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레사스의 시선이 드디어 저에게서 떨어져 바깥으로 향했다. 그 틈을 타 몸가짐을 바로 한 세이아드가 먼저 막사 문을 열어젖혔다. 아직 흐트러진 머리칼이나 셔츠를 정돈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천막을 젖히자마자 평소보다 유독 공손한 자세를 한 바인이 서 있었다. 그의 옆에서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있던 리그다도 보였고, 모나라고 불리던 기사나 종종 보던 얼굴들이 보였다.
저들끼리 모여 앞을 지키던 그들은 앞장서 나온 세이아드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휙 시선을 내리깔았다. 훔쳐보다 걸린 사람처럼 민망해하는 모습에 세이아드도 잠깐 말문이 막혔다. 이런 적은 기실 처음이 아닌데도 오늘따라 제가 왜 이렇게 당혹스러워하는 건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 저,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두 분의 중요한 시간을 절대로 방해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엿듣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마지막에, 그저 어떤 소리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때 바인이 죽을죄를 진 것처럼 허리를 납죽 숙이며 외쳤다. 평소에 저렇듯 깍듯하게 구는 놈이 아닌 걸 보아 와서 그런가, 어이가 없었다. 세이아드는 내려와 있던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고 그의 말을 정정했다.
“그저 정화일 뿐이다. 이런 걸로 소란 떨 필요 없어. 그보다, 공작은 어디로 안내했지?”
정화라는 세이아드의 말에 바인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일렁이는 횃불 아래로 바인이 혼란스러워하며 멈춰 있자, 리그다가 얼른 나섰다.
“실드라스 공작가로 가셨습니다.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티테르들과 왕세자 전하께서도 공작가에서 오늘 밤을 지내실 예정입니다.”
리그다가 빠르게 상황을 설명하는 사이 레사스가 막사에서 나왔다. 인사하는 기사들을 스친 레사스는 세이아드에게로 직진해 그의 어깨로 검은 외투를 걸쳐 주었다. 그러고는 세이아드의 앞에 서서, 살짝 내려온 머리칼들을 이마 위로 조심스레 넘겼다.
“대공, 제대로 정돈해 드리기도 전에 먼저 나가셨습니다. 그러다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요.”
레사스가 시야를 차단한 탓에 기사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레사스가 하는 말이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는 것이 신경 쓰였다.
“불필요하게 전하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이아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좁혀진 거리를 다시금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었다. 정신을 잃기 전부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 이성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레사스와 전보다 더 친밀해지는 것은 곤란했다.
표면적으로 세이아드는 여전히 아스테르의 옆에 있는 것처럼 보여야 했다. 아스테르 본인이 그렇게 느끼려면 더욱 신중히 굴어야 했는데, 레사스가 숲속까지 들어와 끼어들 것이라곤 예기치 못했다.
그러고 보면 레사스는 언제나, 숲에 있었다.
자신이 죽던 날에도 그는 다른 티테르들을 위해 숲에서 친히 싸우고 있었다. 세이아드는 언제나 그 모습을 보면서, 숲의 경계에서 자신을 기다릴 아스테르를 생각하곤 했었다. 가이드의 안전이 티테르의 안전이니 마땅히 왕족의 도리를 따라 바깥에 있음이 옳을 텐데도, 레사스는 늘 거침없이 숲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어리석고 무모하다 여기곤 했다. 제 티테르를 지키기 위해 가이드가 숲으로 들어오는 꼴을 세이아드는 언제나 끔찍이 한심하게 보았음에도, 막상 그가 자신을 위해 숲으로 온 것을 보니 마음이….
“저는 먼저 공작가로 가겠습니다. 전하께서는 기사들과 함께 안전히 오시지요.”
