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먹이를 앞에 둔 짐승처럼, 괴물의 몸에 박힌 핵들이 탐욕스레 번들거렸다. 앞서 종족을 여유롭게 사냥하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욕망이 느껴졌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두껍고 짤따란 다리는 외형과 달리 엄청난 속도로 그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저런 것에 대해선 배운 적이 없단 말입니다!”
세이아드의 질책에 시온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검을 움켜쥐었다. 온화하고 예쁘장한 얼굴은 중압감에 짓눌려 창백한 상태였다. 그는 뛰어오는 니르아를 보며 심호흡을 하더니, 팔을 휘둘러 자신의 뜻을 따른 빛을 소환했다.
“다들 뒤로 물러서! 일단 최대한 저것으로부터 거리를 벌려라!”
시온은 최소한의 명령을 해내곤 힘을 방출했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새하얀 빛이 뛰어오는 괴물과 사람들의 사이를 경계처럼 막았다.
쿠궁!
땅을 내리치는 빛이 지축을 진동시켰다. 그 자체로 타오르는 불덩이보다 강한 열기를 머금은 실드라스 특유의 힘이 주변을 환히 밝혔다.
“와아아!”
압도적인 힘의 폭발을 본 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공포로 얼어붙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이들이 정신을 차린 건 좋지만, 이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님을 세이아드는 알았다.
‘최소 상급 니르아다. 이런 것은 여태 본 적이 없어.’
상급 니르아는 티테르의 공격 한 번에 죽지 않는다. 그런 일이 가능했으면 숲을 진즉 밀어 버렸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같은 상황에 티테르의 힘을 과하게 먼저 쓰는 행위가 위험했다.
“실드라스, 힘을 거두고 다시 전략을 짜야 한다. 너와 내가 저것을 상대하는 동안 스텔라에게는 노바와 세실의 통제를 맡겨.”
이를 악물고 빛무리를 유지하는 시온을 붙들며 세이아드가 경고했다. 팔을 붙든 순간 불안정해지기 시작한 파장이 느껴졌다.
“빛 너머로 어떤 니르아도 나오지 못하는 걸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상태로라면 저걸 죽일 수 있을 겁니다.”
“저건 최소 상급이야. 하급과는 달리 머리를 쓸 줄 알아. 이런 단순한 공격에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니르아는 무엇보다 빛에 약합니다. 시기도 시기인데다 나의 힘이라면 저 정도는 죽일 수 있어요.”
하, 빌어먹을.
어린 것의 치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세이아드 또한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리라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를 기사들의 목숨과 끊임없는 부상을 통해 치렀다.
그 누구보다도 수많은 전투를 거쳐온 세이아드지만 저런 괴물은 본 적 없었다. 니르아는 대개 하나의 형태를 고수했으며, 동족들은 잡아먹지 않는다. 애당초 저것들은 사람의 영혼과 감정을 먹이 삼는 괴물이지 실질적인 먹이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저것의 핵이 마음에 걸렸다.
상위 니르아로 갈수록 그것들은 영특하게 약점을 숨기고 보호할 줄 알았다. 하지만 저 끔찍한 붉은 눈들을 전신에 달고 돌진하는 모습이 세이아드를 불안하게 했다.
저 중에 약점이 있긴 한 건가?
“승자는 접니다.”
세이아드의 불안함을 반박하듯이 시온은 힘을 더했다. 그의 흰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턱에 고였다. 빛이 숲을 삼킬 듯 커지기 시작했다.
“다들 물러나라!”
시온의 명을 따르다가 빛에 정신이 팔려 멈춘 기사들을 세이아드가 물리기 위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은 지휘권을 가진 시온과 세이아드를 번갈아보더니,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으로 주춤거렸다. 시온의 말마따나 빛무리는 모든 니르아를 죽일 듯 강렬했기에 그걸 믿는 것 같았다.
