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너는 각성한 이래부터 나의 것이었음에도, 언제나 그 역겨운 버러지를 돌보러 다녔지. 궁을 찾아와 내게 그 예쁜 웃음을 보이는 대신 보잘것없는 쓰레기에게 네 웃음을 낭비했어. 그리고 또다시 지금, 너의 주인을 저버리고 머저리에게 돌아가려고 하는 걸 모를 줄 알았나?”
그리 말하는 아스테르의 음색에 은은한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무슨 변덕이 불어 나의 정화를 거부하나 했더니, 요즘 들어 그 잡것을 자주 방문하고 있더군. 며칠 전의 무도회에서도 내가 건넨 선물에 더러운 흔적을 묻혔지. 그놈이 보낸 흰 손수건을 구태여 가슴에 매단 걸 보고도 인내했어. 그런데 너는 지금 이 순간까지 끝내 나를 시험하는군.”
이게 대체….
아스테르가 이렇게 구는 건 본 적 없다. 그는 항시 여유로운 사람이었고, 아쉬울 것 없이 웃으면 웃었지 절제되지 못한 면을 내비치진 않았다. 레사스를 모욕하거나 그의 적을 죽일 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 아스테르 아니었던가.
내가, 누군가를 제대로 알긴 했었나?
아연한 기분과 함께 세이아드는 막막한 벽에 부딪혔다. 과거로 되돌아와 다시금 기회를 얻게 된 그 찰나엔 무언가 수월해질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날을 거듭하고 그의 행동이 바뀔수록 사람들은 세이아드가 알지 못했던 면모를 드러내며 예상할 수 없는 반응을 했다. 오래 보아 왔으니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한 이들이 모두.
지금만 해도 그렇다.
아스테르가 어릴 적부터 저와 레사스를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곤 짐작조차 못했다. 그의 말에 묻어나는 세이아드의 행동은 마치 레사스에게 어떤 마음을 품은 것처럼 느껴졌고, 동시에 그걸 지적하는 아스테르의 모습 또한 질투를 하는 것처럼 비쳐졌다.
그래도 아스테르의 이 같은 속내는 외려 레사스의 고백보다는 이해할 법했다. 그와 저는 긴 시간 정화를 주고받은 사이고, 아스테르는 자신의 것에 대한 욕심이 확실한 남자였으니 이리 구는 것이 외려 그답다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세이아드가 파악할 수 있는 일부는 그에게 남아 있었다.
“너는 내 것이다, 세이아드. 내가 아닌 이에게 너의 존재 한 자락도 내어줄 수 없어.”
집착어린 음성이 단호하게 선고하자, 세이아드는 이상한 안도감마저 느꼈다. 아스테르가 절 그의 물건으로 여기고 있다면 저렇게 구는 것이 차라리 당연하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목줄을 끊은 개가 그의 심기를 거스른 거겠지.
“전하께서는 제 어떤 것도 강제하실 수 없습니다.”
아스테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다. 왕세자라는 불필요한 적을 만들게 된다면 숲을 없애겠다는 그의 목적에 방해될 수 있어 최대한 침묵하려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은 마찰을 결국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레사스를 위해 움직이겠다, 이건가?”
아스테르가 비틀린 입매를 만들며 나긋하게 물었다. 레사스의 언급에 세이아드의 마음도 잠시간 무거워졌다. 하지만 세실리아가 언급한 어머니의 일이 여전히 세이아드를 괴롭게 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뜻 레사스의 옆에 있고 싶진 않았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저는 저 자신을 위해 움직이겠다는 뜻입니다.”
복수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머니의 일과 직접적으로 엮인 이에게는 죽음을, 그와 얽힌 이에게도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지만…. 사적인 분노를 따라 움직이기 이전에 그는 폭주를 막고, 니르아로부터 이 땅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니 레사스를 적으로 돌리진 못한다.
“과거의 너는 그렇지 않았어. 나를 위해 움직였지.”
“제 의무는 전하와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지만, 전하의 개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정녕 저를 소중하게 여기셨다면 저를 그리 취급하셨어는 안 됩니다.”
아스테르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처음부터 그리 굴었던가, 이드? 너는 나를 위해 움직이는 듯하면서도 항상 전부를 내어주지 않았어. 너를 정화하고 안식을 베풀겠다는 말에도 늘 거리를 두고 거절하던 걸 잊었나? 언제나 최소한의 안식만을 얻은 뒤 너는 쓸모가 다했다는 듯 나를 밀어냈다.”
아스테르의 단어 하나하나에 일렁이는 욕망이 일순 선명히 느껴졌다. 그것이 낯설었다. 전생을 통틀어 언제나, 아스테르는 그에게 이같은 것을 강요하거나 토로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정화의 목적을 분명히 이해했고 그게 수단임을 확실히 알았다.
