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안아 주던 품에서 잠시 동안 어렴풋한 그리움을 느꼈던 것이 무색하게, 날카로운 거부감이 올라왔다.
그의 집안이 이름으로나마 남아 있을 수 있던 건 왕세자 덕분이다.
되돌아온 이후로는 왕세자를 경계하느라 더는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이아드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던 사실이었다.
‘아버지, 이드는 제 티테르입니다. 전대 대공의 죄와는 별개로 북부를 지킬 저의 티테르는 필요하니, 그에게까지 죄를 대물림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왕궁으로 불려 간 그날, 프로시어스 가문의 처사를 정하기 위한 회의에서 세이아드를 위해 나선 건 왕세자가 유일했다. 침묵 어린 티테르들과 대신들의 눈초리 속에서 방긋 웃으며 그의 앞을 가리고 섰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아무도 그의 옆에 선뜻 다가오지 않던 비참한 시간에 유일한 태양이 아스테르였다.
비록 그는 절 이용하기만 했으나, 그럼에도 그날은 사라지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세이아드는 그를 안은 레사스의 팔을 거칠게 붙들었다. 그가 왕자라는 걸 자각하고 있기에 대놓고 밀치진 못했으나, 다른 이였다면 멱살부터 잡았을 것이다.
“고작 열댓 살짜리 공작의 아들이 어떤 힘이 있길래 반역에 얽힌 이들을 구해 낼 수 있다는 겁니까.”
팔을 떼어놓아 벗어나려 했으나, 레사스는 생각 외로 쉽게 떼어놓기 어려웠다. 세이아드를 안고 있는 팔에 일순 힘이 들어가며 딱딱해졌다. 레사스와는 이런 식으로 얽힌 적이 없어서 예상치 못했다. 호리호리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체격이 좋은 탓인가, 보기보다 힘이 셌다.
“제발 내 말을 들어줘요, 이드.”
곧장 자리를 뜨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레사스는 간절히 청했다.
“나의 말이 그대를 늘 화나게 하는 걸 알지만…, 이번은 진실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전대 공작이 아들인 시온을 무척 아끼는 건 모두가 알던 사실이에요.”
레사스의 말대로 전대 실드라스 공작은 그의 아들들을 끔찍이도 아꼈다. 다른 이들보다 늦게 얻은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브레드히트 또한 그런 식으로 노바를 키우긴 했지만, 그 정도에선 시온이 더했다.
“그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대 공작의 행동은 죄다 설명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그리 정교한 함정을 꾸며 놓고 북부의 핏줄을 구태여 살려 두는 건 낭비입니다. 그가 북부의 몰락을 원했더라면 자식까지 처리하는 것이 옳습니다.”
게다가, 그토록 아들을 아끼는 이가 세상의 모든 것이 죽기를 원하는 점이 기묘했다. 그러니 고작 전대 공작이 아들을 위해 자신이 그려 낸 그림을 망칠 거라는 것은 설득력이 낮았다.
“…원래는 그것이 공작의 뜻이 맞습니다. 그러나 시온은 북부의 티테르가 사라지면 다른 티테르가 지게 될 부담이 무척이나 크다고 말하여 그의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직접 목격한 것이니 거짓이 아닙니다, 대공.”
시온이 주장했다고 하는 말은 왕세자가 그를 위해 했던 말과 비슷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다른 존재도 아닌 시온 실드라스가 그를 구했다고 주장하는 레사스를 상대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시온 실드라스가, 전하의 한마디에 흔들려 절 위해 나섰단 말입니까?”
버석하게 되물었다. 점점 감정을 갈무리하는 세이아드를 레사스가 불안한 눈길로 보았다. 다 자란 줄 알았더니 이런 곳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아직 영락없는 소년이었다.
“그때의 시온은 대공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여 처음부터 내게 관심을 줬고, 그런 성격이었으니 저런 주장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시온은 분명 순진하고, 세상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맞습니다. 하지만 전대 대공의 일과는 상관이 없….”
“전하.”