세이아드는 생각을 멈췄다. 더 깊게 생각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세이아드는 일부러 자신의 머리칼을 다듬어 주는 레사스의 손을 밀어내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뜨겁게 엉겨 붙어 있던 아까 전을 부정하듯이 매정한 음색에, 화사하게 피어 있던 레사스의 안색도 바뀌어 갔다. 말라붙은 꽃잎이 가루처럼 부서져 흩어지듯 그의 미소가 점점 사그라들었다. 웃고 있던 눈이 차분히 가라앉더니 레사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날이 어두우니 같이 가는 게 좋겠습니다, 대공. 몸 상태도 좋지 않잖아요.”
“왕세자 전하께서 기다리시는 것이 저어되어 그렇습니다.”
세이아드는 은근히 아스테르를 언급하며 거절했다. 서로 맺은 계약을 떠올린다면 그들이 같이 성으로 가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기실, 아스테르가 자신을 여기에 둔 것부터가 의외였다. 지난번 보였던 비틀린 속내를 생각하면 레사스에게 정화를 받게끔 두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말이다.
또 버리고 싶어졌나?
세이아드의 입술 아래로 자조가 새었다. 멀쩡한 다른 티테르들과 달리 홀로 상처 입고 전투에서 의식을 잃은 꼴을 보고 쓸모가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폭주한 자신을 진정시킬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레사스의 손에 처형할 권한을 넘겼던 그때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오직 그 힘 때문에만 곁에 둘 가치가 있는 티테르. 그게 악시드 대공이겠지. 모두가 그렇게 여기는….
“그러면.”
세이아드의 마음으로 어두운 밤이 드리우려는 차, 레사스가 제안했다.
“대공이 가는 길이 어둡지 않게끔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부상당한 티테르를 위한 나의 최소한의 배려만큼은 받아 주세요, 대공.”
입이 다물렸다. 딱히 이것까지 거절할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 침묵하자, 레사스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나머지는 이곳에 남아 다른 기사들과 함께 숲을 경계하고, 넷 정도만 나를 따라와 줘. 지금 출발할 테니.”
“네, 전하.”
바인이 잽싸게 답했고 리그다도 분부를 따라 움직였다. 삽시간에 분주해진 기사들을 보던 세이아드는 레사스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들을 지나쳤다. 레사스의 시선이 자신에게 다시금 따라오는 걸 느꼈지만 세이아드는 일부러 그걸 무시했다.
세이아드는 자신이 무서울 정도로 레사스의 존재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꾸만 레사스가 제 옆에 있었고, 그를 밀어내도 다시금 돌아갈 이유가 생겼다. 그러더니 결국 오늘은 끝내 아스테르와도 해 본 적 없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레사스와의 관계는 완전히 통제를 벗어났다. 여기서 더는 고삐를 놓아선 안 돼.
정화를 운운하긴 했지만 세이아드는 막사에서 있던 일이 저답지 않다는 걸 알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휘말렸는지를 곱씹던 그는, 결국 레사스가 보여 주는 행동들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도 이렇게까지 세이아드를 간절히 염원하고, 그의 상처를 보며 비통해하지 않았다. 그는 모두가 무서워하는 사람이었지, 예쁘다거나 귀엽다는 기괴한 말을 들을 존재는 아니었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이라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다. 그뿐이다. 다시금 궤도를 잡으면 돼.
세이아드는 제게 주어진 이 두 번째의 기회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는 여전히 무수한 사람을 죽인 죄인이었다. 제게는 이런 사사로운 감정을 즐길 자격조차 없었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머니의 원수를 갚고 폭주를 막아야만 했다.
그리고 항상 이 모든 일의 전제에는 언제나, 자신의 죽음이 있었다.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죽음마저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게 티테르의 마음가짐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었다. 잃을 것이 있는 사람만이 무언가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런 삶이니, 레사스가 자신에게 더 가까워지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못한 일이다. 가이드와 티테르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니르아를 상대하는 건 극도로 까다로워진다. 그것이 왕국이 가이드와 티테르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한 이유이기도 했다.
감정은 일을 그르친다. 오늘 낮의 숲에서 있던 일만 봐도 그러했다. 막사 안에서 레사스가 보이던 지나칠 정도의 염려 또한 그와 같은 선상에 있었다. 티테르의 몸은 다치고 굴리는 것이지, 소중히 사리며 보호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는 니르아를 죽이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을 아껴서는 안 되고, 저 또한 누군가를 아껴서는 안 된다.
