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몸 상태는 어느 때보다 양호했음에도 세이아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등허리에 레사스의 손자국이 화상 자국처럼 남은 것같이 거슬렸고, 입술은 자꾸만 간질거렸다. 변성기가 오기도 전, 까마득한 아이 시절부터 보아 온 존재가 자신을 성애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 지금처럼 와 닿은 찰나가 없었다.
고백을 받고서도 여러 일이 있었으니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잘도 몸을 내준다 지껄였지만, 막상 돌아와 되새기니 세이아드는 그와 맺게 될 정화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극이 지나쳤다. 그게 문제였다.
왜?
어린것이 자라 성년이 되는 것은 세상의 이치나, 그렇다고 하여 동생으로 여겼던 존재에게 자극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스물다섯의 레사스도 아닌 스물하나의 레사스다. 지금의 그에게는 근 열 살이 어린 청년에게 어제처럼 휘둘린 것이 곤혹스러웠다.
다 레사스의 능력 때문이다. 그의 힘이 이렇듯 혼란을 주었을 거다.
세이아드는 결국 괜찮은 이유를 찾아냈다. 레사스의 정화 능력은 아스테르보다도 월등하니, 그와의 입맞춤보다 강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세이아드는 비로소 어머니가 제게 하던 충고를 뼈저리게 체감했다. 가이드가 주는 황홀함을 경계하고,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던 말이 바로 이런 상황에 속하는 거였다. 아스테르와는 거리를 잘 지켜 왔다고 여겼던 게 무색하게끔 세이아드는 자신이 밤새 레사스와의 입맞춤을 생각했다는 것에 경계심이 들었다.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이아드는 절 붙들어 오던 레사스의 손이 지나칠 정도로 간절하고, 다급하며, 애가 탔다는 걸 상기했다. 살면서 겪은 어떤 입맞춤보다도 레사스의 접촉은 그를 삼키고 태워 버릴 정도로 열망이 강했다. 마치 태양 같았다. 차분하고 잔잔해 보이는 달같던 이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게 마음을 혼잡하게 만들었다.
끊임없이 어제를 회상하는 늪에 빠진 것 같았던 세이아드의 의식은, 숲의 경계에 합류하는 다른 이들로 인해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흠칫 말고삐를 세게 쥐며 자세를 바로 하자 루나가 푸르르, 하는 소리를 냈다. 주인이 이상하게 구는 걸 루나 또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고향에 와서 그런가, 간만에 푹 잤어. 그러고 보니 전하를 뵙게 된 곳도 이곳이었지, 리그다?”
워낙 경쾌하고 큰 목소리라 그런지 시선이 후방으로 쏠렸다. 흘끗 살피니 레사스의 기사단이 앞서 오고 있었다. 바인인가 하는 정신 사나운 기사의 말에, 지난번 세이아드에게 대련을 청했던 리그다라는 기사가 그의 허리를 퍽 쳤다.
“좀 조용히 해.”
다들 들을 수 있을 법한 대화 소리라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아스테르의 기사들이 뒤를 보았다. 푸른 달의 기사단장인 아데나가 경멸어린 눈빛으로 레사스의 기사들을 보더니 그의 수하들에게 명하는 게 들렸다.
“천박한 것들에게 물들지 않게끔 조심하거라. 이번 토벌에서 반드시 주군을 위한 공을 세워 저것들이 분수를 알게끔 하자.”
모두가 귀족의 피를 이은 기사단답게, 기사들은 아데나의 말에 동의했다. 지난 혹한기까지만 해도 외려 무시하면 무시했지 레사스를 적대하진 않았던 이들이나, 국왕의 발언 이후 다들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레사스와 관련된 이들을 보면 부아가 치밀 테니 이해할 법했다. 아스테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 꼬인 행동을 할지 몰랐다.
다행히, 그는 실드라스 영지에서 나온 기사들이 미리 차려 둔 막사로 들어가 있었다. 가이드의 안전은 토벌에서 가장 중요하니, 그들을 보호하는 체계가 먼저 구축된 후에야 토벌이 가능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주둔지 또한 점차 숲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는 탓에, 사실 기사들의 반은 니르아와 대치 가능한 인력이 아닌 호위 인력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레사스의 막사는 그의 기사들이 알아서 만들었겠지만, 이제 레사스는 명백한 왕국의 새로운 빛이었다. 더군다나 레사스의 오랜 우호 지역인 실드라스에 온 탓에, 그의 막사는 아스테르의 것과 다를 바 없이 크고 단단해 보였다.
그걸 보자 내내 번잡하던 머리가 차가워졌다. 레사스는 그에게 원한다면 시온의 목숨을 내어주겠다 약조했고, 세이아드의 예고에도 반박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를 살리길 원하는 자였다. 짧고 강렬히 작렬하다 사그라드는 불처럼, 저와의 욕구가 채워지면 언제고 시온을 택할지 모르는 존재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깟 사랑놀이를 흉내 내는 모습을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세이아드는 다정한 말에 의지하다 결국에는 아스테르의 도구로 생을 마감했으니, 가이드에게는 절대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세실, 위험한 상황이 아니고선 능력은 최대한 쓰지 말거라. 일단은 니르아를 보고 그것들을 극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세이아드는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개개인의 감정은 그가 처리할 일에 도움되지 않는다. 하찮은 방해물일 뿐이다. 불편한 눈으로 레사스의 막사를 살피던 세실리아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사랑스러운 누이는 꼭 들어야 하는 말에는 어려서부터 곧잘 수긍하곤 했었다.
“알겠어. 난 전투 경험이 없으니까, 이번에는 최대한 빠르게 배우는 걸 목표로 할게.”
