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늪에 서린 물안개처럼 사람들을 에워싸던 격앙된 분위기가 레사스의 말과 함께 잠시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것은 세이아드의 모호하던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실드라스 가문에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 하지만 그 죄를 캐묻는 시기가 너무 교묘했다. 아까부터 차가웠던 마음이 더욱 식어 가는 걸 느끼며 세이아드는 생각을 정리했다.
아스테르는 저를 위해 실드라스의 죄를 밝히겠다고 했지만 그게 거짓임은 명백했다. 그가 진실로 세이아드의 행복을 원했다면, 지난 생에 이미 어머니의 결백을 증명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절대 세이아드를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같이 상대해 본 적 없는 니르아를 두고 싸워야 할 시기에 티테르끼리 내분이 생기는 쪽이 세이아드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시온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면 지난번처럼 세이아드가 감당해야 할 상황만이 늘어날 뿐.
세이아드는 마음을 정했다. 아스테르가 현장을 멋대로 휘젓게 내버려 둬선 안 된다.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 나서야 했다.
“그런 생각을 했느냐, 내 동생아?”
아스테르가 소리내어 웃고는 천천히 레사스에게로 걸어갔다. 숲의 입구를 등진 채로 서 있는 레사스에게 다가간 그는 짐짓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는 옳은 시기라는 게 있기 마련이야. 쓸모 하나 없던 네게 힘이 생긴 것 또한, 어쩌면 지금같이 위험한 상황을 안배한 태양의 지혜일지도 모르지. 체르탄 경은 지난겨울까진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전대 실드라스 공작이 살아 있던 때이니 말이다.”
“겨울은 이미 진즉에 물러갔습니다. 실드라스의 죄를 확신하고 물으려 하셨다면 수도에서 말씀을 꺼내셨어야지요.”
“그때는 체르탄과 조우하기 전이었던지라.”
아스테르는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저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그는 당장 나서서 아스테르를 질타하는 대신 조용히 세실리아 쪽을 살폈다. 그녀가 아스테르의 능숙한 거짓말을 눈치채길 바라며.
그리고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세이아드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석연찮은 표정의 누이 또한 무언갈 느낀 모양이었다. 말을 섞지 않아도 누이의 혼란스러운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상한 점이 많습니다, 형님. 체르탄 경은 어째서 국왕 폐하를 직접 찾아뵙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직접 프로시어스 대공을 찾아갔어도 괜찮았겠지요. 일의 당사자는 어디까지나 대공이니까요.”
레사스는 그리 말하더니 체르탄에게 직접 물었다.
“경이 직접 말해 보게. 그대의 용기와 삶을 위한 투쟁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으니, 이것이 추궁이라고는 여기지 말아.”
레사스가 물어오자 체르탄이 허락을 구하는 눈으로 아스테르를 보았다. 곤란한 그의 표정이 얼핏 보였다. 세이아드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자신이 아는 또 다른 증인인 재스퍼를 떠올렸다.
살아남았던 재스퍼는 세뇌를 당했다. 그리고 체르탄이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라면, 그또한 세뇌를 당했을 확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방향이 이상해. 재스퍼에게는 프로시어스를 적으로 삼는 세뇌를 걸어 놓고선, 체르탄 경에게는 외려 사실을 밝히는 세뇌를 걸어 놓는 건….’
무언가 허점이 있었다. 시르칸 실드라스는 철저하게 현장을 정리했다. 저 멀리 숨어있던 어린 소년들마저 무참히 죽이거나 세뇌했으면서, 다른 사람도 아닌 기사단장을 살려 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시르칸은 어머니와 버금가던 힘을 지닌 티테르다. 그가 실수로 체르탄을 살려 뒀다는 건 모든 일을 꾸민 이 치고는 허술한 방법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아스테르에게 유리했다. 마치, 꼭, 그가 이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처럼….
“왜 형님을 찾아갔나, 체르탄? 아니면 형님께서 널 찾아낸 건가?”
레사스가 던진 질문에 체르탄이 입을 열려는 차, 아스테르가 그를 막았다.
“어찌하여 경이 성으로 곧장 갈 수 있겠나. 그곳에는 아우의 모친인 레아나 왕후께서 계시는 것을.”
아스테르의 화살이 교묘히 레사스쪽으로 향했다.
