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72화 (72/147)

#72

등을 내보이는 건 결국 약점을 비추는 거였다. 그리고 세이아드는 약한 티테르여서는 안 됐다. 그의 가문이 이름이나마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자신이 솔리아스에 필요한 티테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힘을 조금이나마 얕보이는 행위는 죽어도 해선 안 될 일이었다.

문득 그러한 불안이 세이아드의 안에서 잠시 일었다. 현장의 모든 일을 자신이 다 책임져야 한다는, 어떤 강박이 그를 덮쳤다. 마음 놓지 못하고 잠시 주저하는 사이 앞에서 스텔라가 그를 불렀다.

“세이아드, 이걸, 이걸, 어떻게, 죽여야 할지 모르겠어…!”

망설임은 스텔라의 당혹스러운 외침에 지워졌다. 그래. 지금 저들에게는 세이아드가 필요하다. 지난겨울, 상급 니르아를 상대하던 때와는 달랐다. 경험이 풍부한 셀피니 베트리아나 아스터 브레드히트와 달리 저들은 고작해야 저번 겨울에 처음 니르아를 만났다.

스텔라는 자신과 동갑이긴 하지만 아직 스물다섯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마땅히 정해진 가이드 또한 없던 터라 힘을 마음대로 쓰며 사냥에 따라다닐 수 있던 상황 역시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에 굳어 버리는 건 지당했다.

그리고 저 괴물은 세이아드 자신에게도 낯선 존재였다. 불안하긴 하지만 이곳을 남에게 맡기고 괴물을 상대하러 떠나야 했다.

“아무도 다치지 말거라.”

세이아드의 말에 바인과 리그다가 멈칫, 그를 보았다. 다른 이도 아닌 세이아드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믿을 수 없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진심이었다. 적어도 니르아를 상대하는 이 전장에서는 더 이상 누군가가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그 말을 남기고 세이아드는 빠르게 시온과 스텔라에게 합류했다. 스텔라는 아까 했던 것처럼 나무들을 불러와 괴물과 그들의 사이를 막는 방벽으로 쓰고 있었다. 세이아드가 옆에 오자마자 스텔라가 애써 두려움을 삼킨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핵이 너무 많아. 시온의 힘으로 하나하나 다 부숴 봤지만, 사라지지도 않고 부상을 입는 것 같지도 않아. 대체 이걸… 이 괴물을 어떻게 죽여?”

옆에서 시온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앞서 무리하게 힘을 쓰고 시작한 탓에 시온의 안색이 창백했다. 힘의 대가로 몸속이 진창이 되고 있을 터이니 그걸 참는 것만으로도 괴로울 터였다.

니르아와의 싸움은 그 존재보다도, 힘의 대가를 견디고 있는 것이 가장 힘든 부분이다. 같은 티테르인 이상 지금 시온이 느낄 통증이 어떤지는 세이아드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세이아드는 하나로 형용하기 어려운 마음을 담아 시온을 내려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이를 악물곤 세이아드를 마주 쏘아보았다.

“답이 없는 걸 보니 대공 또한 상대법을 모르나 보군요. 온갖, 아는 척은… 다 하더니.”

간신히 그 말을 뱉어 낸 시온은 괴물의 발악이 심해지는 것을 보더니, 허리를 바로 폈다. 새하얘진 얼굴로 앞을 본 그가 눈을 반쯤 감았다. 눈꺼풀 아래로 금빛이 은은히 새는가 싶더니, 뒤이어 하늘에서 벼락처럼 빛이 내리쳤다. 괴물의 몸통을 매섭게 관통하는 소음이 귓가를 요란히 때렸다. 그러나 몇 번을 연이어 내리친 빛에도 괴물은 비명만을 지를 뿐, 사라지진 않았다.

세이아드는 그 광경을 보며 고심했다. 이 같은 괴물은 저 자신도 마땅한 공략법이 없었다. 재생이 가능하니 핵을 파괴하지 않는 한 영원히 그것을 반복할 텐데, 수백 개의 핵들 중 진짜가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으로 괴물의 새카만 목구멍이 떠올랐다. 절 삼킬 듯이 굴던 놈의 아가리 너머로 본 것 또한 분명 핵이었다.

외피가 단단하고 강한 이유는 속에 있는 것을 감추기 위함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목구멍 끄트머리에 박힌 그것이 약점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놈의 내부는 외부와 달리 핵이 여러 개가 아니고 하나뿐이라는 점이 확신을 불어넣었다.

“내가 저걸 유인하지.”

결론을 내렸다. 세이아드는 망설임 없이 스텔라와 시온에게 고했다. 그러자 스텔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다음에는?”

