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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87화 (85/147)

#87

날카로운 통증을 삼키는 숨소리가 가프게 귓가를 스쳤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보랏빛 눈이 짧은 아파하며 일그러지는 듯했으나, 레사스는 곧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고통을 숨겼다.

방금, 무슨…?

발밑이 내려앉는 두려움이 확 밀려들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가 왜 공격을 대신 받아 냈나, 하는 의문 이전에 세이아드는 본능을 따라 레사스를 당겼다. 당장에라도 자신의 뒤에 숨기기 위해서. 공격을 받아 내고 사람을 지키는 건 티테르인 자신의 일이니까.

하지만 레사스는 그리 따라주질 않았다. 당겨 오는 세이아드를 외려 밀쳐 낸 그는, 복부를 뚫은 장검이 혹여나 세이아드마저 찌르지 않게끔 거리를 벌렸다. 비틀거리며 레사스가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레사스.

세이아드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작은 부름을 들었는지 레사스는 얼굴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작게 올리더니, 가슴팍을 크게 들썩였다. 몸짓 하나하나가 고통을 말하고 있음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복부를 뚫은 검이 몸을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왼손으로 꽉 붙들었다. 피가 주르륵 흐르는 게 보였다.

“레사스!”

이번에는 크게, 똑똑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보통의 사람은 복부를 뚫리면 살아남지 못한다. 저대로 죽어도 무방한 부상을 눈앞에서 목격한 탓에 세이아드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괜찮아요, 이드.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고함을 치며 달려오는 그에게 작은 속삭임이 닿았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한 레사스는 행동을 이어 나갔다. 그는 움켜쥔 검을 고정시켜 기사가 물러나지 못하게 한 뒤, 검을 들어 그의 뒤에 있는 기사의 목을 찔렀다.

피가 튀어 레사스의 흰 뺨을 점점이 물들였다. 세이아드를 습격한 기사는 곧 검을 놓치고 무너졌다. 죽는 순간까지도 소리가 없었다. 적의 숨통을 무덤덤하게 끊어 놓은 레사스는 자신의 복부에 꽂힌 검을 그제야 뽑아냈다. 고요한 신음이 입술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일순 이해하지 못한 눈이 깜빡이며 레사스를 담았다. 전장에서 이렇게 구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이해한 머리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세이아드는 장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레사스에게 달려가 그를 붙들었다.

“왜 이런 짓을 하신 겁니까…!”

다른 이도 아닌 왕자가 자신을 대신해 위험을 무릅쓸 거라곤 상상도 못했기에, 그리 말하면서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입으로는 그를 질책하면서도 세이아드는 당장 지혈을 위해 자신의 망토를 찢으려 했다. 세이아드의 외침에 바인과 리그다도 뒤를 돌아보더니, 경악하여 외쳤다.

“전하! 괜찮으신 겁니까?”

횃불이 어지러이 흔들리며 세이아드의 눈앞에 붉게 물든 흰옷이 드러났다. 하얀 달처럼 고왔던 의복은 복부에서 새어 나온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잘 잡혀 있던 대열이 흐트러지는 걸 본 레사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바인과 리그다를 제지했다. 늘 다정하던 음성이 지금만큼은 무수한 전투를 겪은 이처럼 냉정했다.

“가이드는 이 정도로 죽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대열을 이탈하지 마. 뒤를 맡으면 이곳은 내가 막겠다.”

그제야 세이아드의 머리로 가이드는 본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오두막에서도 목격했듯이 레사스는 스스로를 치유할 힘만큼은 가지고 있지 않았나. 그 때문에 이토록 무모하게 군 건가, 이해가 되면서도 마음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손이 덜덜 떨렸다.

무슨 정신으로 이런 짓을 해? 죽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당장에라도 그렇게 질책하고 싶은 것을 세이아드는 일단 꾹 참았다. 이 순간에도 공격이 쇄도해 오는 탓에, 그는 검을 휘둘러 방어했다.

“하지만 전하를 지키는 것이 저희의 임무입니다…!”

힘겹게 공격을 흘려넘긴 바인이 한번 더 외쳤다. 그러나 레사스는 홀로 차분했다.

“나는 어지간한 상처에는 죽지 않아. 염치없게도 내 한몸만큼은 회복할 수 있으니, 너희의 안위를 먼저 신경 쓰거라.”

레사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암흑 속의 공격이 심해졌다. 수세에 몰려 발악하는 것처럼 찔러오는 검이 매서웠다. 그것들을 흘려보내며 세이아드는 레사스를 자신의 뒤로 오게끔 하려 했다.

“당장 제 뒤로 오십시오.”

하지만 레사스는 물러서지 않고, 세이아드를 향해 쇄도하는 검을 캉, 캉, 쳐 내고는 공격에 나섰다. 오히려 세이아드를 앞장서 막은 그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말했듯이 나는 쉽게 죽지 않으니, 내가 싸우는 편이 낫습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대공에게 크게 뒤처지지 않아요.”

“당치도 않은 말이십니다. 세상에 그 어떤 왕족이 수하를 대신해서…!”

“대공이 다치면 내가 치유해 줄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내가 다칠게요. 나를 방패로 쓰세요, 이드.”

