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세이아드의 표정이 순간 살벌하게 굳었다. 순간 제가 들은 것이 질 나쁜 농담인가 싶어서, 그는 아스테르를 제지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의 무례를 굳이 참지 않을 거라는 의사를 표명하려던 차, 뒤에서 단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드.”
그 찰나 세이아드는, 어머니가 저를 부르는 줄 알았다. 흠칫 흔들린 눈동자로 아스테르를 주시하니 그가 괜찮다는 듯이 눈웃음 지었다.
“간만에 보는 동생이 기다리고 있잖나, 이드.”
심장이 요동쳤다. 삽시간에 차가워진 손가락을 말아 주먹 쥔 다음,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실리아를 이 자리에서 보는 게 말이 되지 않는 걸 알고 있음에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돌아본 자리엔 문가에 서 있는 장신의 여성이 보였다. 스텔라와 엇비슷한 키에,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긴 은발이 매끄럽게 허리께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그를 가만히 응시하는 눈동자는 집안 특유의 새카만 색을 머금은 채였다.
기억에는 없는 모습이었음에도 세이아드는 그녀가 세실리아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장성한 그의 동생은 초상화에 그려진 젊을 적의 어머니를 그대로 옮겨 둔 외양이었다.
세이아드가 알고 있는 세실리아는 소녀일 때의 모습에서 자란 적이 없었다. 그 시기를 마지막으로 죽기 전까지 볼 수 없던 아이였던지라, 그녀를 회상하고 그리워할 때면 언제나 소녀로만 떠올리곤 했었다.
“오랜만이야, 오빠.”
어색하고도 주저하는 음성에, 세이아드는 어깨를 잘게 떨었다. 세실리아가 정말 눈앞에 있었다.
공백이 길었다. 자그마치 그의 시간으로는 십 년에 가까운 시기였다. 그만큼의 거리가 주는 형용하기 어려운 어색함과 불편함에 세이아드가 말이 없는 사이, 세실리아가 먼저 걸어왔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장면이 환상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지는데, 세실리아는 예기치 못한 행동을 했다.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해.”
앞으로 다가온 세실리아는 무표정으로 세이아드를 잠시간 보다가, 이내 서늘한 눈매를 무너트리며 눈썹을 휘었다. 입술이 창백해질 정도로 짓씹은 세실리아는 이드의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더니 양팔을 뻗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잘못했어. 오빠처럼 어머니를 믿고 어떻게든 우리의 이름을 지켰어야 했는데, 그걸 포기하고 그저 편해지려고 도망갔어. 정말, 정말로, 미안해.”
발뒤꿈치를 들어 그를 껴안는 동생을 내려다보며 세이아드는 혼란스러워졌다. 갑작스레 나타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이 상황은 꿈에서도 기대한 적 없던 종류의 것이라 그랬다. 세이아드는 일그러진 눈으로 세실리아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면 쉬웠을까. 과거 그러했듯 목적만을 위해 움직였다면, 그때의 자신은 세실리아를 어떻게 느꼈을까. 밀어내고 싶기도 했고 동시에 안아 주고 싶었다. 그 상반된 마음이 팽팽히 양쪽에서 당겨지고 있던 차, 그의 품 안에서 세실리아가 잘게 떨었다. 들썩이는 가슴팍이 느껴지자마자 세이아드는 천천히 팔을 올렸다.
당장 파악해야 할 것들이 많으나, 긴긴 세월 안아보지 못했던 어린것이 슬퍼하니 달래줘야 한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가만히 팔을 들어 그는 한 팔에 안기는 등을 쓸어내렸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팔에 힘을 주어 가느다란 몸을 감쌌다. 비슷하게 서늘한 체온이 서로를 만나 조금씩 녹아내렸다. 세이아드는 이내 흐느끼기 시작하는 세실리아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그녀의 귓가에 고개 숙여 속삭였다.
“미안할 것 없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아스테르를 따라 나타난 것인지, 전생에는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던 동생이 왜 후회하는 것인지 몰라도, 세이아드는 어릴 적부터 그러했듯 모든 걸 제쳐 두고 사랑하는 동생을 달랬다.