“정화는 정화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더 효율적인 정화를 위해 필요한 일을 왜 거부했는지 모르겠군. 고작 몸을 섞는 것뿐인데? 그대의 행동은 보고 있자면 마치 전대 대공이 나의 아버지께 하던 것과 흡사해.”
그의 말대로, 정화는 오로지 티테르를 안정시키고 그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닿고, 만지고, 서로의 입술을 깨물며, 더 나아가 가장 은밀한 순간을 내어주는 것마저 모두 공적인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지내 왔다. 그러니 아스테르의 말처럼 그와 몸을 섞는 것은 쉬운 일임이 분명함에도, 세이아드는 그것만큼은 하기가 어려웠다. 스쳐 가는 누군가에게 욕정을 푸는 일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머니의 조언만이 아니더라도, 이상하리만치 그냥, 아스테르와 얽히는 것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모호한 마음이었다. 세이아드는 표정을 일부러 더욱 없애며 아스테르에게 묵묵히 대꾸했다.
“그 정도의 정화가 필요한 적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은 둘 다 알았다. 아스테르는 하하, 낮게 웃더니 다시금 평소와 같은 시원스러운 미소를 얼굴 위로 씌웠다.
“긴 시간 티테르로 활약한 대공보다도 갓 티테르가 된 세실리아가 사리 분별이 확실하군.”
갑자기 언급된 동생의 이름에 세이아드의 회색 눈이 차가워졌다. 세이아드는 제 팔을 붙든 아스테르를 역으로 당기며 그의 코앞에 다가갔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살벌하게 낮아진 세이아드의 목소리는 맹수의 것처럼 사나웠다. 두려움 대신 기쁨을 내비친 아스테르가 웃음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글쎄, 정화의 순간은 가이드와 티테르의 일이니 그대에게 내 입으로 말하긴 어렵군. 세실리아에게 직접 듣는 게 어떤가, 이드?”
“세실리아에게 무슨 짓을…!”
“쉿.”
세이아드의 입술을 아스테르가 손가락 끝으로 막았다.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손의 감촉은 과거와 달리 소름이 돋아, 그걸 쳐 내려는 찰나 아스테르가 말로 저지했다.
“내 귀여운 별이 날뛰는 것은 언제 보아도 귀엽지만, 오늘의 무례는 이쯤에서 그만둬. 나는 왕국의 태양이며 그대들은 한낱 별임을 잊지 말거라. 우리의 아량 없이는 끝내 짐승보다 못한 폭주로 끝을 맞이하는 건 그대들이니.”
다정한 경고가 한마디 더 붙었다.
“그 비참한 끝을 그대의 누이에게 선사하고 싶지 않다면,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거야. 너는 나의 충실한 티테르로서, 내가 왕좌에 오르기까지 나를 보필해야 해.”
아스테르는 그 말을 끝으로 세이아드의 팔을 쥔 손을 놓았다. 부드럽게 떨어져 나간 손을 들어 허공에 살랑인 그가 눈을 휘어 웃었다. 무척이나 즐거운 듯한 기색으로 그는 세이아드의 분노어린 얼굴을 다정히도 살폈다.
“그럼 오늘은 그대의 누이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게, 나의 별. 말하는 순간마다 나를 떠올릴 거라고 상상하니 기쁘기 그지없어.”
아스테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이아드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 세실리아가 아스테르에게 청한 ‘도움’이 그가 생각한 것이 아니길 한시라도 빨리 확인해야 했다. 등 뒤에서 아스테르의 웃음소리가 잔잔히 퍼졌다. 세이아드가 보여 준 무엄한 짓마저도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게 기쁘다는 듯이.
다급히 거처로 돌아와 방문을 열자, 세실리아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창가에 기대 있었다. 불길한 예감과 아스테르에 대한 환멸로 혼잡하던 마음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잠시 가라앉았다. 잔잔한 바람에 살짝 흐트러지고 가라앉는 긴 은발과, 차분히 저를 응시하는 검은 눈이 지독한 그리움을 불러 왔다.
다 잃어버려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가족이 제 앞에 실재하고 있었다. 영영 보지 못하리라 여겼던 소중한 동생이.
“이야기는 잘 끝냈어? 오빠가 화를 내면 무척 무서우니 왕세자님이 놀라셨을 텐데.”
언제나 떼쓰는 어린아이였던 세실리아는 다 큰 어른의 모습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물론 그의 눈에는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녀의 면모가 보였으나, 그럼에도 세이아드가 기억하는 어린 소녀는 이제 없었다.
천천히 세실리아에게로 걸어가자 그녀의 눈가에 희미한 슬픔이 어렸다. 시간의 공백 때문인지 낯설고 어색해하는 게 보였지만, 세실리아는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그녀는 얌전히 세이아드를 기다리다 그가 다가오자 작게 말했다.