급박했던 상황이 차차 진정되는 듯했다. 시온은 몇 분에 걸쳐 끊이지 않는 빛을 강타했다. 결국 그의 파장이 지나치게 불안하다 여겨지던 차, 힘이 끊겼다. 헐떡거리며 그가 팔을 내렸다.
빛무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눈을 부시게 하는 힘이 차차 사라지며 숲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앞서 우글거리던 니르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하자, 시온이 안도한 표정으로 세이아드를 보며 말했다.
“모두 소멸된 게 확실….”
“시온, 아니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텔라가 외쳤다. 일순 목격한 것처럼 앞서 도망치던 니르아들은 소멸했다.
그러나 괴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뛰어오던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선 채, 사람과 비슷한 각진 이빨로 아그작, 아그작, 니르아를 씹어 삼키고 있었다. 벌름거리는 콧구멍이 태연하게 시온을 주시한 채였다.
곧 빛이 사라짐을 확인한 괴물이 전신에 달린 붉은 핵을 희번득거렸다. 검은 침처럼 보이는 것을 바닥으로 질질 흘리던 입이 기이하게 벌어졌다.
궤에에엑! 끼엑!
돼지 울부짖는 소리를 낸 괴물이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달려왔다. 세이아드가 시온을 붙들고 설득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쏜살같이 덤벼드는 괴물을 보고 시온이 경악한 숨을 들이켜며 빛무리를 내리쳤다.
“젠장, 무슨, 이런 니르아가…!”
그러나 괴물은 멈추지 않았다.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낸 몸은 상급 니르아답게 금세 재생되었다. 외려 시온의 공격이 분노를 불러왔는지, 니르아는 큰 괴성을 내지르며 티테르들을 향해 돌진했다. 시온의 빛이 그것에게 닿기도 전이었다.
“스텔라, 모든 힘을 다해 이것을 묶어!”
세이아드가 고함을 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는 땅 위로 내려앉은 괴물의 그림자로 자신을 연결해, 단숨에 그 위치로 스스로를 끌어당겼다.
눈 깜짝할 사이 괴물을 가로막은 세이아드의 눈앞에 당장 그를 삼킬 듯 벌어진 커다란 입이 보였다. 사람의 구강과 비슷하게 생긴 구조의 새카만 입 안쪽, 목구멍에 위치한 핵 하나가 보였다.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세이아드는 그것의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장검으로 다리를 길게 베었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리던 괴물은 순간 휘청이며 잠시 균형을 잃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세이아드는 괴물의 밑에서 어둠으로 빚어낸 창들을 불러내었다.
대낮의 어둠은 빛이 있기에 그 형태가 오히려 짙다.
그러므로, 밤의 어둠과는 달리 하나하나에 실린 힘이 강했다. 지금 그가 쓰는 힘 또한 밤의 창보다 훨씬 더 강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이아드 힘으로 불러온 날카로운 창들이 괴물의 하복부를 꿰뚫었다.
“스텔라!”
세이아드의 다급한 외침을 따라 스텔라가 반응했다. 사방의 나무가 쿵, 움직이며 괴물을 둘러쌌고, 땅에서 솟아난 덩굴이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괴물은 금세 균형을 잡으며 다리를 생성해 내더니, 사방으로 몸부림치며 나무들을 단숨에 박살냈다.
쏟아지는 나무 파편 속에서 세이아드는 검을 휘둘러 다시금 다리를 베었다. 그러나 학습 능력이 빠른 것인지, 그것은 다리를 내주지 않고 외려 크게 위로 들어 세이아드를 내리찍었다. 황급히 몸을 굴려 그걸 피하자, 괴물은 세이아드를 다시 공격하는 대신 그를 버리고 티테르들에게로 향했다. 목표는 시온이었다.
괴물은 스텔라의 덩굴을 뿌리치곤 시온을 덮쳤다. 노바의 비명이 들리는 동시에 시온이 삼켜질 듯 괴물의 몸에 가려졌다. 그러나 그 찰나, 괴물의 동작이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시온을 삼킬 듯 입을 벌린 괴물이 습격하던 모습으로 정지한 동시에 세실리아의 외침이 들렸다.