덤덤히 말을 이어 가며 레사스는 능숙하게 그를 향한 공격을 하나씩 상대해 나갔다.

잘도 사람을 방패로 쓰라는 말을…!

레사스는 가끔 보면 무언가 결핍된 사람처럼 굴었다. 국왕에게 자신을 고기 방패로 쓰라던 그 당시의 말이 생각나 미칠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레사스가 다치게 할 순 없으니 힘을 써서라도 단숨에 이들을 죽여야 했다. 힘만 쓰면 죽이는 건 한 순간이니까.

그러나 빌어먹게도, 희미하게 보이는 이들의 숨을 끊으려 결심하자 토기가 밀려들었다. 이것들은 니르아가 아니다. 죽여도 피하나 나오지 않는 괴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에게 능력을 쓴 적이 없었다. 그것은 오직 니르아를 위해 주어진 힘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죽지 않으면 죽는다. 이런 상황에서 자비 따위를 운운할 수는 없어.

당연한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킨 세이아드가 니르아에게 했듯 힘을 풀려던 그때, 레사스의 검이 기사의 목을 꿰뚫었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없이 적이 무너져 내렸다.

“그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돼요. 이것만큼은 내가 하겠습니다. 고운 손에 피를 묻히지 말아요.”

작은 속삭임이 세이아드의 귓가에 닿았다. 레사스는 그리 말하고는, 세이아드가 나설 틈도 주지 않고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기사들을 하나하나 죽여 나갔다. 서슴없이 적을 베어 가는 검을 따라 레사스의 옷이 점점 붉게 물들어 나갔다.

이윽고 암흑을 베는 듯한 전투가 끝났다. 쇄도하던 검이 사라지고 사방이 기이한 정적으로 물들었다. 시체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속, 횃불이 간신히 비추는 작은 반경 안으로만 지친 서로의 모습이 보였다. 피 냄새가 사방에 매캐했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전하, 괜찮으신 겁니까?”

더는 적이 없음을 확인한 바인이 달려와서 물었다. 레사스는 말없이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잔잔히 답했다.

“나는 괜찮다. 아까의 상처는 진즉 회복했어.”

그러고는 세이아드를 보며 레사스가 정말이라는 듯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심하라는 듯한 다정한 기색에 말문이 막혔다. 바인과 리그다는 그런 주군을 미심쩍은 듯 살피다가, 레사스가 괴로워하는 낌새 없이 다가오자 겨우 안심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회복력이 있다한들 가이드는 원래 지켜야 하는 존귀한 분들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숲 밖에서 기사들과 함께 대기하는 거고요. 전하, 제발… 몸을 좀 사려 주세요.”

레사스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세이아드에게 손을 뻗으며 그의 뺨을 만져 왔다.

“뺨에 상처가 났네요. 아팠겠어요. 달리 다친 곳은 없는 거죠?”

내려다보며 절 살피는 눈동자가 괴로울 정도로 따스했다. 진심으로 염려하는 것이 온몸으로 전해져, 세이아드는 일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지금 저 말을 해야 하는 것은 레사스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다시는 절 대신해서 나서지 마십시오, 전하. 부상은 티테르에게 흔한 일입니다. 복부의 자상에 죽지 않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지니, 귀한 몸을 사리십시오.”

죽지 않는 걸 아는데, 아까의 충격이 계속해서 세이아드의 몸에 감돌았다. 레사스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저었다.

“다쳐도 되는 사람은 없어요, 이드. 더군다나 그대가 다친다면 치유를 받기 전까지는 고통이 가시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금방 회복할 수 있으니 내가 다치는 게 맞습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자신이 말하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속이 답답했다. 레사스가 다치는 걸 보니 기분이 너무 더러웠는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라는 것만 확실했다.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반박을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 일부러 말을 돌렸다. 그가 바인에게 말했다.

“바인, 횃불을 줘.”

레사스의 명에 바인이 횃불을 건넸다. 횃불을 받아든 그가 바닥에 있는 시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명을 달리한 이들은 모두 푸른 달의 갑옷이 입는 복식을 하고 있었다.

“왜 왕세자님의 기사들이 여기 있는 걸까요? 같은 행렬에서 보았던 기사들은 아닌 듯한데… 도대체….”

리그다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자세히 들으면 작게 떨리고 있었는데, 같은 기사를 죽였다는 것이 큰 충격인 것 같았다. 그것은 바인이나 리그다 할 것 없이 같아 보였다. 그리고 세이아드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목에서 자꾸 신물이 올라왔다. 토기가 올라오는 것을 애써 참아내며 그는 입을 꾹 닫았다. 떨리는 손을 주먹 쥐며 그는 시체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분명 리그다의 말처럼 이번 토벌에 동행된 기사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익숙한 낯에 세이아드는 신중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 곧, 저번 생에서 보았던 이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리그다, 횃불을.”

리그다의 횃불을 받아든 세이아드는 천천히 시체 사이를 거닐며 그들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살펴볼수록 세이아드의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이들은 과거 아스테르를 모시다, 임무를 나갔다 전사했다고 전해진 실종자들이었다. 아마도 그 임무의 대부분은 레사스를 죽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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