얼굴로 다가와 세이아드의 손을 붙들었다. 항상 따듯했던 손이 시체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 그대에게 말해 줄게요. 그러니 제발 노여움을 풀어요, 이드. 나를 떠나지 말아요. 적어도 당신이 안전해지기 전까지는….”
막상 손을 내치려니 그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말 중 하나는 맞다는 걸 인지했다. 감당할 수 없는 낯선 사실은 균열을 불러온다. 그가 어머니의 일을 알고 레사스를 밀어내고 싶어졌던 때처럼.
균열에 빠져 다시금 예전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는 본능이 일어, 세이아드는 이 부정적인 것들을 일단 참아 보기로 했다.
애초에 마음이 끼어들게 했어서는 안 됐다. 감정적인 행동만큼 어리석은 게 없는 걸 아는데, 방금은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세이아드는 자신이 레사스에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휘둘리는 상태라는 걸 자각했다.
‘나는 대체 그와 뭘 하고 싶은 걸까.’
잠시 숨을 고른 세이아드는 곧 이성을 찾았다. 어디까지나 목표는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자신이 죄를 저지르는 걸 막는 것이다. 레사스가 숨기는 게 있더라도 그 목표에 닿는다면 그를 추궁해선 안 된다.
레사스 또한 자신과 연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밝혔고, 세이아드 또한 그럴 마음이 없으니, 그저 해왔던 것처럼 공동의 목표에 집중하자.
“알겠습니다.”
삽시간에 차분해진 세이아드를 보며 레사스는 안도인지 서글픔인지 모를 기미를 내비치다, 설명을 이어나갔다.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어요. 형님께서는 언제나 상황을 지켜보며 사람의 약점을 찾아내는 분입니다. 제가 이곳에 온 걸 알았을 테니 앞으로는 많은 이가 죽을 겁니다.”
그같은 말을 듣자 긴장감이 일었다. 저렇게 말함으로써 레사스는 아스테르가 악마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뭘 해야 하는지 말해 주십시오.”
“남은 세 개의 숲을 정화하면서 찾아야 할 게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 대공께서는 옳은 길이 뭔지 이미 알고 있으셨군요. 내게 왕세자가 되라고 하셨으니까요.”
“…무슨 소리십니까?”
“우리는 그 검을 찾아야 해요.”
레사스가 작게 속삭였다.
“‘거룩한 죽음’을 형님으로부터 찾아와야 합니다.”
레사스의 말을 들으며 세이아드는 창백한 손에 들린 검을 떠올렸다. 막상 세이아드가 항상 보아 왔던 것은 의식을 치르기 전 그 검을 쥔 아스테르일 텐데도, 이상하게도 그걸 떠올리니 자신을 처형하기 전의 레사스가 뇌리를 스쳤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항상 하얗게 빛나는, 마치 달의 뼈를 빚어 만든 듯한 날카로운 검.
레사스는 바로 그 검으로 세이아드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