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64화 (64/147)

#64

4. Ira

찬란한 계절은 언제나 흐름이 빨랐다. 생기가 감도는 봄철의 낮은 그 아름다움을 알고 있듯 빠르게 저물어, 이내 축제 기간의 끝이 다가왔다. 공식적인 행사는 어제를 기점으로 마무리되었고, 내일부터는 국왕이 그리 원하던 토벌이 시작될 것이다.

속이 번잡한 것과는 다르게 세이아드는 겉으로는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누이와 보냈다. 수도에 올라온 적이 거의 없는 세실리아를 데리고 궁을 구경하는 것부터 시작해, 축제를 보러 다녔다. 긴 시간 많이 변했으리라 여겼던 세실리아는 기실 어릴 적과 크게 변하진 않았다. 세실리아는 아직까진 감정을 드러냈다. 아스테르의 정화가 세이아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크게 영향을 끼칠 겨를이 아직 없어서인지 몰라도, 다행히 세실리아는 그녀의 오라버니와 있는 시간을 즐겼다.

“각하, 이 퀼리는 요즘들어 가슴이 미친 듯이 뜁니다.”

세실리아의 긴 은발을 가지런히 빗으로 빗어주고 있던 세이아드가 고개를 틀었다. 바닥에 앉아 세이아드의 무릎에 뺨을 대고 있던 세실리아도 시선을 들어 퀼리를 보았다. 그러고는 세이아드를 대신해 말했다.

“심장병이라도 생겼어, 퀼리?”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습에 상사병이 생기면 몰라도, 아직 심장병이 생길 나이는 아니라서요.”

“의사를 불러줄게.”

세실리아는 그리 말하곤 다시금 세이아드의 무릎에 얼굴을 기댔다. 동생의 흰 귓불을 만져 준 세이아드는 빗질을 마저 이었다. 곧 스텔라와 만나도록 내보낼 시간인지라 그녀의 단장을 마무리짓고 있는 중이었다.

차를 한잔 마시자던 스텔라의 청에 따라 세이아드는 이틀 전 그녀와 잠시 만났다. 베트리아의 이름으로 어머니의 목숨에 대한 빚을 갚겠다는 그녀에게, 세이아드는 세실리아에게 정화에 대한 이야기를 대신 가르쳐 달라 청했다. 가이드와 티테르간의 일은 은밀해지자면 아주 농염해질 수 있기에, 같은 성별인 스텔라가 그에 대해 알려주는 쪽이 나을 것이라 판단해서였다.

‘어지간해서는 입을 맞추는 것도 할 필요 없다고 말해 줘. 왕세자와 최대한 가까워지지 않게끔.’

스텔라는 그의 이상한 요구에도 별말하지 않더니, 이내 하나의 질문을 했다.

‘왕세자 전하의 정화를 최대한 덜 받게 하면 되는거지?’

질문 속에 숨은 뜻이 오묘했다. 어머니인 셀피니와 서신을 주고받았다면 그녀로부터 아스테르의 정화가 이상하다는 걸 전해들었을 가능성도 있을 터. 세이아드는 침묵으로 긍정했고, 스텔라는 흔쾌히 허락했다.

‘내가 잘 말해 둘게. 세실은 내 말을 어려서부터 잘 들었으니까.’

세실리아는 베트리아 영지와 악시드 대공령에서 있던 불화는 알지 못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영주들간의 불화였으니, 그저 막연히 세이아드의 악명이 그들 사이에 영향을 끼쳤으리라고만 여긴 모양이었다. 스텔라를 만나 보라는 말에 세실리아는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 같다며 퍽 기뻐했다.

“두 분이 이렇게 있는 모습을 보니 행복함에 가슴이 뛴다는 뜻이었습니다만. 어찌 산송장을 만드려 하시나요, 세실리아 님!”

“나도 퀼리가 있어서 좋아.”

그리 말하며 세실리아가 잔잔히 웃는 바람에, 퀼리도 덩달아 웃었다. 방 안에 울리는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덤덤한 마음 어딘가가 녹아내렸다. 여전히 상황은 썩 좋지 못하고, 그에게는 할 일이 무수했지만, 죽기 전엔 그의 옆에 없던 이들이 한 장소에 있다는 게 종종 기적같았다. 죽던 그 순간까지 지독히 혼자였기 때문에.

“세실, 약속한 시간이다. 스텔라가 이곳으로 올테니 난 자리를 피해 있지.”

“벌써?”

그리 말한 세실리아가 아쉽다는 듯 무릎에서 고개를 뗐다. 절 올려다보는 검은 눈을 보며 세이아드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막상 만나면 즐겁게 놀걸 안다.”

“스텔라 언니는 언제나 재치 있고 멋있으니까, 응, 기대돼.”

세이아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누이는 잡아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당연하게도 그 손을 잡아 일으켜자 세실리아가 그와 비슷한 은은한 웃음을 지었다.

“이따가 봐.”

