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나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닙니다, 대공.”
레사스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작게 속삭였다. 가쁜 숨을 괴롭게 들이켠 그는 세이아드를 하염없이 슬프다는 눈으로 보았다. 무엇이 레사스를 저렇게 비통하게 했는지 알 수가 없어, 세이아드 또한 그를 마주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드러난 의문을 본 레사스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푸른 핏줄이 선 하얀 손이 고운 모양과 달리 거친 동작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그러자 세이아드는 흰 손에 불현듯 시선을 빼앗겼다. 유달리 그가 동요하는 순간이면 손이 자꾸 보인다는 생각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사스는 한참이나 할 말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기다림에 지친 울새가 대신 지저귀고 나서야 말문을 텄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 나의 이름을 그대가 되찾아 준 뒤부터, 나는 그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어요. 보잘것없는 능력으로도 어떻게든 그대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은, 대공이 생각하는 그런 욕망이 아니에요….”
실드라스의 일로 인해 레사스를 크게 껄끄러워하던 마음이 일순 움찔거렸다. 한마디, 한마디 내뱉는 레사스의 모습이 지나칠 정도로 괴로워 보여서 그랬다. 아무것도 아닌 말 하나에 이렇듯 아파하는 것이 성안에서 자란 고운 왕자답다고 여겨졌지만, 동시에 세이아드는 그가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걸 원치는 않았다.
마음은 너무 복잡하게 엉켜 있어, 세이아드 스스로도 뭘 느끼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절 위해 뭐든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시온의 입장을 대변하는 그의 순진함이 참을 수 없이 싫으면서도, 막상 그가 이리 괴로워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나름대로 과거와 달리 회복되어 가고 있던 관계라 그런 것인가.
괴로운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분명 나아지던 관계였다. 레사스에게 조금은 의지할 수 있다고 여기는 찰나 그들을 가를 것처럼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은 이보다는 나은 대화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이아드는 자신이 바뀌려 하는 중임을 상기해 냈다.
예전의 자신은 이 순간마저도 겪지 못했을 것이고, 만약 이런 일을 겪었어도 분명 레사스를 세실리아와 다름없이 쳐 냈을 터.
아스테르를 완전히 믿었던 것처럼 레사스를 완전히 믿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억지로라도 그와의 관계는 망가트려선 안 된다. 세이아드 스스로도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그런 감정이 일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전하를 만족시켜 드리면 되겠습니까.”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다거나, 그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지적을 삼켰다.
대신 레사스가 뭘 원하는지를 다시금 물었다. 레사스는 세이아드의 질문에 입술을 달싹이다가, 냉랭한 표정을 보더니 눈을 꾹 감았다. 잠시간 무언갈 결심하는 듯하던 그가 이내 아까와는 달리 단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몸을 내어주겠다고 했으니, 그래요. 그러세요. 내 옆에 있으면서 내가 시키는 걸 해 주세요.”
결국에는 이 볼 것 없는 몸뚱어리를 원한다는 답을 할 거면서, 앞서 그리 고민하던 것은 무엇인가 싶었다.
“알겠습니다. 다만, 전처럼 드러내어 뵙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왕세자 전하의 티테르여야만 하니까요.”
그리고… 아스테르를 속이기 위해서는 그에게 다시금 정화를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이아드가 완전히 그의 손에 들어갔다고 믿지 않을 터니.
문제는 잘못된 정화를 받았을 때 비틀린 파장이 레사스로 인해 진정될 수 있냐는 거였다. 돌아온 뒤로 그가 기억하는 모든 과거가 조금씩, 혹은 매우 앞당겨져 일어나고 있는 데다가, 그는 지난번 환청마저 들었다. 폭주는 봄이 된 지금으로부터 앞으로 4년 뒤의 일이나, 지금에 와서는 그게 정확한 수순을 따르리라곤 확신해선 안 될 것 같았다.
“형님께 정화를 받고 난 뒤에는 반드시 나를 찾아오세요, 대공.”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레사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점은 의외였다. 레사스는 지난겨울부터 꾸준히 세이아드가 아스테르의 정화를 받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치기어린 승부욕이라고 여기긴 했지만 나름대로 그를 거슬리게 하는 것 같았는데, 레사스의 표정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다만 그대의 몸은 지금 이 시점부터 나의 것이니, 내가 허락한 이상으로는 그대를 내어주지 마세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
미간을 찡그린 세이아드가 그를 지적하려는 차에 레사스가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를 찾아와 처음 정화를 제안하던 그때, 대공은 폭주를 걱정하고 있었죠. 그리고 그 이후에는 영문 모를 폭주가 전대 베트리아 공작에게 일어난 것 또한 기억합니다. 지난겨울 동안 그걸 지켜보며 나 또한 생각을 정리했어요. 어쩌면 형님의 힘에는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레사스가 이런 추리를 하고 있으리라곤 여기지 못했던지라, 세이아드는 잠시 놀란 눈을 했다.
“물론 이것은 나의 추측에 불과할 뿐, 다른 이들에게 입증할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공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였을 때 이것을 떠올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전하께서는 잘못된 정화에 대해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모든 것은 여전히 모호한 추측에 불과하니, 세이아드는 그것을 단정 짓는 대신 레사스에게 간접적으로 물었다.
“솔리아스의 힘은 태양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니, 그 힘을 제대로 이어받았다면 거기엔 티테르에게 해가 되는 어떤 것도 없어야 합니다.”
레사스는 뻔한 답을 했다.
“그것은 티테르나 가이드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레사스는 차분한 눈으로 세이아드를 보다가 덧붙였다.
“제대로 이어받지 않았다면, 그 힘이 태양의 모습을 빌려 어떤 식으로든 티테르에게 해를 가할 수는 있겠지요. 그저 가정일 뿐입니다.”