“왕후 폐하 또한 그 자리에 계셨던 분인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그리 말한 아스테르가 상세한 설명을 붙이는 대신 싱긋 웃었다. 하지만 침묵하는 것으로도 여지는 남았다. 이제 상황은 한층 더 복잡해져, 누군가 잘못 발을 내딛는다면 벼랑 끝으로 떨어질 것처럼 첨예해졌다. 세이아드는 이 지긋지긋한 정치놀음을 지금 중재하자고 결정했다.
“아스테르 전하.”
세이아드는 드물게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아스테르를 불렀다. 왕세자라 칭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아스테르가 뒤를 돌아보았다. 흥미롭다는 듯 절 보는 아스테르를 보며 세이아드는 그답지 않게 입매를 부들게 허물어 웃었다.
십 년 넘게 웃어 본 적이 없는지라 어색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과거 행복하던 시기를 떠올리려 했다. 세이아드는 아무 걱정 없이 어린 세실을 돌보고, 레사스의 궁에 열린 사과를 줍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다시금 레사스를 만날 다음날을 기대하며 집에 돌아오면 양친이 그를 맞이해 주던 시절을 말이다.
그러자 조금, 웃을 만했다.
“저를 생각해 주시는 전하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래, 그분께 씌워진 누명을 벗기고자 긴 시간 고통에 시달렸던 제 영혼을 달래 주시는군요.”
일생 바랐던 일이 이루어진 사람처럼, 세이아드는 그의 삶에서 지워 버렸던 웃음을 매달았다. 그러자 아스테르가 눈을 깜빡였다. 모든 걸 예상하던 주제에 이것만큼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인지, 아스테르는 살면서 처음 보는 놀란 얼굴을 했다. 금색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우습게도.
동시에 그의 어깨 너머로 세이아드는 창백히 굳은 레사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 역시 이런 모습을 예기치 못했던 것인지, 날카롭게 아스테르에게 반박하던 기세가 일순 사그라들었다. 짧은 찰나 머릿속으로 과거 레사스가 했던 간절한 말이 스쳤다.
‘내가 또다시 그렇게 굴면, 방금처럼 웃어 줄 수 있나요?’
이까짓 웃음이 대체 뭐라고 저렇게 구는지.
세이아드는 일순 올라오는 불편함을 무시하며 웃는 낯을 더했다. 그러고는 아스테르에게로 걸어가 손을 잡았다. 장갑을 벗은 세이아드는 과거 그러했듯 아스테르의 손등을 들어 올리곤,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손등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감사합니다, 전하.”
속살거리는 숨소리를 따라 아스테르의 손등이 간지럽혀졌다. 그 미약한 자극에 아스테르의 손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다시금 고개를 들자 아스테르의 푸른 눈이 찬란한 호수처럼 기쁨에 빛나는 게 보였다.
“나의 별.”
아스테르가 다급히 그의 손을 맞잡아 왔다. 세이아드는 기꺼이 손을 내어주곤 주변을 한번 느릿하게 살폈다. 모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떤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세이아드 또한 그러했었다. 아마도 지난 삶을 겪어 보지 않았다면 아스테르의 교묘한 혀에 휘둘려 중요한 게 무엇인질 잊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무고함을 믿었던 만큼, 실드라스가 저지른 끔찍한 짓은 분명 명확히 단죄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숲의 토벌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국왕 폐하께서 ‘거룩한 죽음’의 주인을 이번 기회에 공고히 하시겠다 하셨으니, 실드라스의 일은 그 이후 처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거룩한 죽음은 국왕에게 전해지는 솔리아스의 국보였으므로, 그것의 주인이 될 거라는 것은 왕세자의 자리를 다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이아드가 검의 이름을 입에 담자 레사스가 자신을 빤히 보았다. 보라색 눈이 속내를 알기 어렵게끔 짙었다.
“그러니 말해 주십시오. 저희가 숲에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아스테르는 눈치가 성가실 정도로 빨랐기 때문에, 세이아드는 자신이 일부러 상황을 중재하려고 구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끔 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람을 상대하고 연기하는 일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고통을 참는 것은 지겨울 정도로 익숙했다. 역겨움을 통증으로 취급하며 참아내자 생각보다는 할 만했다.
의중을 살피는 푸른 눈이 세이아드를 빤히 보았다. 영혼을 꿰뚫는 듯한 서늘한 감각이 심장 근처에서 어른거렸다. 붙잡힌 손으로 아스테르의 기운이 흘러드는 것이 느껴졌고, 그럴 때면 으레 느끼는 마비되는 듯한 감각이 속을 찔렀다.