“멍청하게 굴지 말고, 공격을 하란 말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시온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재개했다. 아까와는 달리 화살처럼 가늘어진 빛이 괴물의 몸에 있는 핵 위로 퍼부어졌다. 몸에 박힌 핵 하나하나를 겨냥한 정교한 공격이었다.
그 광경에 잠시간 기대가 생겼다. 저 중 하나가 약점이라면, 이대로 저걸 없앨 수 있다.
하지만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괴물이 고개를 치켜들더니, 입 안에서부터 니르아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꾸웨엑,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의 거대한 목구멍으로부터 커다란 덩치의 늑대며, 곰이며, 온갖 종류의 맹수의 모양을 한 검은 괴물이 뱉어졌다.
“작은 것부터 죽여야 해!”
시온이 어떻게든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고함치며 명령했다. 하지만 괴물이 그리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것은 시온과 스텔라를 몸으로 깔아뭉개기 위해 돌진했고, 그사이 토해진 니르아들은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문제는 기사들이었다. 상위 계급의 니르아가 만드는 공포는 보통의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움직일 수 없이 굳어 버린 보통의 인간들을 니르아가 목표 삼은 것이다.
“아아악!”
가장 앞서 있던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다.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그들의 가슴을 베었다. 세이아드는 더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아수라장 속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땅에 어지러이 흩뿌려진 그림자로 만든 창들이 니르아를 꿰뚫었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앞서 있는 동료가 부상을 입으며 쓰러졌음에도, 발이 땅에 묶인 것처럼 기사들은 몸과 의지가 따로 노는 얼굴을 했다. 공포어린 그들의 얼굴을 보며 세이아드가 노바와 세실리아에게 명했다.
“너희가 기사들을 지켜라. 혹시나 더 내려올 니르아들을 막는 것도 너희의 임무야!”
“알겠어, 오빠.”
막 시온을 위해 힘을 쓴 세실리아는 창백한 안색임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더니, 굳어 있는 노바의 어깨를 세게 흔들며 외쳤다.
“나랑 이 나라를 지키자면서요! 당장 정신 차리고 할 일을 해!”
세실리아의 외침에 노바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녹색 눈으로 상처입은 기사들을 훑더니, 이를 악물고 그녀의 힘을 소환해 냈다.
“미안해요, 진짜, 너무 무섭지 뭐예요!”
스스로의 실책을 인정하며 노바가 그들을 공격하려는 니르아의 핵을 칼로 콱, 찔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세실리아는 부상당한 기사들의 앞을 막고 세이아드에게 말했다.
“오빠는 저걸 상대해. 오빠가 아니면 이 상황을 해결할 사람은 없어! 여긴 나랑 노바가 어떻게든 할게!”
“저, 저도 돕겠습니다…!”
드디어 굳어있던 기사들 중 말하는 이가 나왔다. 기절할 듯 창백한 안색을 한 바인이 밀려드는 공포를 억누르며 움직이고 있었다.
“니르아가 숲 밖으로 나가지 않게끔 제일 뒤에서 막겠습니다. 그러니 저 끔찍한 걸 죽여주십쇼, 대공!”
“여긴 걱정하지 마세요! 뒤는 저희가 지킬게요!”
리그다가 바인의 편을 들어 나섰다. 그의 뒤를 봐주겠다는 사람들의 말에 세이아드는 일순 멈칫했다. 그들은 비록 명령을 따르는 것뿐이겠지만, 누군가 ‘함께’ 싸우는 것이 그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숲은 언제나 세이아드 홀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기사들 또한 결국에는 세이아드가 지켜야만 했던 이들에 불과했다. 그는 긴 겨울을 언제나 혼자 지새웠고, 혼자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래야만 했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몫을 조금이나마 덜어 줄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