“니르아를 상대해 본 적 없는 건 노바도 마찬가지니, 너는 그녀와 후방에 있게 될 거다.”
“노바 브레드히트?”
세실리아가 눈을 찡그렸다. 명백한 불쾌감의 표시였다.
“브레드히트 공작의 딸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아, 오빠. 서쪽의 공작은 진실을 물을 생각조차 없이 동료인 어머니를 저버리고 실드라스를 도왔던 자야.”
세실리아의 분노하는 검은 눈 너머로 자신이 반사되어 비쳤다. 세이아드는 그녀와 다름없는 저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배척했다.
부모의 죄가 자식의 죄가 되는 세상이니, 프로시어스의 이름을 단 그들이 당한 일만큼이나 저들을 미워하는 것도 어쩌면 지당한 일이다. 세이아드의 마음도 종종 그 어두운 욕구를 향해 방향을 틀려는 순간이 많았다. 그걸 따랐더라면 그는 진작 시온 실드라스의 목을 치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세실리아, 어머니가 원했던 것은 이 나라를 지키는 거였다. 나는 누구보다도 네 마음을 이해하지만,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공동의 적을 없애는 일임을 잊지 말거라.”
그렇지 않다면 실드라스와 다를 게 없다. 자신의 사욕을 위해 동료를 저버리고 배반한 그의 죄를 짚으려면, 적어도 그와는 다르게 굴어야 했다. 세이아드는 뒤늦게 그걸 깨달았다. 복수를 위해 나아가던 자신의 손으로 죄 없는 이들을 죽게 만든 후에야 말이다.
“그럴 가치도 없는 이들에게 마음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해? 나의 의무는 같잖은 친목 없이도 가능해. 내가 할 일은 반드시 해낼 거야.”
세실리아는 그가 사로잡혀 있던 복수와 분노에 막 삼켜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아스테르와 세실리아가 만난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이아드처럼 평생을 그와 함께해 온 상황이 아니니 아직은 세실리아를 저와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게끔 할 날이 남아 있었다.
“내 말은 그들을 배려하는 게 아니다. 직접 부딪혀서 잘못을 깨닫게 하라는 뜻이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사람들은 소리 내어 말하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러니 말하지 않은 사실은 더욱 믿지 않겠지. 브레드히트 공녀가 제 아버지처럼 군다면 너는 상대가 틀렸음을 확실히 알게 해야 해.”
퀼리가 말했듯이, 소문에 휘둘려 진실보다 쉬운 길을 택하는 이가 있다면 부딪혀야 한다는 걸 그는 지난겨울 알게 되었다. 셀피니 베트리아를 향한 분노는 진실로 죄를 인정하고 죽음을 각오한 그 모습을 통해 소강되었다. 혼자 품은 분노는 영원히 몸집을 불리기만 할 뿐, 결코 사라지거나 해소되지 않는다.
결국 그가 원했던 것은 그를 끊임없이 불태우는 푸른 지옥의 불꽃이었으므로, 그걸 없애기 위해선 분노를 드러내야만 했던 것이다.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치열하게 싸워야 했고, 받아들인다면 그 사실로부터 다시 현실을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는 꼴을 보고 생각해 볼게.”
그리 말한 세실리아는 방금의 대화가 심란한지, 입을 다물고 말고삐를 틀었다.
사이프리드 라만 솔리아스의 치하 아래 처음으로, 숲의 ‘토벌’이 공식적으로 시작함을 알리는 깃발이 펄럭였다. 태양이 그려진 붉은 깃발이 막사 위로 펄럭였고, 경계의 저 멀리서 구경을 나온 군중들이 점처럼 보였다.
“오늘 그대들의 행보는 앞으로의 솔리아스를 결정할 중요한 일이다. 별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부디 무탈한 토벌이 되기를 기원하지.”
아스테르는 의식이나 행정에 있어서는 상당히 간결한 편이었다. 손속이 가혹하지만 그만큼 뒤처리가 깔끔했고, 후환을 만드는 여지를 주지 않아 그런 면을 따르는 기사도 많았다. 푸른 달의 기사단이 발을 굴러 그의 말에 화답했다.
익숙하고 권태로운 얼굴로 사방을 살피던 아스테르는 그의 바로 앞에 서 있는 티테르들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무료함을 지우며 푸른 눈을 화려하게 휘었다. 샐쭉 접힌 눈이 세이아드를 담았다.
“나의 별이 책임지고 이 토벌을 성공으로 이끌 것이다. 그대는 이곳의 누구보다도 의무에 충실하니까.”
시온 실드라스가 헛웃음을 내뱉는 게 옆에서 들렸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세실리아의 눈이 순간 살기로 물들었다. 아스테르 또한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그는 능청스러운 미소와 함께 세실리아의 손을 잡았다.
“프로시어스의 이름을 밝힐 기회다, 세실리아.”
정화를 베풀기 위해 아스테르가 손등을 당겼다. 토벌을 앞둔 상황의 정화는 세이아드가 함부로 제지할 수 없는 것이라 순간적으로 이를 악무는 차, 아스테르의 옆에서 침묵하던 레사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토벌의 책임자는 형님뿐만이 아니니, 그쯤 하시지요.”
아스테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낯을 유지하며 받아쳤다.
“경험이 미천하여 모르겠지만, 토벌을 위한 정화 의식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굳이 만져야만 정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신기하여 미처 몰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레사스 또한, 아스테르 못지 않게 아름다운 미소를 얼굴 위로 그리며 차분히 대꾸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스테르의 웃는 낯에 일순 희미하게 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