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67화 (67/147)

#67

“막 호수에서 나왔으니까요.”

나체를 보이는 것은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 외에는 세이아드에게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애당초 그는 무언가를 걸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잠을 잘 때도 아무것도 입지 않는 걸 선호했다.

더군다나 레사스는 같은 남자다. 동성의 몸을 보고 저리 반응하는 것은 다소 유별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그는 뒤늦게 레사스가 자신에게 욕정을 느낀다고 고백했음을 떠올렸다. 정화로 인해 부득이하게 아스테르에게 끌렸던 때를 제외하면 남성에게 욕망을 느낀 적은 없었던지라, 세이아드는 다소 느리게 이 사실을 자각했다.

흠.

그런 것 치더라도 과한 반응이다. 저 자신이 여성을 처음 안던 시기에도 저리 굴진 않았다. 설마 싶으면서도 한번 확인해 보기 위해 세이아드는 무언갈 걸치는 대신 레사스에게로 더 가까워졌다. 맨발이 부드러운 풀잎을 밟는 소리가 울리자 레사스가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손은 내리시지요. 고작해야 같은 사내의 몸입니다. 아니면 완전히 아물지 않은 흉터들이 역겨우신 겁니까?”

아스테르의 치유력은 무척이나 뛰어나 어지간한 부상을 치료하긴 하지만, 간혹 니르아에게 크게 당한 상처는 흉으로 남았다. 그의 흉터는 대부분 싸우는 법을 혼자 익혀야 했던 몇 년 전에 생겼다. 중급 니르아 여럿을 한 번에 상대하며 등이나 복부를 꿰뚫렸던 시기가 꽤 있었다. 회색의 거미줄처럼 등과 복부에 남은 흉은 보기에 썩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가슴의 관통상이 존재하지 않는 점인가.

세이아드는 무심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짧게 훑었다. 갈비뼈를 가르고 심장을 꿰뚫은 레사스의 검이 남긴 흉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주는 미묘한 괴리감에 세이아드가 침묵하는 동시에 레사스가 손을 내리더니, 표정을 굳히고 그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성마른 손길로 자신이 걸친 망토를 벗어 세이아드의 몸에 걸쳤다. 손짓은 조급했으나 그의 몸에 천을 둘러 주는 힘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꼭 약한 걸 감싸는 듯한 행동이 껄끄러웠다. 누가 누굴 이렇게 다루는지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다. 애당초 그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 없었다.

“나는 대공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린 소년이 아니라, 그대를 은애하는 남자입니다.”

낮게 잠긴 음성이 꼭 쇳소리처럼 들렸다. 부드러운 중저음이 지금같이 깔리고 잠길 수 있다는 게 기이할 정도였다. 귓가를 간질이며 파고든 목소리에는 아주 명백한 욕망이 느껴졌기에, 세이아드는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가린 망토를 벗으려던 동작을 흠칫, 멈췄다.

“좋아하는 사람이, 지금 같은 모습을 하면, 나는, 당연히….”

그를 가리는 것처럼 앞에 선 레사스의 가슴팍이 크게 들썩였다. 너른 어깨 아래의 흉통이 부풀었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꾹 참았다가 내뱉는 숨결이 갑작스레 의식되었다. 그러니까, 눈앞의 이 어린 왕자가, 자신을….

“제게 품은 것이 욕망이 아니라고 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머릿속이 삽시간에 꼬이며 기분이 묘해졌다. 소름이 살짝 돋아 오며 등허리에 기이한 전율이 일었다. 그 감각이 부담스러워 세이아드는 일부러 반론을 꺼냈다. 그러자 낮게 탄식한 레사스가 어딘가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이유만으로 대공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멀쩡한 사내인 이상 연모하는 이의 이런 모습에 반응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자세히 들어 보니 굉장히 참는 듯한 기색이었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목젖이 크게 움직이는 것을 의도치 않게 보았다. 안긴 것처럼 가까운 거리인 탓에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마저도 생생했다.

“아쉽게도 대공, 나는 지나치게 건장한 사내인지라….”

레사스가 한마디, 한마디를 읊을 때마다 그의 소리가 차차 잠겼다. 호수 속으로 점점 깊게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그대의 모든 것을 당장이라도 맛보고 싶은 욕망을 죽을힘을 다해 참고 있습니다.”