무언가 잡힐 듯하면서도 안개 속에 있는 듯 흐릿했다. 제대로 이어받지 않은 힘이라는 것은, 아스테르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솔리아스의 건국 시점부터 존재한 메로페 가문의 장녀였던 전대 왕후와 국왕의 장자였다.
유서 깊은 가문의 피가 섞여 나온 이가 아스테르였으니, 다들 그가 한 명 이상의 티테르를 정화할 수 있음이 밝혀졌을 때에도 당연한 결과라 말하곤 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세이아드는 미심쩍은 눈으로 레사스를 보았다. 아스테르의 힘에 문제가 있음은 스스로가 제일 확신하지만, 문득 세실리아가 확신하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왕세자를 비롯한 모든 티테르가 죽고도 레사스만이 살아남은 그 끝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상하기는 했다. 레사스는 분명 강인한 검사이고 가이드이나 니르아를 소멸시키고 혼자 살아남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어딘가 석연찮다.
지금 이 대화가 유독 석연찮았다. 다만 세실리아의 생각처럼 레사스가 나쁜 의도를 가진 걸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기억하던 꿈의 마지막에선, 레사스는 그를 삼키려는 뱀의 형상을 한 거대한 니르아와 대적하고 있어서였다. 폐허가 된 궁에서 레사스는 검을 들고 니르아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뱀의 아가리는 결코 친근한 느낌의 행위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뱀이라….
쿠르투가 말했던 광장에서 나타났던 니르아의 형상이 뱀이었다. 많은 니르아를 상대해 보았으나 세이아드는 한 번도 뱀의 형상을 한 니르아는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뱀은 크기가 큰 짐승이 아니었다. 니르아가 흉내 내는 것은 대개 위협적인 동물이었다.
무심코 흐른 생각은 레사스의 답으로 인해 끊어졌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런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해 왔습니다. 나 자신부터가 잘못된 핏줄이 아닌가, 고민하고 찾아보던 시기가 있었던 건 그대도 알지 않나요.”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랬을 것이다.
세이아드는 사랑받는 존재가 된 레사스를 상당히 오래간 보았으나, 지금의 레사스는 고작 지난겨울 각성을 마쳤다. 모두가 무시하는 존재감 없는 왕자로 산 세월이 아직 그에게는 훨씬 더 길었다.
거슬리는 마음만이 남아 세이아드는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그러자 레사스는 부드러운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흰 손을 세이아드에게로 뻗었다.
“내일부터는 형님의 정화를 받으셔야 하니, 오늘 미리 내게 정화를 받아요.”
그러고 보니 꽤 길게 정화를 받지 않았다. 전투하듯 힘을 쓸 일이 거의 없었기도 했고, 레사스에게 지난번 연이어 정화를 받고 난 뒤로는 생각보다 두통이 일지 않았다. 힘을 외부로 표출해 정화하는 것까지 가능한 정도니 확실히 그 능력의 효과가 뛰어나긴 한 모양이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그와 닿았던 상황이 기억하기 유쾌한 순간이 아니라 망설이는데, 레사스가 먼저 세이아드의 손목을 잡아 왔다.
뼈대가 굵지만 딱히 붙은 살이 없어 다른 부위보단 가는 손목이, 레사스의 큰 손에 다 잡혔다. 살짝 틈이 남을 정도로 생각보다 손이 컸다. 어느새 이만큼 자랐나 싶어 흠칫 손을 보는데, 레사스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는 전부터 저를 잡을 때마다 자꾸만 긴장하고 떨려 했다.
“그대가 나를 아직 보기 싫어하는 걸 이해해요. 그러니 조금만 참아 주세요.”
레사스는 그리 말하며 세이아드의 손목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오목하게 튀어나온 단단한 관절을 다정히 매만지던 엄지가 이내 손목 안쪽의 여린 살을 살살 매만지기 시작했다. 따듯하고 매끈한 엄지가 안쪽을 문지르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만져지는 부위를 통해 기분 좋은 기운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기분은 점차 더 이상해졌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만져진 적이 없어서, 레사스가 자꾸 손목을 살살 만질 때마다 오싹한 감각이 올라왔다. 느껴지는 감각이 지나치게 좋은 이유가 그의 힘 때문인지, 아니면 만지는 동작 때문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이내 간지러움은 참기 어려워질 정도로 세이아드를 자극해, 그의 입술 아래로 낮은 한숨이 새게끔 했다.
…하, 아.
길게 내뱉은 젖은 숨소리에 레사스가 흠칫 만지던 것을 멈췄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보라색 눈이 순간적으로 움찔 굳더니, 세이아드의 손목을 쥔 손에 갑작스레 힘이 들어갔다. 부드러운 깃털 같던 감촉이 삽시간에 남자의 것으로 변했다. 아름다운 외양과 일치하지 않는 강인한 힘이었다.
“형님께는, 손목을 만지게 하지 마세요.”
밤의 하늘처럼 깊게 깔린 목소리로 레사스가 속삭였다. 세이아드는 내심 그를 괴롭히던 간지러움이 사라진 것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대의 입술도 허락하지 말아 주세요.”
“그건….”
대개 아스테르와의 정화는 그런 식으로 끝나던 때가 많아 주저하자, 레사스의 흰 얼굴이 무서워졌다. 앞서 슬퍼하던 처연한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내게 내어준다고 했잖아요, 이드.”
확답을 주지 않으면 보내줄 기세가 아니었어서, 세이아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사스는, 아까 전 그를 창가에서 발견하던 그때와 같이 환한 웃음을 얼굴 위로 띄웠다. 눈을 녹이며 꽃잎을 펼치는 보라색 얼음새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