세이아드는 내내 갈무리하던 힘을 풀어, 그를 꽉 안고 있던 레사스의 팔을 끌어내렸다. 끔찍한 기분과 상관없이 상대가 가이드인지라 몸이 떨어지기 싫어하는 게 느껴져, 신물이 났다. 의지와 상관없는 본능을 짓밟으며 세이아드는 냉정하게 그와 거리를 벌렸다.
“이토록 절절히 친우를 옹호하시면서 잘도 제게 그의 목을 내주신다 하셨습니다. 퍽이나 신뢰 가는 발언이군요.”
그가 듣고 싶은 것은 시온의 순전함이나 그가 나쁜 이가 아니라는 말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짙고 어두운 피로가 몰려와 세이아드는 이내 화를 내는 것조차 지겨워졌다.
“불경한 장면을 목격하게 해 드린 점에 사죄드립니다. 숲의 정화 의식 때 뵙지요.”
체념이 염증처럼 올라왔다. 또다시 따라잡히는 것은 겪고 싶지 않아, 그는 왕족에게 감히 축객령을 내렸다.
“먼저 가시면 뒤따라가겠습니다.”
레사스는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말없이 침묵했다. 세이아드를 하염없이 보던 보라색 눈이 힘없이 내리깔렸다.
“나는 언제나 대공을 실망시키는군요. 내가….”
레사스는 버거운 듯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곧 고개를 들고는, 늘 짓던 웃음을 입가에 천천히 매달았다. 눈물 자국이 남은 뺨이 잘게 떨렸다.
“그러나 앞서 한 모든 말은 하나의 거짓도 없습니다. 나는 대공이 더는 사람을 밀어내고 홀로 있지 않았으면 해요. 그대의 말처럼 시온을 죽이는 것은 내게 쉬운 일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의 가문이 몰락하게끔 힘을 쓸 순 있습니다.”
“전하께서 그럴 능력이 있으십니까.”
세이아드는 전처럼 비틀린 말을 내놓았다. 잠시간 앞으로 나아가고 색을 바꾸는 듯하던 둘의 관계가 진실이라는 현실 아래 다시금 전과 같이 돌아갔다.
레사스는 모욕적인 말에도 그저 웃더니, 세이아드를 본 채로 뒷걸음질 쳤다. 등을 돌릴 듯 발길을 반쯤 틀던 그는 못내 미련이 남은 이처럼 자꾸만 세이아드를 보다가, 움직일 기미가 없는 그를 보며 결국 다시 웃었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지요.”
세이아드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확실히 알아들었는지, 레사스는 결국 등을 보였다. 느릿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구태여 눈에 담기 싫어 세이아드 또한 몸을 틀었다.
애당초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그저 정화만 받는 사이로 남았어야 했다. 헛소리에 휘둘리며 괜한 시간을 썼어.
세이아드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레사스의 고집을 따라 잠시 경계를 허물었던 것이 금세 후회로 다가왔다. 어차피 진즉 끝난 인연이었는데….
마음이 얽히면 이성적이지 못한 일이 너무 많아진다. 실드라스를 향해 다시금 적대감을 느끼며 휘둘린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해졌다. 그 증오에 휩싸여 끝내 폭주까지 일으킨 죄인이 되었음에도, 죽음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도 이렇게 구는 것이 싫었다.
문득 아스테르의 정화가 생각났다. 그의 정화는 받을 때마다 세이아드의 마음을 어떠한 미동도 없이 평온하게 가라앉히곤 해, 쓸데없는 감정이 올라오면 그를 찾곤 했었다. 지금처럼 미칠 듯이 내면이 요동치는 때에는 특히.
그래서 아스테르가 제 가이드였던 것일까.
그를 옆에 둬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
악마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세이아드는 다음날 예기치 못한 손님을 맞이했다. 그가 궁에 올라온 뒤로 내내 발길조차 없던 아스테르가 그의 거처에 나타난 것이다.
아침 훈련을 끝내고, 퀼리에게 막 여동생인 세실리아의 소식에 대해 듣고 난 뒤였다. 숙부의 성에 머무는 것으로 알고 있던 세실리아는 지난주부터 어딘가로 떠났다고 들었고, 숙부는 세이아드의 심복에게 그녀의 거처를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했다. 세실리아가 성에 도착한 뒤부터 세이아드에게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던 분이니 어쩌면 당연한 태도였다.
