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등골이 서늘해지며 오싹함이 밀려왔다.
“왕세자님께서… 전하를 해하려 하시는 겁니까? 아니, 애초에 무슨 이유로 왕실 기사단이 숲속에 있는 거죠? 아니면 우리 모두 환각을 보는 걸지도 모릅니다. 기사들이 어떻게 여길 티테르 없이 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맞닥뜨린 사람들이 그러하듯 바인은 상황을 부정하려 했다. 어쩌면 정말 환상일지도 모른다. 악마의 힘이든, 무언가 사이한 것이 그들의 정신을 흐려 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티테르는 이능력에 당하지 않는다. 티테르끼리의 내전을 막기 위한 신의 안배일지는 몰라도, 티테르는 모든 외부의 자극에 대항하는 힘을 지녔다. 정신을 다룰 수 있는 티테르가 나오더라도 그들이 동료에게 힘을 쓸 수 없는 점이 그 같은 이치였다.
그러니 폭주에 이르지 않은 한 세이아드가 환상을 볼 일은 없다. 어머니 역시 홀로 환각에 삼켜지지 않고 실제하는 니르아를 상대하지 않았던가.
“주군, 저희가… 정말로 기사들을 죽인 겁니까?”
침묵하던 리그다가 죄책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이는 이 자리에서 레사스가 유일했으므로, 그녀의 질문이 향할 이는 레사스 뿐이었다.
레사스는 피가 묻은 흰 뺨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고는, 앞서 세이아드가 나무를 보았던 방향을 주시했다.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맞아. 우리가 죽인 것은 형님의 기사들이다. 죄 없는 가엾은 이들이지. 완전히 무결한 존재는 아닐지더라도, 의지와 상관없이 세뇌되어 이곳을 지키는 명을 받게 된 불쌍한 영혼들이야.”
세이아드는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바인과 리그다마저 이 같은 상황을 목격한 지금,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하고 가야 했다.
“누가 이들을 세뇌했다는 겁니까?”
그렇게 물었으면서도 실은 이미 답을 알 것 같았다.
세뇌는 재스퍼에게서도 발견되었던 흔적이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기사를 눈속임한 능력은, 실드라스의 옆에 있던 의문의 존재와도 연결되었다. 지금까지는 그자의 정체를 추측하려 하면서도 함부로 결론지으려 하지 않았지만, 기사들을 이렇게 체스 말로 쓰는 상황을 목격하자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고작 인간들이 숲속까지 들어와 있는 점, 그들이 죄 아스테르의 기사인 것, 그리고 하필이면 그들이 세뇌당해 있다는 것까지 고려하고 나면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왕실 기사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 악마와 연관되어 탄생한 자, 티테르의 분열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이, 어머니의 일에 얽힌 이들을 마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데려온 존재.
그리고 세이아드를 언제나 외롭게 만들려던….
그의 옛 주인.
“아무래도 형님께서는 해선 안 될 일을 하시려는 모양입니다.”
세이아드의 생각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듯 레사스가 답을 주었다. 함부로 나설 수 없는 주제에 리그다와 바인이 입을 다물었다. 어둠을 닮은 침묵 속에서 세이아드는 서서히 깨달았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그의 마음을 태우기 시작했다. 지독한 배신감이 들었다. 아주 한심하게 기만당하다 못해, 처절히 농락당했다. 지난 삶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왕세자의 사지를 찢어 놓고 다시 찢고 싶게끔 세이아드의 영혼이 어두운 불꽃에 태워졌다. 분노가 그의 이성을 지배했다. 바로 옆에 그의 원수를 둔 채 어머니와 자신을 이리 몰아간 자를 찾겠다며 충성을 다했다.
악마가 있다면 그것은 아스테르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등을 돌린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만큼은 자신을 믿어 준다고 생각했다. 그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이 칼날처럼 마음에 박혀 오며 세이아드를 난도질했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에 세이아드의 눈이 붉어지고, 그의 기운이 금세라도 폭발할 듯 요동쳤다.
마음이 지나치게 어지러워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떤 끔찍한 사실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꼭 지금 이 찰나 같았다.
“이드.”
당장에라도 이 어둠과 함께 동화될 것처럼 새카매지려던 영혼을 그 순간 레사스가 붙들었다. 하얀 옷, 하얀 피부,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는 모습이 세이아드를 다정히 감쌌다. 그의 손이 닿자 요동치던 파장이 움찔거리며 가라앉았다. 세이아드의 힘은 성을 내려 확 치솟다가도 흘러드는 레사스의 기운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서길 반복했다.
“우리는 방법을 찾아낼 거예요. 그러니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아직 힘이 남아있는 저 핵을 부수고, 돌아가서 지친 마음을 쉬게 하세요. 그러고 보면 아침이 찾아올 겁니다. 당신을 위한 해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럴 시간조차 아깝다는 말을 하며 레사스를 쳐 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세이아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피투성이가 된 채로 서 있는 저 얼굴을 보면서 모진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복부를 중심으로 새빨갛게 퍼진 흔적을 보니 더욱 그랬다.
아팠을 텐데.
저 정도로 다치는 건 세이아드에게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때의 통증이 어땠는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장기가 찔리며 속이 뒤틀리는 고통은 설명할 수 없이 끔찍하고, 보통의 사람이라면 죽고도 남을 치명상이었다.
