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70화 (70/147)

#70

세이아드는 저 눈을 알았다. 옳다고 여겨지는 밝은 쪽에 서서, ‘악마’인 세이아드를 지탄하던 시온의 시선이 저러했다. 무자비하고 잔혹한 그를 시온은 처음에는 저런 눈길로 측은하게 여겼다. 한없이 선한 이가 악한 자를 가엾이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

하여, 세이아드는 그동안 시온이 레사스와 다름없이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자라고 여겼다. 그랬기에 스스로와 그들을 더욱 선 긋고, 어쩌면 내내 믿어 오던 어머니의 결백이 허황된 망상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순간까지 마주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시온은 그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시온은 세이아드의 행동에 분노했고, 가끔은 측은해했던 것이다. 왜냐면 그의 집안이 기꺼이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살려준 나약한 것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세실리아가 검을 빼어 들며 나서는 순간 뒤에 있던 실드라스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울리는 날붙이 소리에 세실리아가 흠칫 뒤돌았다. 수십 명의 기사들이 세실리아를 향해 적의를 내비치며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티테르를 상대해야 한다는 두려운 기색 속에 그들을 향한 경멸과 혐오도 비쳐졌다.

강렬하게 와 닿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세실리아를 충격에 빠트렸다. 이렇듯 밀집된 이들의 경멸을 한 몸에 받는 것은 세실리아가 평생 해 볼 필요 없던 경험인지라, 순간적으로 압도된 것 같았다. 그의 누이가 흠칫하며 세이아드를 찾았다.

세이아드는 바로 지금같은 순간이 도래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런 상황은 세이아드 혼자만 겪어도 족했다. 다수의, 아니, 온 나라의 이들이 자신을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은 세실리아가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 명의 증오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는 흔적이 남는데, 다수의 것을 홀로 상대하는 일은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죽고 싶지 않다면 검을 내려라.”

스산한 목소리로 세이아드가 명했다. 원래는 시온이 마땅히 제지해야 함이 옳으나, 그는 말리는 대신 세이아드를 외려 질타했다.

“지금 제 기사들을 협박하신 겁니까, 대공? 먼저 위협을 가한 것은 대공의 누이입니다.”

“티테르의 일에 일개 기사들이 끼어들 권한이 있던가? 아니면, 이제 막 각성한 내 누이의 검이 두려워 기사들이 지켜 줬으면 하나 보군.”

“굳이 제 손을 쓸 상대가 아닌 게 확실하기 때문이죠.”

“그런 상대에게 다수의 기사를 통해 협박하는 꼴이 아비와 똑같아. 티테르답지 못하게 병석에서 생을 마감한 나약한 시르칸 실드라스의 핏줄다워.”

시온의 눈이 희번득 빛났다. 금갈색 눈동자가 분노를 담고 일렁이자 그의 주변을 둘러싼 대기가 일순 환해졌다.

“당신같이 끔찍한 악마에게도 자비를 베푼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그를 그렇게 존경할 수 있는지 보겠다. 그러니, 헛짓거리는 이쯤하고 마저 갈 길을 가는 게 어떤가.”

세이아드는 그리 말하며 경계 자세를 취한 기사들을 살기어린 시선으로 훑었다. 손 하나만 까닥하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을 것들이 과하게 만용을 부리고 있었다. 그때 나선 것이 상황을 관찰하던 바인이었다.

“저, 다들 이만하는 게 어떨지…?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개기는지 모르겠지만, 대공은 검을 휘두르지 않고도 우리들을 죽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싸움 구경을 하러 온 게 아니고 니르아를 잡으러 왔는데….”

레사스의 기사들은 대다수 세이아드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중 낯선 얼굴들은 나서는 바인을 붙잡으며 그만하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바인은 물러서는 대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일개 기사도 아는 사실을 너만 모르는가?”

세이아드가 바인의 말을 놓치지 않고 받아내자 시온이 발끈했다.

“바인, 너는 지금 갑자기 왜 나서는 거야! 대공이 레사스를 핍박하는 적이라는 걸 몰라서 그래?”

