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80화 (80/147)

#80

브레드히트를 만나기 위해 그의 처소에 들렀을 때 주인은 자리를 비운 뒤였다. 레사스와의 일이 생각보다 시간을 끌었기에 세이아드 또한 공작저를 나섰다. 막 정문을 나선 그는 저택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세실리아와 마주쳤다.

“오빠!”

세실리아가 그를 보자마자 말에서 내려 뛰어왔다. 막 루나에게 올라타려던 걸 멈춘 세이아드가 팔을 벌려 그녀를 맞이했다. 달려온 세실리아가 은발을 흩날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 가느다란 몸을 안아 주며 세이아드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세실.”

이름을 부르자 세실리아가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눈에 불안함이 어렸다.

“몸은 괜찮아? 다쳤다고 들었어. 아스테르 전하께 정화는 받은 거야? 치유력도 없는 레사스 왕자가 오빠를 데려가서 얼마나 불안했는지 몰라. 오빠를 보러 가고 싶은데 정화를 받는 동안엔 방해할 수 없다고 들어서… 잠도 자지 못하고 내내 기다렸어.”

의식을 잃기 전 세실리아가 레사스를 경계하던 것이 떠올랐다. 레사스를 결코 좋아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임을 알지만, 아스테르에 대한 불신이 어젯밤 이후 거의 확실해진 터라 세이아드는 그녀를 설득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세실, 너도 느꼈듯이 레사스 전하의 정화는 남다르다. 그 자리에 너도 있지 않았더냐.”

세실리아는 그 말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에 자리한 깊은 분노가 사실과 상황을 분리시킨 듯, 그녀가 말을 돌렸다.

“그건 상관없어. 우리에게는 어차피 아스테르 전하가 있잖아. 오빠가 왜 그분의 편을 드는지 모르겠어. 오빠도 예전에 그랬었잖아. 레사스 전하는 더는 우리와는 관계 없는 실드라스의 사람이라고.”

맞는 말이다. 세이아드는 분명 누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증오에 휩싸여 그를 미워하자고 결정했었다. 그러나 어두운 감정이 영혼을 장님으로 만든 동안 세이아드는 많은 사실을 놓쳤다.

“레사스 전하께서는….”

세이아드는 말을 천천히 골랐다. 쿠르투를 통해 어머니의 일을 알게 된 그날, 레사스는 자신이 시온에게 남매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부탁했다 고백했다. 완벽한 거짓이라 여겼던 그날의 말이 이번 시온의 태도를 통해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온은 진심으로 그와 그의 아버지가 둘의 목숨을 ‘살려준’ 존재라고 여겼다.

“우리를 내버려 두라고 시온에게 부탁한 당사자다. 나 또한 그가 시온과 한편이라 여겼지만, 실상은 조금 더 복잡해. 너도 어제 보지 않았더냐. 실드라스 공작이 우리를 구해 줬다고 말하던 걸.”

“그건 다 헛소리야.”

세실리아가 반박했다.

“나는 몰라도 오빠는 티테르잖아. 북부의 티테르를 죽일 정도로 왕실이 그렇게 어리석진 않아. 설령 누군가의 부탁이 있다 한들 우리를 죽이진 않았을 거야. 게다가 오빠처럼 강한 티테르를 제압하는 게 가능할 리 없잖아.”

“그때의 나는 어렸다, 세실. 힘을 제대로 써 본 적도 없었고, 전대 실드라스 공작이나 다른 이들이 개입했다면 우릴 없애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말해보거라, 왕세자 전하께서 정확히 어디까지 말해 주셨지?”

세이아드의 단호한 말에 세실리아가 잠시 주춤했다. 고민하던 그녀가 작게 내뱉었다.

“전대 실드라스 공작이 어머니의 자리를 노리고 함정을 팠다고 했어. 어머니의 말은 다 사실이고, 실드라스 공작이 레아나 왕후와 함께 작당했다고 말이야. 오빠, 레사스 왕자는 그런 왕후의 후계자야. 원수의 자식이라고.”

세실리아가 생각하는 바는 지난 생의 세이아드와 같았다. 그녀의 말을 듣는 내내 세이아드는 아스테르가 어쩌면 이런 자신의 생각을 자꾸만 강하게 만들어, 결코 레사스와 마주할 수 없게끔 거리를 만든 것만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레사스를 보는 것조차 증오스럽게끔.

