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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89화 (87/147)

#89

“이드.”

도무지 뭘 할지 몰라 하는 레사스의 마음이 그의 행동 하나하나로 전해졌다. 간절하게 휘어진 눈썹과 자신만을 주시하는 예쁜 보랏빛 눈, 안절부절못하며 달싹거리는 입술 따위가 세이아드의 마음을 자꾸 찔렀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은 세이아드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왜 이렇게 속이 끓을까. 나쁜 말을 들은 게 아닌데 이다지도 마음이 아플 수 있나.

삶을 통틀어 처음 겪는 모순된 감정이었다. 레사스의 행동은 어리석고, 바보 같으며, 만용에 넘치는 짓이었지만 세이아드를 모욕하거나 탓하는 행위는 아니었다. 그러니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속이 아팠다. 갈빗대 중앙이 따끔거려 복부를 꾹, 꾹 누르고 싶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준다면,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게요. 그대가 슬퍼하니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그대를 웃게 하는 사람이 될 순 없어도, 적어도 울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습니다….”

세이아드가 말이 없자 레사스의 음성은 점점 더 애절해졌다. 상체를 바짝 숙인 그는 세이아드의 뺨을 한없이 쓸며 두려움에 질리기까지 한 얼굴로 세이아드를 살폈다. 손가락이 하염없이 눈가를 쓸더니, 짧은 망설임 후 그가 다른 팔로 세이아드를 꽉 안았다.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눈앞의 어린 청년이 자신에게 한없이 많은 걸 숨기는 것이 괘씸하고 의뭉스러우면서도, 감추는 법을 몰라 드러나는 감정만큼은 진짜라는 걸 알 것 같아서였다.

자신을 보호하는 법이라곤 몰라서 온몸에 생채기가 나도록 부딪혀 오는 이 아이를, 그래서 아꼈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아이가 이렇게 커다랗게 변했는데, 세이아드가 알아 온 중요한 면모만큼은 아직 남아있다는 게 와 닿았다.

“울지 마세요, 나의 사랑….”

세이아드의 침묵이 두려움을 줬는지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비며 속삭였다. 어린 짐승이 머리 숙여 예쁨받으려는 것처럼 그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세이아드에게 한없이 비볐다. 목을 간질이는 깃털 같은 감촉이 너무 간지러워 세이아드의 마음도 차차 풀어져 나갔다.

“…다시는 그런 식으로 몸을 던지지 마십시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세이아드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는 레사스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레사스의 복부를 뚫은 검 끝을 목격한 찰나 정신이 나갈 듯 두려웠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하지만 이드가 다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은걸요.”

뭐든 들어주겠다 지껄이더니 레사스는 잘도 반박해 왔다. 비비던 얼굴을 든 그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눈을 했다.

“이드가 아픈 것보다는 내가 다치는 게 나아요.”

“저는 남이 아픈 걸 내버려 둘 정도로 미친놈은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드는 또 아무렇지 않게 상처 입었을 거예요.”

반박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죽진 않겠지만 배에 구멍은 뚫렸을 것이다.

“저는 그래도 됩니다.”

“왜요?”

“그게 티테르의 사명이니까요.”

“아뇨, 다치는 게 당연한 사람은 없어요. 그렇게 치면 나는 회복할 수 있으니 내가 다치는 쪽이 유리합니다.”

레사스의 말에 반박하려던 그는 자신의 논리가 어긋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치미는 답답함을 이길 수 없어 눈을 찡그렸다. 매섭게 입매가 굳고 미간을 찌푸리자 레사스가 물에 녹는 설탕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드가 원한다면 최대한 그러지 않게 해 볼게요. 하지만 이드, 나 역시 그대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대는 너무 다정한 사람이라 남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희생하곤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레사스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그가 속삭였다.

“그걸 볼 때마다 차라리 그대를 대신해 죽고 싶어요.”

그리 말하는 레사스의 눈동자가 일순 텅 빈 것 같았다. 보랏빛 눈이 순간 공허해지는 걸 본 세이아드는 저게 진심이라는 걸 느꼈다.

왜?

대체 내가… 뭐라고?

버겁기까지 할 정도로 무거운 감정이 마음을 꾹 눌렀다. 앞서 그의 사랑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라, 세이아드는 그저 입술을 달싹였다. 당황해하는 세이아드를 살피던 레사스가 작게 물었다.

“그러니 우리 서로 최대한 다치지 않기로 약속할까요?”

“…확답할 순 없습니다.”

“그래도 이드, 몸을 내던지기 전 한 번만 나를 생각해 주세요. 그대가 다치면 옆에 붙어 끊임없이 성가시게 할 나를요. 귀찮은 게 싫다면, 무모하게 굴기 전 그대의 동료들을 믿어 보세요.”

동료라는 게 있었던 적이 없던 그에게 저 말은 생소했지만, 세이아드는 일단 레사스가 또 다른 미친 짓을 하는 걸 막고 싶었다. 고민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의 증표를 받아야겠어요.”

“그게 뭡니까?”

“입을 맞춰 주세요.”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듯한 거리에서 레사스가 속닥였다. 세이아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정화를 하시는 겁니까?”

그의 말에 레사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슬픈 듯한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대는 정화라고 말해도 됩니다.”