말을 타고 숲을 가로지르며, 세이아드는 그의 뒤에서 일렁이는 횃불을 보았다. 그의 앞길까지 희미하게 밝히는 그 빛을 억지로 돌아보지 않으며 세이아드는 고삐를 꽉 쥐었다.
***
실드라스 공작가는 남부의 고전적인 양식을 따라 화려하고 우아했다. 새카맣고 단단해 보이는 북부의 악시드 성과 다르게 남부 특유의 흰색으로 만들어진 성벽과 색색의 장식들이 새겨져 있었다. 실드라스 공작가에 직접 발을 들이는 것은 어릴 적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방문했던 시기가 언제였더라.
아. 공교롭게도 시온 실드라스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나, 그랬을 것이다.
먼 과거의 일이었기에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시온의 여덟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전대 공작은 그의 자식을 언제나 과할 정도로 아끼는 것으로 유명했던지라, 그 해의 생일도 화려했었다. 내내 참석하지 않던 어머니가 그때만큼은 한 번 얼굴을 내민다는 명목하에 세이아드를 데려갔었다.
어렴풋이 봤던 전대 공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한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시온 실드라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하연에서 공작이 시온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다는 말을 세이아드는 지금까지도 기억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순 없다던 어머니의 말과는 반대되었던 게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자신을 엄하게 키우셨으니까….
그렇게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데, 전대 공작은 왜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원했던 거지?
세이아드는 전부터 생각했던 의문을 떠올리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낮의 일 때문인지 실드라스 공작가의 기사들은 세이아드를 알아보고 곧장 안으로 안내했다. 검까지 들이밀며 적대적으로 굴던 낮의 분위기와 달리 그들은 무슨 영문인지 세이아드에게 깍듯했다. 적개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 악시드 대공!”
티테르들이 모여 있다는 실드라스 저택의 회의장으로 향하려는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기척과 목소리였다. 브레드히트 공작이었다.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자 그가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성큼성큼 걸어온 브레드히트는 세이아드가 말리기도 전에 양팔을 뻗어, 세이아드를 안았다.
“오늘 낮에 있던 일을 들었네. 자네가 내 모자란 자식과 다른 이들을 구해 줬다지. 진심으로 감사하오.”
그리 말한 공작이 세이아드의 등을 툭툭 때렸다. 가벼운 동작이었으나 티테르 자체의 힘을 무시할 순 없어, 상처 부위가 세게 짓이겨졌다. 인상만을 쓰며 침음을 삼키자 브레드히트가 다른 식으로 생각했는지 너털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다쳤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 다행이구만. 정화는 잘 받았나?”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왜 늦었던 겁니까?”
곧장 추궁을 하자 브레드히트 공작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겨울이 끝나자마자 잠시 조사할 게 있어서 시간이 지체되었네. 아무래도 지난번 기원제의 일이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그러다가 오늘 일어난 니르아의 일까지 듣고 나니 내가 조사하던 게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세이아드가 눈을 찡그렸다.
“그게 무엇입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지난 혹한기를 기점으로 생긴 모든 일들이 역사적으로는 한 번도 없던 일 아닌가?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자꾸만 기시감이 들더군. 그러다 떠올렸다네. 나의 어릴 적, 지금 같은 이변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었어.”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자신조차도 감을 잡기 어려운 기이한 일에 대해, 다른 이도 아닌 브레드히트 공작으로부터 실마리를 얻게 될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공작은 과거의 이 시기엔 이미 죽고 없던 사람이 아닌가?
“자세히 말해 주십시오.”
세이아드의 표정을 따라 브레드히트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가셨다. 그는 주변을 조심히 살피더니, 세이아드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모든 것은 솔리아스가 생기던 때와 연관되어 있어. 악마가 태양을 삼키려던 그때에 지금과 같은 일이 생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