그러자 채비를 돕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조심스레 세실리아에게로 다가왔다. 세실리아가 온 뒤로 아스테르가 친히 뽑아 온 그들은 수도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백작가의 둘째들이었다. 세이아드의 악명 때문인지 첫날에는 과하게 두려워하는 티를 내던 그들은 오늘에는 그래도 시선을 스칠 정도로는 극복을 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눈이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시선을 피하긴 하지만.

세이아드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세실리아에게로 숨는 시녀들로부터 무심한 눈길을 뗐다. 체격좋은 장신을 따라 방 안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고, 시녀들은 그의 능력을 의식하는지 그림자로부터 최대한 멀찍이 피했다.

불필요하게 시간을 끄는 대신 세이아드는 방을 나섰다. 배웅을 위해 근처까지 뒤따라온 퀼리가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지금 보셨습니까? 각하께서 세실리아 님께 어찌나 지극정성인지, 그걸 지켜보던 시녀들도 이제는 각하가 다정하고 잘생기셨다며 아주 눈도 못 마주치는 걸요.”

북부에만 처박혀 있던 탓인지 퀼리는 아직 상황 파악을 잘 못했다. 세이아드는 그런 그를 지적해주는 대신 당부만을 남겼다.

“세실리아를 잘 돌보고 있거라.”

“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다치시지 말고요.”

퀼리는 세실리아를 통해 전대 대공의 일을 전해들었다. 세이아드도 아닌 세실리아가, 아스테르의 이름을 빌어 한 말에 퀼리는 그날 세이아드의 앞에 무릎을 끓고 용서를 구했다. 그를 믿지 못했다는 것이 커다란 죄책감을 가져왔는지 그 이후로 퀼리의 태도는 둘만 있을 때면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변했다. 그것이 낯설고 불편해, 세이아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곤 곧 그림자가 진 복도로 사라졌다.

그가 향하는 곳은 레사스의 궁이었다.

아스테르의 눈이 곳곳에 있으니 대놓고 레사스의 궁에 찾아가는 짓은 이제는 할 수 없었다. 레사스의 거처까지 가는 길에는 능력을 이용해 그림자에 숨어드는 쪽이 안전해, 기사나 시종을 대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편이 더 빠르기도 했고.

그림자를 타고 흘러간 그는 이내 중앙궁의 왼쪽에 위치한 레사스의 궁에 도착했다. 순찰을 도는 기사들의 얼굴이 낯익었다. 곳곳을 훑던 세이아드는 재스퍼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티아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레사스가 다시금 거둬 갔다고 했던 것 같은데.

며칠 사이에 세이아드는 티아키를 불러 두 가지 일을 부탁했다. 하나는 세이아드와 가장 비슷한 능력을 지닌 티아키에게 아스테르의 감시를 부탁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실력 좋은 침입자를 실드라스 저택으로 보내 전대 공작의 일과 관련된 모든 걸 조사하라는 지시였다.

여러모로 데세르투스를 이용하고 있으니 레사스와 다시금 접선하는 건 시기상으로 슬슬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정화를 베풀 수 있는 이는 레사스가 유일하니까.

기사들의 눈을 피해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흔적을 찾았다. 연무장을 지나 지난번 방문했던 레사스의 방이 있는 탑으로 가자, 열려 있는 창문이 보였다. 세이아드는 일순 흠칫 멈췄다. 레사스는 어릴 적 하던 것처럼 창을 열고 밖을 보고 있었다. 잘생긴 하얀 얼굴 위로는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살아있는 시체처럼 생기 없는 얼굴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청년의 표정이라 보기에 그는 지나치게 지쳐 보였다. 더는 그를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도.

어딘가를 응시하던 레사스에게 잠시 시선을 뺏겨 있는데, 갑자기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북쪽에서나 들을 법한 울새 울음 소리였다. 인상을 찡그린 세이아드가 위를 보자, 작고 통통한 회색 울새가 세이아드의 그림자 근처를 날아다녔다. 어찌나 잘 먹었는지 배가 터질 것 같이 살이 쪄 있었다.

그러자 동시에, 레사스의 시선이 세이아드가 숨은 그림자로 향했다. 흰색 석상으로 빚어진 조각처럼 생기 없던 얼굴 위로 그와 함께 갑자기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레사스의 보라색 눈이 일순 봄철의 제비꽃처럼 피어오르더니, 대뜸 레사스가 몸을 일으켰다.

설마, 눈치챈 건가?

3층이 훌쩍 넘는 높이의 창턱에 아무렇지도 않게 걸터앉은 레사스는, 뒤이어 주저함이라곤 없이 뛰어내렸다. 긴 시간 단련했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고생한 티가 나지 않는 고운 용모의 왕자가 하는 짓이 꼭 다치려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인가. 세이아드의 몸이 그를 받아내기 위해 마음보다 먼저 반응했다.

“지금, 무슨…!”

세이아드가 그림자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레사스는 어떠한 어려움도 없이 잔디 위에 착지했다. 손쉽게 균형을 잡아 내려온 그는 세이아드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하얗게 핀 얼굴로 그에게 달려왔다.

“이드.”