레사스의 손이 그의 뺨을 다시 붙들었다. 큼직한 손바닥이 세이아드의 뺨을 감싸고도 남았다. 소나무 향처럼 시원하고 아릿한 체향이 풍겼다. 피가 그리 묻었던 몸인데도 말이다.

“나는 이걸 입맞춤이라고 할게요.”

자기 좋을 대로 속삭인 말은 거기서 끝났다. 레사스는 도망갈 틈을 주지 않고 세이아드에게 다가왔다. 멋대로 궁에서 자신을 안던 그날처럼, 물러설 시간조차 허락하기 싫다는 듯 그는 입술을 삼켰다. 내내 말라 있던 입술이 레사스가 닿는 순간 적셔졌다. 긴 겨울 가뭄에 갈라졌던 땅이 젖는 것처럼 순식간에 부드럽게 녹으며 물기가 돌았다.

이상하게도, 입술이 닿자마자 세이아드 또한 더는 다른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레사스의 해진 옷을 끌어당기며 그를 제게 붙게 했다. 몸이 바투 붙었다. 서로가 서로를 삼킬 듯 휘청거리다 이내 세이아드가 땅 위로 누웠다. 봄기운이 들어찬 흙바닥은 춥지 않고 포근했다. 싱그러운 풀냄새가 아래에서 훅 끼쳤다.

하아, 하, 누구의 숨소리라 할 것도 없는 거친 호흡이 섞였다. 자연스럽게 세이아드를 덮은 레사스는 서투르면서도 마치 짐승이 본능을 따르듯 세이아드의 다리 사이에 자리했다. 날렵해 보이는 몸은 전에도 느꼈지만 가벼워 보여도 막상 자신을 짓누를 때면 무게가 상당했다. 너른 상체가 세이아드를 가리고도 남았다. 깔리는 기분이 들자 척추를 타고 오싹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살짝 들며 그는 은밀한 몸짓을 했다. 정신없이 혀를 섞으며 그를 탐하던 레사스가, 허벅지에 닿는 몸짓에 크게 흠칫하며 입술을 뗐다.

말갛게 젖은 이마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칼 아래로 동공이 좁혀진 눈이 보였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밀도의 욕망에, 세이아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벌어진 레사스의 옷 틈으로 막 새살이 돋아난 복부를 문질렀다. 근육이 선명히 잡힌 하얀 복부는 손가락이 미끄러지는 것처럼 부드럽고 따듯했다. 기분이 빌어먹을 정도로 좋아서 계속 만지고 싶었다.

“이드, 그만….”

레사스는 미치겠다는 듯 눈썹을 휘고는 세이아드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나 강제성은 없었다. 그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를 붙들 뿐이었다. 세이아드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손가락을 세워 레사스의 딱딱한 복부를 훑었다.

예쁜 얼굴이 흥분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자 기이한 충동이 들었다. 이게 정화라는 생각은 그 순간 하지도 못했다. 지난번 그가 제게 했던 무서울 정도로 기분 좋은 행위를 당사자에게도 해 주고 싶단 욕망이 세이아드를 지배했다. 나아가 그 이상, 그냥, 서로를 더 느낄 수 있는 무언갈 하고 싶었다.

스스로가 살아온 궤적에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세이아드는 충동을 따랐다. 복부를 만지던 손이 아래로 향했다. 기민하게 그걸 알아차린 레사스의 뺨이 터질듯한 도홧빛을 띠는 찰나, 잠들어 있던 바인이 몸을 움찔거리며 중얼거렸다.

“거참…. 니르아가…, 신기하게도 돼지 모양이네요…. 맛있겠네….”

거의 본능만을 따르던 세이아드는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화하는 가이드와 티테르가 별별 짓을 해도 지켜보는 것이 기사의 도리 아닌가. 그러나 레사스가 그러질 못했다. 그는 갑자기 서늘한 얼굴을 하며 휙 몸을 틀더니, 세이아드가 말리기도 전에 그를 가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바닥에 널브러진 망토로 세이아드를 덮는 것도 잊지 않았다.

털을 세우는 짐승처럼 경계심을 한껏 끌어올리는 꼴에 세이아드의 정신도 제자리를 찾았다. 원래 레사스의 상처를 씻기려던 목적이 그제야 떠올랐다. 부상자를 데리고 지금 뭘 하고 있었나, 하는 자책감도 뒤를 따랐다.

“…전하.”

세이아드의 부름에 레사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밑에 깔려있던 세이아드는 절 덮은 레사스의 상반신을 일순 넋 나간 듯 올려다보았다. 상아로 빚은 듯한 긴 목덜미 아래로 이어진 반나신이 조각 같았다.

보기 좋게 자리잡힌 가슴 아래로는 선명한 선을 타고 복근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홀린 듯 레사스를 훑던 세이아드가 복부 아래, 흰 하의에 가려진 또렷한 남자의 흔적에 흠칫 몸을 떨었다. 분명 옷에 가려져 있음에도 모양이 선명히 드러난 그것이, 말도 안 되는 크기였던 탓이다.

지난번 그저 감촉만을 느꼈던 때엔 제대로 보지 못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어렴풋한 형상이 드러나자 속이 새빨갛게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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