“아스테르 전하께서 한 가지를 빠트리셨구나. 레아나 왕후는 전대 공작과 뜻을 함께하지 않았어. 그녀는 자신이 보는 것이 진심이라고 믿었다.”

아스테르가 만약 진실을 제대로 밝힐 예정이었다면, 레아나 왕후를 비롯한 이들이 당시 세뇌된 것처럼 니르아를 보지 못했다는 걸 밝혔음이 맞다. 그러나 세실리아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확실히 중요한 정보는 숨겼다. 제게 그러했듯이.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날의 일을 다른 식으로 기억하는 증인을 나 또한 찾았다.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하게끔 할 테니, 나를 믿어라. 세실리아, 아스테르 전하는 분명 우리의 가이드이시지만… 그분은 위험해.”

세이아드는 누이의 눈을 응시했다. 그녀는 세이아드가 자신보다 우선해 지키고 싶어 하는 소중한 피붙이며, 유일한 가족이지만, 그녀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누이는 긴 시간 자신을 떠나있었으며 아스테르로 인해 이곳에 올 결심을 한 터였다.

“세실, 나는 언제나 너를 지키고 싶었다. 예전에 네가 했던 말을 나는 이제 이해해. 다른 것에 눈이 멀어 정작 중요한 널 방치했던 그 당시를 후회한다. 그러니 너도 그때의 네가 그러했듯,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거라는 걸 알았으면 한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세실리아가 입술을 꾹 닫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예전의 나도 틀렸어. 오빠가 하는 말을 믿지 못했었지만 사실 오빠는 그때도 어머니의 말을 믿었던 거잖아. 어제 오빠가 싸우는 걸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무서운 건 처음이었어. 그렇게 무서운 걸, 오빠는 혼자서… 해 온 거잖아. 사실 내가 화가 나는 건, 오빠를 그런 상황에 홀로 둔 나 자신이었어.”

그녀는 여전히 레사스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껄끄러워 보였지만, 그 감정을 꾹 삼키며 세이아드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오빠의 말을 잘 들을게. 하지만 내게도 설명이 필요해. 아스테르 전하가 왜 위험한 거야?”

그전까지는 완벽히 확신할 수 없어 세실리아에게 공유할 수 없었지만, 세이아드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어제 레사스 전하의 정화를 받았지. 그렇다면, 다시금 아스테르 전하의 정화를 받게 될 때 비교해 보거라. 분명 무언가 다르다. 세실, 나는 전하의 정화가 티테르를 폭주로 몰아간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들은 세실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주변을 조심히 둘러본 그녀가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오빠, 그건 너무 위험한 말이야.”

“네가 봤던 미래를 기억하겠지. 너는 내가 무수한 이를 죽이게 된다고 했어. 그런 일이 생길 가능성은 폭주가 유일해. 나의 가이드가 언제나 왕세자 전하였던 것을 기억한다면, 정화를 받고도 내가 폭주에 이르게 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그건….”

반박할 말을 찾기 어려운지 세실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세이아드는 그녀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게끔 시간을 주기로 했다.

“너의 능력이니 네가 가장 잘 알겠지. 일단은 숲으로 가서 상황을 보며 잘 판단해 보거라. 세실, 레사스 전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원수가 아니야.”

세이아드는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그런 그를 올려다본 세실리아는 눈을 가늘게 찌푸리곤 세이아드를 한참 보더니,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오빠는 레사스 전하를 완전히 믿어?”

그 말에 답할 수 없었다. 레사스가 은밀히 흘린 말을 들은 뒤로는 더 그랬다. 레사스가 그의 해답일 거라는 어떤 직감과는 별개로, 그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 마음이 어수선해졌기 때문이었다.

레사스의 모든 행동은 다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그 감정이 여전히 욕망일 것이라 세이아드는 믿고 있지만, 그 욕망을 차치하고 설령 그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 친다면.

의문이 너무 많아진다.

전생의 레사스가 자신을 지금과 그러했듯 좋아하면서도 억지로 기대하지 않으려 했다면, 그때의 그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절 경멸했던 것인지.