앞서 보았던 시체같은 표정이 환상인 것처럼, 레사스는 그 누구보다도 기뻐 보이는 얼굴로 그의 앞에 섰다. 그러다 곧 세이아드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지워 내더니, 어떤 감정을 드러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눈으로 얌전히 그에게 말했다.

“나를 봐도 괜찮을 정도로 아픈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을까요?”

레사스는 어릴 적의 그때처럼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간 레사스는 매일같이 방문하고자 하는 요청을 보내 왔으나, 세이아드는 오늘까지 모든 청에 무엄하게도 답하지 않았다. 거절할 핑계조차 만들지 않는 완연한 무시에도 레사스는 다시금 초대를 보내는 걸로 답하곤 했다.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전하의 얼굴을 보는 일은 괴롭겠지요.”

굳은 목소리로 답하자 레사스의 웃는 입꼬리가 살짝 허물어졌다. 그는 부드럽게 휜 눈으로 세이아드를 보다가, 시선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내가 대공이 원하는 일을 해내더라도 그럴까요?”

그대가 뭘 할 수 있다고.

세이아드는, 레사스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것 자체가 상상되지 않았다. 저 어리고 순진한 왕자와는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세이아드의 복수는 스스로 하는 것이 맞았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전하께 바라는 건 따로 있습니다.”

레사스의 내리깐 시선이 세이아드와 정면으로 얽혔다.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리는 레사스에게 세이아드는 곧장 용건을 꺼냈다.

“전하께서는 왕세자가 되어, 확고한 왕위를 승계받으십시오. 저는 아스테르 전하가 왕위를 승계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이번 토벌을 계기로 입지를 공고히 하시고, 세실리아를 그의 티테르가 되지 않게끔 빼내 주십시오.”

그 말을 꺼낸 순간 레사스의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아니, 외려 너무 어두워져 까맣게 변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게끔 차분해진 눈이 세이아드를 빤히 보았다.

“…그대는 형님의 티테르로서 남아 있고 싶어했던 게 아니었나요.”

“굳이 왕세자 전하를 거스를 이유가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럴 이유가 있다는 거군요.”

세이아드는 고민했다. 그러나 세실리아의 정화를 차후 그에게 부탁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아스테르의 약점이 될 정황을 그에게 알려 주는 쪽이 나았다. 왕가의 일이나 정화에 대한 것은 레사스가 접근하기 훨씬 수월할 터니, 정화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만 한다면 외려 그가 알아내는 쪽이 빠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레사스가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기꺼이 따를 준비가 되었을 때, 그때 패를 쥐여 줘야 한다.

“이유를 듣고 싶으시다면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왕세자가 되십시오. 전하를 이 왕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드릴 터니, 그 뒤에 제가 실드라스와 어떤 식으로 싸우든 전하께서는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그저 방관하시면 됩니다. 전하께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레사스는 더러운 어떤 일에도 손을 대지 않을 것이고, 티테르간의 균열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국왕의 의지와도 맞으니, 레사스가 손해 보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레사스는 그런 제안에도 기뻐하지 않고, 다만 씁쓰름한 웃음을 띠었다. 그들의 주변을 날아다니는 울새에게로 잠시 시선을 준 레사스는 의외로 몇 분간을 침묵했다.

울새는 레사스의 머리 위를 빙빙 돌더니, 갑작스레 방향을 틀어 세이아드의 어깨에 앉았다. 뻔뻔하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레 자리를 잡는 꼴이 이상하리만치 익숙해 보였다. 기이한 점은 세이아드 또한 새가 제 어깨에 앉는 행위에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레사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 광경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면…, 네. 왕세자가 되겠습니다. 시온의 일도 마찬가지예요. 그대가 원하는 것이 그의 죽음이라면 죽음을, 가문의 멸족이라면 멸족을, 뭐든, 아주 조금만 시간을 준다면 기꺼이 들어주지요.”

덤덤히 읊조리는 레사스의 말에는 그가 원하는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세이아드는 저 모습과 저 내용이 레사스에게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빚을 진 기분이 들었다.

“그냥 요구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말했던 것을 저또한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레사스의 시선이 세이아드에게로 고정되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빤히 그를 보는 레사스의 얼굴 위로 묘한 기대감 같은 게 떠오른 것 같기도 했다.

“전하의 티테르가 되어 달라고 하셨죠. 그 약조를 지키겠습니다. 하나 그것은 다른 도움에 대한 대가이니, 원하신다면 전하의 놀이 상대가 되어드리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절 좋아한다고 하셨지요. 필요하다면 몸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애당초 그가 느끼는 감정 자체가 욕정으로부터 일어난 착각일터니, 결국 좋아하는 마음을 충족시키는 건 정화를 핑계 삼아 몸을 섞는 일이 될 게 분명했다. 굳이 가이드와는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나 세이아드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세이아드와는 달리, 레사스의 반응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레사스의 보라색 눈이 크게 뜨이고, 긴 속눈썹이 처량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고운 눈가가 발긋하게 달아오르더니 그는 마치 칼에 찔린 사람처럼 괴로운 표정을 했다. 곱고 하얀 미간이 일그러지며 그의 분홍빛 입술이 희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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