뜨겁고, 절절 끓는 호수에 빠진 것처럼 전신에 일순 열기가 올랐다. 저보다 한참 어린, 고작 스물하나로 들어선 청년에게 휩쓸릴 것 같은 불안함에 세이아드는 내내 피하던 시선을 들었다.

스르륵 흘러내리는 망토에서 레사스 특유의 아늑한 체취가 묻어났다. 그런 감각마저도 피부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게 해, 세이아드는 일부러 그걸 벗었다. 거의 흘러내린 망토가 아슬아슬하게 팔뚝에 걸쳐졌다. 그는 휘둘리기 싫어 레사스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어차피 전하께 내어 드린 몸입니다. 굳이 참을 필요가 있습니까? 편할 때 쓰시라고 있는 것이 접니다.”

몸을 섞을 결심은 진즉에 했다. 정화의 과정에서 언젠가는 생길 일을 지금 한다고 여기면 거북하거나 부담될 것도 없었다. 몸을 쓰고 그가 원하는 걸 얻는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래였으니, 세이아드는 언제고 레사스에게 거래의 조건을 바칠 용의가 있었다. 어차피 그와 닿는 찰나가 정화가 될 테니, 세이아드 또한 손해는 아니었다.

여자든 남자든 만족시키는 것은 결국 비슷할 터. 성교의 방법은 각성한 이래 의무적으로 배워 왔으니 머릿속에 꿰고 있다. 그러니 분명 어렵지는 않….

“나는 대공의 모든 무례함을 기꺼이 삼킬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아픈 말만큼은 내버려 둘 수가 없네요.”

마주친 레사스의 보라색 눈이 일순 형형하게 물든다 싶더니, 곧이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슬아슬하게 망토가 걸쳐진 몸을 꽉 붙든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뺨을 감쌌다. 언제나 밤하늘 같던 눈동자가 여명의 빛을 띤 것 같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입술 위로 뜨거운 열기가 퍼졌다.

숨이 막혔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다급히 맞물린 입술이 뜨겁게 엉켰다. 부드러운 살덩이가 녹아내려 서로 달라붙은 것처럼 느껴졌다. 말캉한 감각이 입술을 꾸욱 압박하다가, 곧이어 소름 돋을 정도로 기이한 쾌감이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간지러움이 독처럼 전신에 퍼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여 쿵, 쿵 울렸다.

두 번째로 하는 입맞춤은 처음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세이아드를 미치게 했다. 닿자마자 그를 압도하며 퍼지는 레사스의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갑작스레 능숙해진 입맞춤 때문인지, 하나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수도 없이 해 온 것이 입맞춤일 텐데, 지난번 레사스를 마음껏 휘두르고 놀던 것과 달리 세이아드는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밀려드는 그를 겨우 받아내기 급급했다. 고작 혀를 섞고 입술을 비비는 행위인데도, 등허리가 오싹오싹 울렸다. 세이아드는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입술을 떼려 했지만, 레사스가 그걸 제지했다.

망토와 맨살이 겹쳐진 경계를 잡고 있던 레사스의 손이 움직였다. 일부러 세이아드를 꽉 당기는 힘이 어이없을 정도로 억셌다. 거칠게 흔들린 몸 때문에 손이 세이아드의 맨허리를 만졌다.

탄탄한 근육으로 매끈한 굴곡이 진 허리를 레사스의 손이 꾸욱 눌렀다. 물에 젖어 미끄러운 피부를 감싸 안는 손가락이 미끄러져 움푹 파인 척추 쪽을 문지르자, 세이아드는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감각에 기이한 소리를 흘렸다.

“하, 흣…, 아…!”

신음 비슷한 그것은 평소의 제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성교를 할 때 낮게 흘리던 자신의 신음이 아니었다. 낮은 저음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중저음의 약한 소리가 허공에 울리는 동시에, 레사스가 손을 세워 허리를 콱 쥐었다. 그와 동시에 몸이 붙으며 세이아드는 앞섬에 닿는 아주, 명백한, 흥분의 표시를 느꼈다.