더군다나 레사스가 지금 이 시점에 아스테르의 힘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그는 분명 자신의 폭주가 아스테르로 인했음을 확신했을 터. 그러면서도 자신을 직접 죽이고 어떠한 말도 흘려주지 않았던 이유는 대체 뭘까.

그 외에도 의문은 무수했다. 레사스는 어떻게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지부터 시작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굴던 지난겨울과 달리 변해 버린 그에게 무슨 비밀이 있는지….

그러나 이 중에서도 세이아드의 마음을 자꾸 건드리는 것은, 레사스가 자신을 ‘좋아해 왔다’고 하면서도 저를 그리 경멸하고 죽였던 그 순간이었다.

지나간 일이며 이 생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던 상황임을 알면서도, 그를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세이아드는 삶의 끝을 맞던 그날을 자꾸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레사스의 마음을 믿을 수 없게끔 만들었다.

“나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세실. 그저 너와 다른 이들을 지킬 최선을 찾을뿐.”

세이아드는 결국 그리 말했다. 스스로를 타이르듯이.

숲으로 도착하자 다른 이들은 모두 도착해 있었다. 늦게 당도했음에도 그를 이상하게 보는 기사들은 없었다. 외려 세이아드가 등장하자, 실드라스의 기사들까지 그에게 눈길을 주며 정중히 예를 취했다. 아스테르의 기사단은 그 정도가 더했다.

“오셨습니까, 대공.”

깍듯하게 인사하며 그를 따르는 듯한 모습에 세이아드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에서 내렸다. 그의 말고삐를 기사단장인 아데나가 친히 나와 받아들었다.

“대공을 기다리던 차였습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래.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세이아드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아스테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막사에서 브레드히트와 함께 나오더니, 세이아드를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왔는가, 나의 별? 때마침 그대를 기다리며 준비한 게 있었네.”

그의 옆에 있는 브레드히트와 세이아드의 눈이 마주쳤다. 싱긋 웃는 아스테르와 달리 브레드히트의 표정은 아주 좋지 않았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세이아드를 보더니, 죄책감이 어린 눈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뭔가 이상했다.

“다들 모였으니, 이제부터 우리가 숲에서 뭘 찾아야 할지를 말해 주겠다.”

그리 말한 아스테르의 시선이 실드라스의 기사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제에 비해 확실히 안색이 좋지 못한 시온이 있었다.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아스테르의 시선을 받아냈다. 스텔라와 노바는 평소보다 그와 거리를 둔 채, 기사들의 앞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아스테르의 말을 기다렸다.

“여기 있는 브레드히트 공작은 숲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네. 모두 알다시피, 니르아는 먼 과거 우리 인간들을 위협한 악마의 부스러기지. 수백 년 동안 니르아는 제아무리 대단해도 티테르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었어. 그러나 다들 목격했듯, 어제 나타난 니르아는 달랐지. 아주 강하고, 자칫하면 모두 위험에 처할 뻔한 악마의 하수인 같은 괴물이었다.”

아스테르의 말에 기사들의 표정에 두려움이 일었다. 일개 인간의 힘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그것을 목격한 이가 상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이아드는 그런 분위기를 살피며 대체 아스테르가 무슨 꿍꿍이인지를 가늠했다.

“다른 곳도 아닌 남부에서 이런 일이 생긴게, 나는 어쩐지 석연찮더군. 그러다 최근 내가 알게된 아주 중요한 일이 하나 떠올랐다. 전대 실드라스 공작의 일이지.”

아스테르가 그리 말하더니 세이아드를 마주쳤다. 문득 그가 어제 말했던 게 떠올랐다.

‘내일부터는 더욱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네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집안을 구애의 선물로 주지, 이드.’

설마…?

“나는 바로 며칠 전 전대 실드라스 공작이 악마를 봉인에서 깨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몇 년 전, 전대 악시드 대공에게 생긴 비극과도 연관되어 있다.”

아스테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좌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이아드는 저도 모르게 시온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눈을 부릅뜬 시온이 아스테르를 멍하니 보더니, 뒤이어 분노에 뒤덮인 얼굴로 외쳤다.

“그 무슨 모함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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