“저렇게 대놓고 보여 주는 핵들은 모두 속임수다. 다른 니르아를 삼키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것들의 핵일 확률이 높아. 놈의 핵은 입 속에 있다.”

시온이 눈을 찡그리고 반문했다.

“그걸 어떻게 부순다는 겁니까? 외부의 공격이 통하질 않는데?”

“안에서 파괴하겠다는 말이다.”

세이아드의 말이 한번에 이해되지 않는지 잠시 말이 없던 시온은, 이내 그의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딱딱히 표정을 굳히고 정색했다.

“대공, 티테르도 인간입니다. 니르아에게 그렇게까지 노출되면 영혼을 빼앗길 수 있습니다. 죽는다는 소리라고요.”

시온의 지적은 맞는 말이었으나, 의외이기도 했다.

“네가 내 죽음을 신경 썼던가?”

불신이 가득한 눈을 마주한 시온이 금갈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헛웃음을 지었다.

“네, 티테르의 죽음은 내 책임이니까요. 레사스의 이름에 누가 되는 짓은 안 합니다.”

시온의 입에서 레사스의 이름이 나오는 찰나, 묘한 불쾌감이 일었다. 세이아드는 표정을 굳히며 서늘히 고했다.

“실드라스가 망하는 걸 보기 전까지 죽을 생각은 없으니 과분한 염려는 접어 두지. 방법을 제시할 게 아니라면 내 계획을 따르는 걸로 알겠다.”

“세이아드, 이것만큼은 시온의 말이 맞아. 니르아에게 그렇게까지 가까이 접근하는 건 너무 위험해.”

“우리의 힘은 점점 불안정해지지만 니르아는 그렇지 않아. 그러니 스텔라, 내가 저것을 유인했을 때 너는 내가 먹히는 걸 막아. 세실리아를 불러오면 수월할 거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를 빼닮은 청록색 눈이 흔들렸다. 확신이라곤 없는 얼굴로 스텔라가 속삭였다.

“만약, 내가 실수하면 어떡해? 내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스텔라.”

세이아드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해 보기 전까진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다.”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직접 부딪히는 것만큼 가장 확실한 방법이 없다. 결정을 내린 그가 몸을 틀어 괴물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온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돌아오십시오, 대공!”

시온이 그를 붙들기 전 세이아드는 점점 길어지기 시작한 숲의 그림자를 타고 스며들었다. 어둠 속으로 몸이 일순 잠겼다가 솟구치자, 그는 괴물의 앞에 당도해 있었다. 사방으로 몸을 굴리며 나무를 부순 그것이 굉장히 화가 나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기민하게 세이아드의 존재를 눈치챈 니르아는 휙 고개를 돌려 세이아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를 까마득한 위에서 내려다보는 기괴한 멧돼지의 얼굴에는 붉은 눈 같은 것이 수십 개였다. 일제히 세이아드를 주시하는 거대한 니르아로부터 분노와 다른 무언가 느껴졌다.

그것은 어떤 욕망 같았다.

다만 너무 깊고 어두워, 도저히 무엇을 향한 욕망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역겨워지며 내면에 잠재된 공포가 슬금슬금 올라왔다. 그것을 잊기 위해 세이아드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세이아드가 움직이지 않는 걸 본 니르아는 검은 침을 질질 흘리며 입을 쩌억, 벌렸다. 동굴처럼 벌어진 거대한 입은 삼켜지는 순간 끝도 없는 어둠으로 침잠할 듯했다. 그러한 니르아의 입 안쪽에서 희미한 붉은 빛이 보였다. 분명 저것이었다.

생각보다 깊게 삼켜져야 한다. 거의 먹히기 직전까지.

핏줄이 도드라진 손을 까닥거린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니르아는 기이한 숨소리를 그르르, 흘리며 세이아드의 속도에 맞춰 그를 따라왔다. 점점 더 빠르게 세이아드가 뒤로 물러서자 니르아가 사냥을 시작했다.

구에엑, 꿰엑!

돼지 멱따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렸다. 세이아드는 그림자를 타고 미끄러지며 스텔라가 자신을 볼 수 있을 거리까지 그것을 유인했다. 흘끗 뒤돌아본 뒤쪽에 스텔라가 창백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 세실리아가 있는 것을 본 세이아드가 결심을 마쳤다.

지금이다.

세이아드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괴물은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세이아드를 덮쳤다.

“안돼, 오빠―!”

세실리아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세이아드는 그를 둘러싸는 소름끼치는 적막과 조우했다. 사방이 새카맸다. 죽어 가던 그 순간에 봤던 어둠이 세이아드를 잡아먹고 있었다.