세실리아를 단숨에 제 삶에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곤 여기지 않아 실망은 없었다. 다만, 조금 피곤해졌다.
어제의 일로 인해 혼란한 마음으로는 실드라스에 관한 일을 이성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아, 세이아드는 일부러 다른 것으로 잠시 눈길을 돌리기로 했다. 마저 정화의 부작용에 대해 알아보려던 차에 알맞게도 아스테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아스테르가 와 있다는 소식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의 공간을 자신의 것인 양 차지하고 있던 아스테르가 손을 흔들었다. 세이아드가 늘 앉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아 앉은 채, 그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간만에 보니 더 잘생겨졌군, 이드. 왕국의 별들 중에서도 그대처럼 잘난 얼굴이 없지.”
편안히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무표정으로 살폈다. 데세르투스의 흔적이나 그가 조사하는 것들은 구태여 이곳에 흔적으로 남아 있진 않지만, 자리에 없는 사이 아스테르가 방을 살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불편했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수도로 올라온 뒤 오래간 얼굴을 보지 못한 것 같아서.”
싱긋 웃은 그가 여유로운 동작으로 일어나더니, 세이아드의 침대로 다가갔다. 휘적휘적 걸어간 그는 이내 거기서 아름답게 엮인 꽃다발을 손에 들었다. 검은 장미였다.
장미는 늦은 봄철에 피지만, 왕궁의 온실은 일 년 내내 장미를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간혹 귀족들에게 그 공간을 개방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왕족의 소유였다. 그리고 검은 장미는 개중에서도 특별한 돌연변이라, 피는 양이 아주 적었다. 저 정도의 장미면 아마도 올해 치를 모두 꺾어 온 것이리라.
“고작 열흘 남짓입니다.”
봄을 맞이해 같이 올라왔으니, 억지로든 아니든 얼굴을 마주치고 지냈다. 열흘이라는 말에 아스테르가 지나치게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세이아드의 앞으로 걸어왔다. 엇비슷한 시선이 얽히고 그가 세이아드의 품에 꽃을 안겼다.
“너를 닮은 꽃을 보니 그리움을 참기 어렵더군.”
“무슨 용건이신지 밝혀 주시면 좋겠습니다.”
“딱딱하기는.”
아스테르는 가시 돋친 태도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웃었다. 전에는 그를 꺾기 위해 정화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벌을 주었다면, 세이아드가 실종되었다 돌아온 뒤로는 그가 무슨 태도를 취하든 내버려 두었다.
“내 태도에 그대가 심상한 것을 알아 며칠간은 일부러 찾지 않았어. 엊그제의 무도회에서 샬로트를 보고 자리를 피하는 걸 보니, 그간의 내 태도가 얼마나 무심했는지 후회가 되더군.”
“딱히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니.”
아스테르는 손을 뻗어 세이아드의 턱을 쥐었다. 부드럽게 뺨을 감싼 손가락으로부터 잔잔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한창 복잡하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가며 잔열처럼 끓던 감정들도 차분해졌다.
아스테르의 정화를 최대한 피해 오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마주친 자리에선 그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의 능력이 주는 부작용을 의심하고 있음을 드러내어서도 안되고, 정화를 거부할 합당한 명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슬슬 그만한 명분을 만들어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던 계획은, 어제의 일로 잠시 길을 잃은 채였다.
“그렇다고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지.”
아스테르는 언제나 말을 잘했다. 세이아드에게 막 다가왔던 그때처럼 거리를 좁힌 그가 햇살처럼 웃었다.
“그래서 그대를 위로할 만한 선물을 가져왔어.”
“꽃이라면 다시 가져가심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자신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꽃을 선물로 주는 행위에 정색하며 세이아드가 다시금 꽃을 돌려주려는 차에, 아스테르가 세이아드의 등 뒤를 보더니 말했다.
“세실리아, 이제 들어오거라.”
장미처럼 붉은 아스테르의 입술로부터, 익숙하고도 낯선 이름이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