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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59화 (59/147)

#59

레아나 왕후를 이루던 피와 살이 레사스를 만든 것이라 여기니 더욱 그러했다. 당당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어머니를 ‘미쳤다’고 증언하던 왕후와 기다렸다는 듯 기회를 잡아 어머니의 처형을 승인한 국왕의 자식이, 제 앞의 레사스였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믿었던 것들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겨우 체념한 원통함이 불씨처럼 도사리다 다시금 몸집을 불렸다.

기실 세이아드는 자신의 폭주를 스스로 목격하며 어머니에 대한 믿음을 조금, 놓고 있었다. 자식인 제가 그리도 잔인한 죽음을 만들었으니, 어쩌면 이 죄는 어머니로부터 내려온 게 아닐까 해서.

부끄럽게도 유일하게 어머니를 믿어야 했던 저마저 어머니를 저버리려 했었다.

엄격하긴 해도 언제나 좋은 분이셨다. 티테르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끔찍이 싫어하면서도 누구보다 의무에는 충실했다. 정화를 자주 받지 않는 제 면모가 독이 될까 어머니는 누구보다 열심히 부름에 응했고, 지옥 같은 대가가 몸속을 헤집어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감내하려 했다. 열심히 사셨다.

적어도 스스로를 미쳤다고 의심하며 죽지 않을 정도로는, 그 정도로는 열심히 살았다. 꾸며 낸 진실을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대우도 받지 못하게끔 허망하게 사시진 않았다.

사그라들었던 증오가 세이아드의 마음에 커다란 불로 화해 자리 잡았다. 그 증오가 버거워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살아왔는데, 하필이면 이 순진한 왕자가 무뎌진 살을 긁어 아프게 했다. 절 ‘좋아한다’고 속삭이며 다가오는 그 꼴에 불필요하게 동요되었다.

좋아한다고.

나를.

내 어머니를, 그렇게 많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 원수의 아들을 옆에 두고서? 지난 삶의 너는 그를 만지고 껴안고, 그를 지키며 스스로가 맞다고 믿는 빛나는 자를 끝까지 옆에 두었다.

한때는 나 외의 소중한 것은 없다고 지껄이던 그 아름다운 얼굴로,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꾼 이들을 잘도 옆에 둔 채 나를 미워했다.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찌르던 그날의 레사스가 지금에 덧대어졌다. 무서울 정도로 감정 없는 서늘한 눈이 떠올랐다. 그 눈. 절 찌르던, 흰 핏줄이 돋아난 손등. 그 모든 게 모여 세이아드를 죽였다.

장성한 레사스를 마주쳤던 그 찰나 느낀 커다란 동요는 이제 원망으로 변질했다. 스스로에게 이런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음에도, 불행하게 아픈 감정이란 것이 세이아드의 안에도 있었다.

“왜 부르신 겁니까? 용무가 있으시다면 이 자리에서 말씀하십시오.”

그러나 이성이, 습관이, 평생 세이아드를 강인하게 만들어 준 인내가 그의 흔들림을 감쌌다. 레사스의 멱살을 쥐고 묻고 싶은 말을 억지로 참아 내며 세이아드는 싸늘하게 물었다.

레사스는 눈썹을 처연하게 늘어뜨린 채, 한없이 가라앉는 듯한 보라색을 담은 눈으로 세이아드를 그저 응시했다. 하얗던 얼굴이 지금만큼은 세이아드의 피부처럼 창백했다. 세이아드는 굳게 입을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레사스가 손을 뻗었다가, 세이아드의 눈길에 경멸이 실리자 서서히 내려갔다. 흰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돋아난 게 보였다.

“…그대의 마음이 어떤지 나는 아마 감히 짐작조차 못할 겁니다. 진심으로 미안해요, 대공.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레사스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이아드는 냉소어린 웃음을 지었다. 머리가 하얗게 끓는데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입꼬리가 비틀리며 흰 송곳니가 드러났다.

“지금 저를 위로하고 싶어 쫓아오신 겁니까?”

레사스는 그 찰나, 웃는 세이아드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크게 뜨인 보라색 눈이 멍하니 세이아드의 미소를 담고 있는 꼴에 순간, ‘내가 어떻게 해야 그대가 예전처럼 웃어 줄까요?’라고 말했던 점심 정찬이 떠올랐다.

환멸이 났다. 제가 웃을 수 있던 시기는 이미 형장의 새벽이슬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고, 느낄 수 있는 감정마저 지나치게 적었다.

“제가 웃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셨던가요. 지금 생각해 보니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네, 그게 좋겠습니다. 시온 실드라스의 머리를 제게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티테르의 처형은 왕족의 권한이니 전하께서 그의 목을 직접 베어 주셔도 괜찮겠군요.”

세이아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지난한 시간 동안 시온으로부터 들어온 ‘악마’라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아마도 자신은 악마가 맞을 것이다. 이토록 저열한 것들을 입에 담는 걸 보면, 그래, 악마와 다를 바 없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시온은 이 일에 아마도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며, 레사스 또한 관계없는 이에 불과할 것이라고. 그들은 그저 원수의 자식들일 뿐이니 기실 세이아드에게 잘못한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냥 세이아드는 이들이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누군가의 삶을 짓밟고, 누군가의 생을 앗아 간 이들을 부모로 둔 주제에, 그 누구보다 바르고 공평한 수호자로서 왕국을 다스렸다는 것이.