결코 넘어갈 수 없는 남성의 증거에 세이아드는 발밑이 쑥 가라앉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목덜미부터 등허리를 타고 오싹한 감각이 그를 훑었다. 소년의 것이라고 더는 치부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였다.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 세이아드가 그를 밀어내려던 차, 레사스가 먼저 입술을 떼며 확 물러섰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딱 그 찰나였다.

숨 막히는 정적이 갈라진 둘의 사이를 채웠다. 레사스가 헐떡이며 몸을 바로 세우는 것이 보였다. 원래도 하늘거리며 이마 위에 내려와 있던 반곱슬의 검은 머리칼이, 밤의 기운 때문인지 유난히 야릇하게 보였다. 달아오른 입술이 어지간한 여자보다 붉었다. 그저 훑는 것만으로 해선 안 될 짓을 한 것 같았다.

세이아드는 고작 이런 키스에 숨이 차올랐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일부러 숨소리를 참았다. 꾸욱 입을 다물며 대신 손을 들어 타액이 투명히 묻은 입술을 훑었다. 그러나 입술 위에 남은 레사스의 감각은 사라지긴커녕 외려 짙어만 졌다. 돌아 버릴 일이었다.

“…원하신다면 이어 가시지요.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세이아드는 일부러 생각나는 대로 뱉었다. 차라리 제 주도하에 몸을 섞는다면 이 미칠 것만 같은 거슬림이 사라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레사스는 그의 말에 충혈된 눈을 내리깔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거절의 말을 뱉었다.

“그대의 마음을 얻기 전에는 그런 짓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흥분한 기색이 너무 역력했지만, 세이아드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괜히 입 밖에 꺼냈다가 상황이 어지러워질 것 같았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전하께 드린 몸이니.”

“그렇다면 나의 아름다운 티테르를 역겹다고 칭하지 마세요. 그것은 나의 몸이고, 나의 눈에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황홀하고 사랑스러우니까요.”

가슴이 턱, 막히며 입술이 딱 닫혔다. 듣는 것만으로도 거북해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몸에 자꾸 열이 올랐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 어서 옷을 입어요. 이건 왕족으로서의 명령입니다.”

레사스는 그리 말하더니 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유독 감정이 동하던 순간보다 더 푸른 핏줄이 돋아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그가 몸을 틀었다. 등 돌린 채로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던 세이아드도 이 자리를 파하고 싶어졌다. 열기로 인해 물기가 마른 덕에 옷을 입는 것은 수월했다.

“그만 과하게 반응하셔도 됩니다. 옷은 입었으니, 용무를 말씀해 주시지요.”

분명 입맞춤은 정화를 하며 셀 수 없이 했던 일인데, 왜 이리 정신이 어지러운지 모를 일이다. 빠르게 그를 피하고 싶어져 사무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긴 길을 왔으니 그대의 몸이 괜찮은지를 알고자 왔던 것뿐입니다. 괜찮은 걸 확인했으니 가 보겠습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불편한 걸음을 한 것에 짜증이 났다. 자신은 티테르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건장하고, 어지간한 상처에도 죽지 않는 괴물을 한낱 가이드가 걱정하는 것이 우스웠다.

“그렇다면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자리를 제법 비웠으니 의심을 사기 전에 돌아가야 하여.”

“그래요.”

레사스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다. 세이아드는 그의 너른 등을 지그시 보다가, 입매를 굳히곤 걸음을 디뎠다. 미련 없이 레사스를 지나쳐 가려던 차, 레사스가 작게 속삭였다.

“앞으로 오늘처럼 못된 말을 한다면, 그때마다 입을 맞출 겁니다. 그게 싫다면 그대를 제발 소중히 여겨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세이아드는 검회색 눈썹 끝을 들어 올리며 냉소적인 답을 뱉었다.

“앞으로는 철저히 언행에 주의하도록 하지요.”

싫다는 기색이 역력한 음성에 레사스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찰나였다. 열기가 가득했던 표정을 지워낸 레사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희미하게 웃으며, 눈썹을 휘었다.

“잘 자요, 나의 달.”

가시돋힌 말을 받고 돌려주는 다정한 인사가 마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세이아드는 끝내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그의 길로 향했다. 어쩌면 답할 수 없었다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작았던 소년이 정말로 장성한 사내가 되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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