누구보다 사랑하며 지켰고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던 존재였다. 그것은 세실리아가 자신을 저버리던 그때에도 변한 적 없는 마음이었다. 허망한 원망보다는 애틋한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불필요한 감정이 소중한 마음을 해치는 건 원치 않았다.
“그대가 기뻐하는 걸 보니 세상에 빛이 드는 것 같군, 이드.”
남매의 포옹을 지켜보던 아스테르가 웃음기 깃든 목소리로 읊조렸다. 동생의 등을 쓰다듬던 세이아드는 그 말에 고개를 돌리며, 잠시 부드럽게 풀어졌던 얼굴을 굳히곤 아스테르를 추궁했다.
“무슨 연유로 세실리아를 이곳에 데려오신 겁니까? 세실리아는 티테르의 의무를 이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제게 보여 주시고자 했던 거라면 북부에서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셨을 텐데요.”
아스테르의 꿍꿍이를 짐작할 수 없어 신경이 곤두섰다. 아스테르는 지난한 시간 내내 한 번도 그들을 재회시키려 하거나, 세이아드의 눈치를 본다거나, 그를 위해서 특별한 행동을 취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는 언제나 세이아드의 곁에 있었지만 지금의 세이아드는 그의 모든 행동이 죄다 아스테르 본인의 정치적 입지와 정책을 위한 일임을 확실히 알고 있는 상태였다.
“오빠, 왕세자님은 날 도와주고 계셔. 어머니의 일에 대한 진상을 말해 준 것도 왕세자님이야. 화내지 않아도 돼.”
그때 세실리아가 그를 말렸다. 끝내 눈물을 참아 불긋해지기만 한 눈으로, 세실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도움을 구할 일이 있어 왕세자님을 이번에 먼저 찾아왔어. 그때 왕세자님께서 실드라스의 개새끼가 한 짓을 말해 주셨고.”
그렇게 말하는 세실리아의 눈은 삽시간에 슬픔을 지우고 분노와 독기로 가득 찼다. 증오로 불타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세이아드는 그가 바로 어제 알아낸 어머니의 일에 대해 세실리아가 어렴풋이라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어떻게?
아스테르는 그가 죽기 전까지도 어머니의 일에 대한 명확한 증거나 정황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걸 밝힌 적도 없으며, 세이아드에게도 그걸 공유한 적 없었다. 그 또한 데세르투스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알아낼 엄두조차 할 수 없었을 일을 갑작스레 아스테르가 알아냈다는 점이 기이했다.
“역겹고 가식적인 남부의 악마들이 우리 북부를 함정에 빠트렸다는 걸, 내가 너무 뒤늦게 알았어. 그날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니르아가 나타났음에도 공작이 그걸 숨긴 거잖아!”
“잠시만, 세실리아.”
세이아드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아스테르를 빤히 보았다. 팔짱을 낀 채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아스테르가 싱긋 웃었다.
“내 그대에게 약조하지 않았나. 어머니의 결백을 밝히고 가문의 영광을 되찾아 주겠다고.”
그래. 분명히 그랬다. 그리고 그 약속은 과거에는 절대 지켜지지 않았다. 세이아드가 끔찍한 악마로 화해 모두를 죽이던 그날까지.
“세실, 전하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으니 이곳에 있거라.”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이 순간을 멍청하게도 감사해했을 것이다. 그가 약조를 지켰고, 자신을 위해 정말로 증거를 찾아왔음에 충성을 다시 맹세했겠지.
그러나 지금의 그는 이 사실에 기뻐할 수 없었다. 아스테르가 지금 이 시점에 어머니의 결백에 대한 사실을 들고 와 세실리아까지 설득하고 데려온 거라면, 과거의 그 또한 이미 예전부터 증거를 들고 있었을 것이란 뜻이다.
알고 있었으면서.
아주 오래전부터 손에 쥐고 있었으면서, 왜?