“오빠를 긴 시간 혼자 둬서 미안해.”
“…지나간 일이니 괜찮다.”
“아니야. 지금의 우리를 이루는 일이니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해. 오빠, 나는….”
세실리아는 심호흡을 하더니 세이아드의 두 손을 조심스레 잡아 왔다. 곱고 하얀 손가락이 조심스레 세이아드의 거칠고 단단한 손을 매만졌다.
“무서웠어. 엄청나게 무서웠어. 누구보다 강한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우리를 두고 세상을 등진 뒤, 텅 비어 버린 성에 혼자 있는 걸 버티지 못했어. 어머니가 말하는 티테르의 의무고 뭐고, 오빠가 그저 내 옆에 있어 주길 원했어. 세상이 너무 싫어서 나는 그걸 피해 도망가는 걸 바랐던 거야.”
세실리아의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손끝을 조심스레 감싸며 세이아드는 자신의 체온이 다른 이들처럼 따스하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레사스의 체온처럼 따듯하고 다정했더라면, 세실리아의 손을 금세 녹여 줬을 텐데.
“난 오빠가 그저 화를 낼 곳이 필요하다고 여겼어. 그리고 티테르를 싫어하는 왕가의 일원에게 충성하는 것도 싫었어. 하지만 이제 보니 다 나의 오해였던 거야. 왕세자님께서는 우리 가문을 멸문으로부터 막아 주신 데다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실드라스를 무너뜨릴 준비도 하고 계셨어.”
점점 분노하는 세실리아의 기분을 따라, 일순 그녀의 눈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세이아드 자신이 능력을 쓰거나 크게 노할 때면 보이는 힘의 파장이 동시에 확 솟구쳤다. 생전에는 본 적 없던 모습이었다.
“세실리아.”
세이아드는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지금 그의 살갗을 뾰족이 찌르는 이 기운은 분명, 티테르가 힘을 쓸 때면 느껴지는 파장이었다.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세실리아의 능력은 다룰 수 없는 예지다. 그녀의 힘은 통제할 수 없으며 아주 불규칙한 데다가, 주기마저 길어 사실상 이런 식으로 나타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대가를 크게 치를 필요가 없어 가이드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게 세실리아가 왕가의 부름을 받지 않고 숙부의 성에서 지낼 수 있던 이유였는데…?
“눈치챘어? 티테르는 서로가 힘을 쓸 때 이렇게 느낄 수 있는 거구나. 그래, 그런 거야….”
세실리아는 혼란스레 중얼거리다가, 생각을 정리했는지 세이아드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지난 혹한기가 시작할 무렵, 북부를 위해 기도하던 중에 이변이 생겼어. 긴 밤 동안 이상한 꿈을 꾸고 일어나니 갑자기 몸이 너무 아프더라고. 미칠 듯한 두통에 의사를 찾았는데, 그때 내게 다른 힘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어.”
“세실, 티테르의 힘은 각성 이후에는 변하지 않는다. 몸이 아팠던 건 다른 이유였을 거다.”
“나도 그렇게 배웠어. 하지만 오빠, 이걸 봐.”
그렇게 말한 세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던 세실리아는 침대에 놓여 있는 검은 장미 다발로 다가가더니, 그중 하나를 뽑았다. 침묵하며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세이아드와 시선을 주고받은 세실리아는 그대로 장미를 손 안에서 으스러트렸다. 검은 잎이 샅샅이 부서져 땅으로 떨어지려는 그 차, 세실리아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장미잎이 아주 느릿하게, 허공에서 멈췄다.
마치 떠 있는 것처럼 멈춘 장미는 이내 느릿, 느릿, 기이한 속도로 떨어지더니 바닥에 닿기 전쯤 원래의 속도로 내려앉았다.
“나는 미래에 생길 일을 잠시간 현실에 붙들어 둘 수 있어. 이것은 사냥을 할 때도 마찬가지야. 니르아를 붙들어 둘 힘이 나에게 생긴 거야, 오빠. 나도 이제 오빠를 도와 어머니의 유지를 따라, 이 땅을 지키고 우리의 원수를 죽이게끔 보탤 수 있는 힘이 생겼어.”
의지가 선 단호한 얼굴은 일순 세이아드가 과거 거울 너머로 보았던 자신의 표정과 비슷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된, 무언가가 거세된 모습.
“그런 나를 가이드인 왕세자님께서 도와주실 거야. 그분께서 오빠를 도와줬듯이.”
과거의 그와 같은 얼굴로, 세실리아는 아스테르가 그녀의 가이드임을 선언했다.
세이아드를 폭주로 몰아갔을지도 모를 존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