시온은 꼭 배신당한 사람처럼 바인을 질책했다. 지켜보던 리그다가 정중하게 바인을 지지했다.

“각하, 레사스 전하를 생각하신다면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하고 토벌에 집중하는 쪽이 좋아 보입니다. 그편이 전하의 명성을 더 드높이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시온은 리그다의 반박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디 가서 아랫것에게 반감을 사거나 타박을 들을 일 없이 자라 온 존재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을 것이다.

“주제를 모르고 나불대는구나, 너희 둘 다. 고아에 평민을 거둬 기사로 만들어 준 제 주군을 욕보이고 있어.”

리그다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심드렁하던 바인의 기색도 심상치 않아졌다.

“저희가 고아로 자라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언제나 별생각 없는 것처럼 상황을 넘기던 바인답지 않았다. 그리고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눈을 떠난 이 상황을 이용하려는 시온을 말로서는 제압하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향해 성큼 걸어간 세이아드가 팔을 거칠게 뻗었다. 거친 손이 시온의 멱살을 낚아챘다.

“닥치고 네 할 일을 해라, 실드라스.”

시온의 눈동자에 경악과 분노가 어렸다.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다시금 말하려는데, 등골이 일순 서늘해졌다. 니르아가 나타날 때면 유독 몸이 먼저 그걸 알아차리는 터라, 세이아드는 고개를 돌려 숲의 안쪽을 보았다.

“미쳤습니까?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봅니다? 당장 이 손 놓으십시오!”

체격 차는 나지만, 시온은 티테르였다. 타고난 힘에서는 세이아드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 터라 멱살을 쥔 손을 시온이 부러트릴 듯 쥐었다. 그러나 세이아드의 시선은 그를 떠나 숲 너머로 향해 있었다. 날이 아주 밝았고 숲 전체로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는데, 니르아가 풍기는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실드라스, 당장 전투 태세로 들어가.”

빌미가 주어진 자리에서 시온과 겨루는 것도 해 볼 법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세이아드의 명령에 시온이 당연하게도 반발했다.

“말 돌리지 마십시오. 지금 이 행동은 돌아가서 확실히 책임을….”

“니르아가 나온 것 같으니까, 지금 당장!”

니르아라는 말에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을 말리기 위해 접근했던 스텔라는 세이아드가 보고 있는 방향을 보더니, 곧 창백해진 표정으로 손짓했다.

“시온, 저기를 봐.”

스텔라의 손가락이 향한 끝에는 검은 형상이 보였다. 정확한 형태를 알기 어려운 그림자가 그들이 있는 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시온도 니르아를 발견했고, 세이아드를 확 밀쳐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다들 침착해. 니르아는 공포를 먹고 강해지니 두려움이 올라와도 참아야 한다!”

잘도 외친 그가 세검을 뽑아든 후 세이아드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손끝이 떨리는 것이 보였지만 의연한 척 스스로를 다듬은 시온이 스텔라에게 말했다.

“스텔라, 저것들이 오면 발을 묶어 줘. 크기로 보아하니 중급 니르아같아.”

“알겠어. 하지만….”

스텔라는 불안한 듯 시선을 돌려 세이아드를 보며 물었다.

“니르아가 어떻게 낮에 나온 거야? 심지어 지금은, 봄이잖아…?”

“누이, 통솔자는 나야. 지금은 당장 눈앞의 일에 집중해.”

스텔라가 세이아드와 말을 섞는 것을 견제한 시온이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같잖은 신경전은 현재 세이아드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타칸에서 낮에 니르아가 나왔다던 레사스의 말은 기억과 달리 3년이 당겨졌다. 세이아드가 알고 있는 과거보다 많은 게 빨라지고 있음이 확실했다. 미칠 듯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찰나에 그들의 앞으로 니르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느릿느릿하게 기어 오는 듯했던 풍뎅이 모양의 니르아는 이제 보니 상당히 빠른 속도였고, 이상하게도 그들을 보는 순간 달려드는 대신 다른 행동을 취했다. 그것은 세이아드의 숱한 경험과 달리 그대로 사람들을 지나치려고 했다.