왜 말해 주지 않은 거지?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하얀 분노가 마음에서 끓었다. 세이아드는 동생을 안은 팔을 놓고 곧장 아스테르에게로 걸어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무엄한 짓임에도 오히려 아스테르는 즐겁다는 듯이 소리 내어 하하, 웃었다.
“그대가 날 먼저 만지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전하, 잠시 나와 주십시오.”
허락이 아닌 통보였다. 아스테르는 세이아드의 회색 눈에 희미하게 붉은 안광이 어리는 걸 보더니, 그가 끌어당기는 대로 유유히 뒤따랐다. 세실리아가 불안한 얼굴로 그들을 보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당장 아스테르의 속셈을 조금이라도 먼저 파악해야 했다.
복도로 나와 그는 거처에 배정된 정원까지 단숨에 걸었다. 그의 불안하게 일렁이는 마음과 달리 비가 멎은 정원은 화창한 색채로 물들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정원에 당도하자마자 아스테르의 손을 놓은 세이아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머니의 일에 대해서 알아내신 겁니까?”
서릿발같이 냉랭한 음성에 아스테르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분명 약조하지 않았나. 널 위해 전대 대공의 누명을 밝혀 주겠다고. 그 당시 현장에 있던 기사 중, 죽은 줄 알았지만 살아남은 이가 둘 있었어. 상태가 위중해 긴 시간 깨어나지 못했던 이가 최근 정신을 차렸지. 나의 의사들이 성의껏 돌본 결과거나,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이 보답받은 것일지도 모르겠군.”
“여태까지 그들을 데리고 있으셨단 말씀입니까, 그럼?”
세이아드의 의도를 알아챈 것인지 아스테르가 미소를 더욱 짙게 더했다.
“확실해지기 전까진 그대에게 헛된 희망을 줄 수 없었어.”
거짓말.
저런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아스테르는, 끝내 한 번도 세이아드에게 그걸 말한 적 없었다.
“전하께서는 일부러…!”
충실하게 모시던 주군이 끝내 절 저버렸던 죽음의 찰나에도 이렇게 절망하진 않았다. 어쩌면 실망하고 저도 모르게 허망하다 느꼈을지는 몰라도, 그가 저를 가지고 놀았으리라고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아스테르가 어쩌면 이전 생 내내 이걸 숨긴 채 자신을 농락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 찰나, 참기 어려운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맞닥뜨리면 느끼는 거대한 막막함이 세이아드를 등 떠미는 차, 아스테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천진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상하군. 난 그대가 분명 이 소식을 들으면 기뻐하리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아스테르가 세이아드의 팔을 거칠게 붙들며 삽시간에 거리를 좁혔다. 얼굴을 바짝 붙인 그가 생전 처음 보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청량한 하늘이거나 얼어붙은 호수였던 눈은 이번만큼은 풍랑이 이는 바다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그대의 한이자 평생 소원이 아니었던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나의 발언과, 명백한 증인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찾아낼 수 있는 다른 정황까지 합치면 실드라스를 끌어내리는 건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야. 그러나 나의 별은 마치 이런 것들이 하나도 기쁘지 않은 양 구는군.”
“전하께서 저를 진정 아끼셨다면, 진즉 그들에 대해 말해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전하는 제가 전하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도 정화를 거절하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세이아드는 신랄한 어조로 그의 말을 반박했다. 아스테르는 세이아드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이를 드러내어 웃었다.
“그대의 족쇄를 풀어 주면 언제고 나를 떠날 것이 아닌가.”
…뭐?
상상조차 못한 말이었다. 날 세우던 분노가 일순 당황하여 갈 곳을 잃고 일렁였다.
“그게 무슨…?”
“레사스, 그 버러지에게로 말이야.”
아스테르의 눈이 일순, 살기를 띠었다. 웃는 얼굴이 사라지며 그는 처음 보는 형형한 눈으로 세이아드를 잡아 삼킬 듯 보았다. 호수가 담긴 눈이 들끓는 감정에 증발할 것처럼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