“브레드히트 공작이 알려준 훌륭한 정보에 의하면, 숲의 핵은 악마의 힘을 봉인하는 개체다. 니르아는 그걸 지키기 위해 주위를 배회하고 있지. 하니, 남부의 전대 공작이 정말로 악마를 깨웠다면, 숲의 핵에도 남다른 기미가 있지 않겠나?”
아스테르는 다행히 그의 뜻을 따라 말을 바꿨다. 브레드히트 또한 이 상황이 결코 편하지 않았는지, 얼른 왕세자의 말에 화답했다.
“악시드 대공, 그대는 지난겨울 핵을 없앴으니 알겠지. 핵은 악마의 영혼을 담은 붉은 구체의 모양을 하고 있다네. 만약 남부의 숲에 있는 핵이 다른 영지의 핵과 다른 상황이라면, 그게 악마를 깨운 어떤 증거가 될 수 있을 걸세.”
“그러니 비단 체르탄 경의 증언 외에도, 실드라스 가문이 악마와 내통한 삿된 자들이라는 증거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셈이지.”
아스테르가 브레드히트의 말을 이었다. 세이아드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다가, 브레드히트와 아스테르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핵이 악마의 힘이라 하셨습니다.”
“그렇다.”
아스테르가 순순히 대꾸했다.
“숲의 핵을 다 없애면, 어차피 악마는 죽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시온 실드라스는 그때까지 필요합니다, 전하. 그의 부친에 대한 속죄를 위해서라도, 직접 그의 손으로 악마의 흔적을 거두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세이아드는 그리 말하곤 뒤를 돌았다. 시온 실드라스는 다른 사람도 아닌 세이아드가 이 상황을 중재하리라곤 여기지 못했던 것인지, 수치스럽고 동시에 고통스러워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려는 몸짓이었다.
차라리 저렇게 구는 쪽이 낫다. 그편이 미워하고 증오하기 쉽다.
시온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세이아드는 아스테르를 살폈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미묘한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숱하게 옆에서 그를 살핀 세이아드만 아는 작은 차이였다.
그러자 확신이 섰다. 아스테르가 악마를 죽이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아스테르는 티테르를 폭주로 몰아가는 힘을 지니고 있고, 그 힘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제게 사용했던 과거와 지금 보여 주는 그의 이 같은 태도는 하나를 뜻했다.
아스테르는 악마와 연관되어 있다. 분명히.
“전하의 티테르로서 반드시 악마를 죽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전하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지겠지요.”
세이아드는 일부러 그런 그를 설득하듯이, 지극히 감동한 아랫것처럼 웃었다. 맹목적으로 들리기까지 하는 음성이었다. 빤히 그를 쏘아보던 푸른 눈이 이내 세이아드를 따라 휘었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실드라스의 처우는 그 뒤에 정해도 늦지 않겠지.”
아스테르는 여유롭게 몸을 틀어 레사스를 보고, 그다음으로는 숲을 보았다. 광활히 펼쳐진 숲을 손짓하며 그가 명했다.
“죽을 힘을 다하여 니르아를 죽이고 오너라.”
힘주어 그리 말한 아스테르가 몸을 틀었다. 체르탄을 거두어 막사로 돌아간 아스테르는 브레드히트를 불러 무언가 명하는 듯하더니, 곧 그에게 자신의 기사 한 무리와 기사단장인 아데나를 붙여 주었다. 그런 뒤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려는 것인지 아스테르는 실드라스의 어떤 기사도 숲에 들어갈 수 없다고 명했다. 대신 자신을 대신한 증인으로 아데나와 브레드히트를 내세웠다. 출발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기에, 인원이 정해지자 곧 숲으로 들어갈 일만 남았다.
경직되어 흩어진 티테르들을 모으는 일은 브레드히트가 했다. 시온은 산 송장처럼 입을 다문 채 침묵했고, 노바는 불편한 듯 그녀의 아버지에게 붙었다. 스텔라가 세실리아를 데리고 오는 것까지 확인한 세이아드는 숲으로 들어가기 전 레사스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는데, 레사스는 그곳에 없었다.
자취를 감춘 그가 마음에 걸려 눈을 찡그리던 세이아드는, 이내 바인과 리그다 또한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세이아드가 숲에 들어가는 광경을 끝까지 보던 지난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막사에 들어간 건가.
아침부터 그를 거슬리게 해 놓곤 자꾸만 도망가 버리듯 사라지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짢음, 그리고 그 외의 묘한 감정까지도 삼키며 세이아드는 숲으로 들어섰다. 낮임에도 꼭 밤이 온 것처럼 이상하게 스산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