세이아드는 굳은 얼굴로 레사스를 천천히 살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자상이 아물기 시작한 딱지로 가득했고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세이아드를 대신해 뒤집어쓴 피가 그의 옷을 온통 적셔서 잘 티가 나지 않지만, 칼에 베인 흔적 역시 이곳저곳에 있었다. 사리는 것 없이 인형처럼 달려드는 이들을 상대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바인과 리그다의 몫까지 나눠 상대했으니, 분명히 많이 다쳤을 터….
그런 꼴을 한 주제에, 레사스는 다 괜찮다는 듯 세이아드만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마음이 돌로 눌린 것처럼 아프고 무거워 세이아드는 더 이상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수 없었다. 바보같이 웃는 꼴에 다만 괴로움이 올라왔다. 그에게 어울리는 것은 깃털처럼 희고 아름다운 것들이지, 저렇게 잔혹하고 아픈 광경이 아니었다. 그냥 그게 맞았다.
저 꼴로 레사스를 더는 숲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론을 내린 세이아드는 굳어 있는 다리를 움직였다.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어둠을 헤쳐 걸어 나간 세이아드는, 장검을 꺼내 들어 힘을 실어 넣었다. 검신이 잘게 진동할 정도로 기운을 밀어넣은 후 그는 나무의 몸통에 자리한 거대한 핵에 검날을 찔렀다.
콰직!
두꺼운 껍질을 부수는 듯한 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공기마저 무거운지 소리는 퍼지는 대신 밑으로 흘렀다. 간신히 찔러넣은 검날로 힘을 불어넣기 시작하자 희미하게 남아있던 검붉은 기운이 요동치며 세이아드와 충돌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속삭임이 울렸다.
‘너는 나만의 별이다.’
검붉은 기운은 그리 속삭이며 회오리치다가, 밀려드는 세이아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흩어졌다.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기괴하게 울리며 사라졌다. 마지막 소리는 비단 세이아드만 들은 것이 아닌지 리그다와 바인이 흠칫 주변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지칠 정도로 힘을 밀어넣고 나서야 핵의 껍질이 파사삭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사방을 감싸던 어둠이 평범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횃불의 일렁임이 퍼지는 정도가 훨씬 커지고, 주변의 형체를 살필 수 있게끔 밝아졌다. 아무것도 없는 듯했던 밤하늘에는 달과 별이 돌아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하루를 꼬박 쓴 전투를 마친 뒤라 일행은 당장 숲 경계까지 갈 힘이 없었다. 남부의 숲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는 레사스의 말을 따라, 세이아드는 미심쩍어 하면서도 결국은 타협을 했다. 리그다와 바인이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쉬고 가는 편이 맞았다.
조용해진 숲은 무서울 정도로 평온했다. 온종일 들을 수 없던 새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하늘은 별이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별과 달이 워낙 환해 빛이 여기저기 새어 들었다.
개울가를 찾은 그들은 그 근처에 야영지를 마련했다. 바인과 리그다가 모닥불을 피울 것을 구해 횃불로 불을 붙인 후, 불침번을 서겠다고 말하더니 곧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나란히 어깨에 기대어 잠든 모습이 스스로 잠드는 것도 모른 채 눈이 감긴 것 같았다.
“대공도 쉬는 게 좋겠어요. 주변은 내가 지킬 테니.”
그들을 살피는 세이아드에게 레사스가 다정히 권했다. 말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상처를 살펴야겠습니다.”
자꾸 보살핌 당해야 할 가이드가 티테르를 보살피는 걸 막기 위해, 세이아드는 거절할 수 없는 화제를 내놓았다. 마침 개울이 옆에 있으니 상처를 씻고 지혈할 수 있는 곳은 지혈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 아물었어요.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레사스가 잘도 지껄였다. 말간 미소를 짓는 입술을 보는데 순간 화가 치밀었다. 세이아드는 무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레사스에게 성큼 다가간 그가 옷깃을 붙잡았다. 공격으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의복은 세이아드가 별다른 힘을 주지 않아도 찢어졌다. 레사스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사슴처럼 세이아드를 쳐다보았다. 제법 당황했는지 움직이는 것도 잊고 굳어 있는 레사스의 옷을 벌리자, 막 살이 채워지고 있는 상처가 보였다.
“거짓말을 하실 겁니까?”
그걸 보자마자 속이 타들어 가듯이 끓었다. 붉은 살이 겨우 돋아난 복부는 그 외에도 딱지 형태로 앉은 상처가 많았다. 보통은 흔적 없이 아무는 것이 치유력인데, 딱지가 앉을 정도라면 회복력이 복부의 자상에 쏠린 것 같았다. 세이아드 역시 이랬던 적이 많았다.
정신이 나갈 것처럼 이상하게 마음이 쓰라려 세이아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입을 열면 그를 탓할 것 같아서 싫은데, 속이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눈가에 열이 몰려 뜨끈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두통이 밀려들었다.
“미안해요, 이드. 내가 그대를 또 화나게 했을까요? 잘못했어요. 울지 말아요.”
레사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손을 뻗었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에 세이아드가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따듯한 손이 눈가에 닿았다. 잘게 떨리는 손끝이 세이아드의 눈가를 조심스레 쓸었다. 믿기지 않게도 그를 달래는 레사스의 손끝에 물기가 묻는 것이 느껴졌다. 미치겠다는 듯한 기색으로 레사스가 그의 뺨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