한기가 삽시간에 차올랐다. 단숨에 얼음조각처럼 몸이 굳는 감각 속에서 그는 선명히 빛나는 붉은 핵을 보았다. 쿵, 쿵, 쿵, 심장 뛰는 소리와 비슷한 공명이 뇌리에서 울렸다. 검을 쥔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온몸이 의사를 벗어났다.

‘이 끔찍한 악마는 한시라도 빨리 죽는 게 맞아!’

어딘가에서 시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무수한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처럼 잔인한 존재는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내 가족을 돌려내!’

세이아드가 지은 죄들이 그를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메마른 목울대가 크게 떨렸다. 이윽고 그를 증오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것으로 바뀌었다.

‘아가, 모두 죽여 버리렴….’

어머니의 음성은 한없이 다정하고 서글펐다. 자장가를 들려주는 것처럼 그리운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였다.

‘너를 증오하고, 너를 저버린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려. 아무도 너를 제대로 보지 않잖니. 심지어 네 동생조차 너를 버렸어.’

상냥한 부추김은 세이아드가 죽기 전 들었던 음성과 같았다. 모두가 그의 적이라는 속삭임이 세이아드의 손과 발을 묶었다. 어둠이 달콤한 안식을 안고 그를 감쌌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고 여겨지는 평온이었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내가 대공을 좋아하니까요.’

밤하늘의 달처럼 은은하며, 세상을 밝히는 빛 같은 음성이었다. 세이아드가 생전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말을 늘어놓는 속삭임이 옆에 앉았다.

간절한 보라색 눈망울로 잘도 늘어놓던 달콤한 거짓말이 웅웅 퍼지기 시작했다. 평온히 잠들고 싶은 세이아드를 성가시게 방해한 목소리는 끝내 레사스의 음성으로 변해, 그를 깨웠다.

‘잘 자요, 나의 달.’

끈질기게 그를 쫓아다니는 청년을 떠올리는 순간 잠식되어 가던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헐떡이는 숨을 내쉰 세이아드는 손을 움직여, 내면에 깃든 힘을 단숨에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빛조차 들지 않는 순수한 어둠을 그의 것으로 끌어왔다.

어둠은 내게 주어진 유일한 권능.

너희를 만든 힘으로, 너희를 내가 죽이겠다.

그의 의지를 따라 니르아의 안을 물들인 어둠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한 번도 해 봤던 적 없는 일이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힘을 조절하는 것이 수월했다. 그는 일렁이는 어둠을 잡아 뜯어 저 너머의 핵을 향하게끔 했다. 니르아의 안으로 뾰족한 가시들이 툭, 툭, 튀어나오기 시작하더니.

끝내, 핵을 찌르며 솟구쳤다.

귀를 찌르는 비명과 처절한 절규가 울렸다. 삽시간에 어둠이 가시고 시야가 환히 밝혀졌다. 그러나 정신이 나갈 듯한 환청은 여전했다. 머릿속을 터뜨릴 듯이 울리는 소리에 세이아드는 눈을 반쯤 까뒤집으며 뒤로 쓰러졌다.

멈추지 않는 속삭임이 뒤섞여 그의 정신을 곤죽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당장 얼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추위가 찾아들었고, 이대로 제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을 만큼 두통이 밀려들었다.

그 욕구를 따라 세이아드는 더듬거리며 얼굴 위로 손을 올렸다. 창백한 긴 손가락이 눈두덩이를 더듬더듬 문지르며 꾸욱, 눌렀다. 이대로 터트리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세이아드가 힘을 주려는데, 누군가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드. 그러지 말아요.”

방해꾼을 밀쳐 내기 위해 세이아드는 간신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경련하는 건장한 몸을 따듯한 체온이 꽈악, 껴안는 게 느껴졌다.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힘에 세이아드가 어깨를 비틀며 밀어내려는데,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사스, 위험하다고 했잖아. 왜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오빠, 오빠는 괜찮아요?”

“지금은 일단 상황을 수습하는 게 급하니까 전하께서는 일단….”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통을 증폭시켰다. 세이아드가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자 그를 안고 있는 팔의 힘이 강해졌다. 가물가물한 시선으로 위를 보니 레사스의 얼굴이 보였다. 확실하지는 않았다.

레사스, 라기에는….

싸늘하고 딱딱하게 굳은 턱이 꼭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보라색 눈은 호숫가에서 봤던 것처럼 여명의 태양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보라색에 붉은빛이 섞인 듯한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그의 오뚝한 콧날과 입매는 모두 경직되어 있었다.

그런 얼굴로 세이아드를 내려다보던 레사스는, 이윽고 처음 듣는 목소리로 좌중에게 명했다.

“다들 입 다무세요.”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