언뜻 보면 달려드는 것 같았지만, 니르아는 사람을 보는 순간 공포를 불러오는 기괴한 감각을 먼저 흩뿌린다. 하지만 이것은 그러지 않았다.

“크기는 제법 크지만 보아하니 고작 하급이야! 다들 겁먹지 말고, 빨간색 핵을 공격해! 지난겨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대낮의 이변에 잠시 놀랐던 기사들도 시온의 격려에 전투 대형을 취했다. 시온 또한 조금 안도했는지, 그는 손을 들어 힘을 방출했다. 빛을 다루는 실드라스는 상대적으로 니르아를 죽이는 것이 쉬웠다. 허공을 채우는 강한 빛은 오직 목표로 삼은 대상에게만 강렬한 열기를 머금은 파장이 되어, 그것을 태웠다.

키익, 키이익!

거대한 빛줄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처럼 니르아를 덮쳤다. 마치 태양의 계시처럼 보이는 아름다운 광경과 달리 시온의 힘은 파괴적이었다.

새카만 잿가루가 피어오르며 삽시간에 사라지는 니르아의 모습에 기사들이 우와아, 감탄사를 내질렀다. 시온이 한결 당당해진 표정으로 세이아드를 보았다.

“대공이 나설 필요도 없겠네요. 대낮의 그림자는 보잘것없이 약하니, 대공의 힘도 평소보다는 약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모두 처리하겠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착각이지만 세이아드는 그를 정정하는 대신 숲 안을 살폈다. 그림자가 바퀴벌레처럼 사삭, 모여 다가오고 있었다.

“시온, 뒤는 우리가 보고 있으니 앞을 봐.”

스텔라의 경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을 향해 니르아들이 쏟아져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앞서 나타난 니르아처럼, 그것들은 두려움을 조장하는 대신 그들을 스쳐 갈 듯 굴었다.

‘이상하군.’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가는 것 같은데.

세이아드의 표정을 살피던 스텔라는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어왔다.

“괜찮아?”

“스텔라, 전투가 벌어지면 너는 노바와 세실리아를 도와. 둘 다 경험이 없으니 둘과 함께 기사들을 통제해.”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나쁘진 않은걸. 저기 있는 것들은 죄다 하급 니르아야.”

스텔라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부자연스러운 공포에 신체가 보이는 반응은, 상급 니르아를 만날 때에나 벌어지는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모두 느꼈는지 잠시 경쾌하던 공기가 싹 조용해졌다. 시온은 또한 세검을 뽑아든 채 우두커니 서서 앞을 보았다.

검은 그림자들이 숲을 덮기 시작했다. 잠들어 있어야 할 니르아들은 작고 큰 것을 가릴 것 없이 기고 뛰어 앞으로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저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몸집의 그림자가 따르고 있었다.

니르아가 이렇게 한 몸처럼 움직인 적은 없었는데….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니르아를 쫓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물소의 몸통을 지니고 돼지의 다리를 달고 있었으며, 기괴하게 뻗은 긴 목 끝에는 멧돼지의 머리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르아의 약점인 붉은 핵을 전신에 빼곡히 채운 상태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끔찍한 몰골에 세이아드도 잠시 할 말을 잃은 그 찰나, 괴물은 커다란 입을 벌리더니, 앞서가던 니르아들을 한입에 삼켜 버렸다.

“저게, 대체….”

시온이 멍하니 중얼거리며 살짝 뒤로 물러섰다. 키에에엑, 하는 니르아의 비명이 삽시간에 사방을 채웠다. 뒤에서 제 동족이 먹히는 걸 본 니르아들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 왔고,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당도했다.

느릿하게 니르아들을 사냥하던 거대한 괴물의 머리도 곧 인간을 발견했다. 그것의 몸에 박힌 수백 개의 붉은 핵이 반짝였다.

“멍하니 있지 말고 지휘를 하란 말이다, 실드라스!”

그리고 세이아드의 외침과 함께, 괴물이 명백히 ‘인간’들을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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