“제가 갖고 싶은 것은 전대 실드라스 공작의 몸이나, 이미 그자의 육신은 땅으로 돌아갔으니 방법이 없어 보이는군요. 아니면 전하, 제가 남부를 불태우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안타깝게도 레사스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이제 갓 자리를 되찾은 왕자일 뿐이니, 세이아드가 원하는 어떤 것도 들어줄 능력을 갖지 못했다.

“그렇지 않다면 제게 어떤 위로도 베풀지 마시길 간청드립니다. 그게 전하께서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진심어린 독설을 마무리 짓자 탈력감이 몰려왔다. 스스로에게 환멸이 났다. 이러한 말을 레사스에게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상대하지 않고 전처럼 무시하는 쪽이 더 편했을 텐데, 불필요하게 날뛰었다.

웃음기를 지워 낸 세이아드가 긴 한숨을 속으로 숨겼다. 가시덩굴로 몸속을 가득 채운 기분이 들었다. 피로한 안색을 손아래로 숨기며 얼굴을 쓰다듬다가, 그는 말조차 섞기 싫어 등을 돌렸다. 그렇게 레사스를 두고 가려던 차였다.

“그대가 원한다면… 시온의 죽음이 그대의 안식이라면…, 그게 정말로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네, 하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뒤에서 울렸다. 순간 이게 무슨 농담인가 싶어 세이아드는 우뚝 멈춰 섰다.

“대공의 영혼이 실드라스의 멸문으로 인해 위안받을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게 가능하게끔 해 보겠습니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형편없이 흔들리던 레사스의 목소리가 점점 단호해졌다. 세이아드는 결국 뒤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레사스 솔리아스가 저런 말을 하고 있는 모습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자.

그렇게 돌아본 자리엔 흰 뺨 위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레사스가 있었다. 그는 지독하게 슬픈 얼굴로 아까와 같이 세이아드만을 본 채였다. 바뀐 바 없는 표정에 그저 투명히 흐르는 눈물이 더해졌을 뿐인데, 세이아드는 일순 흠칫했다.

“그러니 제발 전처럼 고립되지 마세요. 내가 그리 역겹다면 나의 위로 따위는 잊고, 대공의 소중한 사람을 찾아가세요. 그러고는 화를 내고, 그들을 설득하고, 지금처럼 차라리 원하는 것을 말하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이아드는 기괴하게 눈썹을 찡그리곤 레사스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농담이라면 정도가 지나치십니다, 전하.”

세이아드는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누군가를 제 손으로 죽여 본 적 없을 스물한 살의 레사스가 저딴 말을 지껄이는 것이 우스웠다. 어떻게든 사람을 살리고자 애를 쓰던 것이 레사스가 하던 일인데,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제일 가까운 친우를 고작 저를 위해 죽이겠다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건 레사스라는 사람이 지닌 신념과 신의와 상충되었다.

“그대에게 하는 모든 말은 나의 영혼으로부터 나온 진심입니다, 대공.”

“정체도 모를 이가 능력으로 읽어 낸,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 하나로 전하께서 잘도 그리 움직이시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런 일에 관심이 없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제 어머니의 일을 듣던 당시에도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그리 말하던 세이아드는 입을 다물었다. 기억이 너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바람에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새어 나왔다.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겼으면 했지만 레사스는 기민하게도 그 문장을 알아차렸다.

“…그날 나를 보러 왔었나요?”

죽은 것처럼 새카맣던 보라색 눈에 일순 색이 돌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레사스가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 당장이라도 닿을 듯해 세이아드는 그를 제지하기 위해 낮게 경고했다.

“오지 마십시오.”

“내가 시온에게 하는 말을 들었던 건가요? 그래서 그대가 그토록 나를 미워했던 겁니까?”

레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왔다. 단숨에 진실로 접근한 레사스로 인해 세이아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레사스는 괴로워 미치겠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꾹 감았다. 흐르던 눈물이 턱을 타고 방울졌다.

“멍청하게도 내가 나의 하나뿐인 달을 슬프게 했군요. 그대는 이미 나를 보는 것조차 끔찍했을 텐데, 그럴 구실을 하나 더했습니다.”

“지나간 일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전하께서 하는 말이 모두 헛소리라는….”

세이아드의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이를 악물며 들끓는 감정을 참으려는 그를, 레사스가 양팔로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너른 품에 삽시간에 안긴 세이아드는 가까이서 밀려드는 청량한 향과 닿자마자 밀려드는 따스함에 경직했다. 그를 끌어안은 레사스의 팔에서, 얼굴이 닿은 목덜미에서,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맥동이 느껴졌다.

“정말로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드.”

남에게 안긴 것이 너무 까마득한 과거라, 세이아드는 당장 레사스를 밀치는 것도 잊었다. 동요하던 찰나면 어머니는 언제나 세이아드를 이렇게 안아 주곤 했었다. 그러면 들끓던 감정이 차차 가라앉으며, 그를 혼란스레 속여 오던 다른 가짜 감정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진실만이 남았다. 슬픔이 차오르면 체온이 그걸 녹였다.

그리고 너무 오랜만에 느낀, 정화가 아닌 순간의 사람의 체온이 세이아드를 잠시 멈춰 세웠다. 새카맣게 뒤엉켜 폭발하던 불덩어리가 크기를 조금씩 줄이려 했다. 그러던 차.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시온을 설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공을 구할 방법이 없었어요. 시온에게는 그날 빚을 졌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공작을 설득해, 악시드 대공의 두 자식만큼은 살려달라고….”

레사스가 한 거짓말에 세이아드는 현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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