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이런 일이 벌어졌을 거라고는, 아, 아무도, 몰랐을 거야.”
이토록 끔찍한 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미안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전대 대공이 잘못하여 생긴 일이라고 믿었던 사람들 속에 저 또한 포함된다는 게 죄책감을 불러왔다. 그리고 이 참담한 과거에 놀란 것은 당연하게도 쿠르투뿐만이 아니었다. 멍하니 쿠르투의 말을 듣고 있던 티아키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경악한 모습이었고, 레사스 왕자는 창백한 안색을 한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덜덜 떨고 있던 쿠르투는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레사스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대공과는 다른 느낌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길게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그 아래의 보라색 눈이 깊게 잠겨 있어, 정확히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인 레아나 왕후가 이 일에 얽혔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쿠르투가 엿본 재스퍼의 기억에서 왕후는 세뇌인지 뭔지 모를 힘에 당해 휘둘렸으니, 기실 그녀의 잘못은 크다고 볼 수 없을 텐데?
“네 능력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건가?”
쿠르투가 의아해하던 차, 무서운 얼굴로 침묵하던 대공이 질문을 던졌다. 레사스로부터 시선을 돌린 그녀가 얼른 대공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아까 전의 동요가 거짓인 것처럼 표정을 지우고 다시금 냉랭하고 무심해 보이는 낯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차가운 외양인지 순간 쿠르투 자신이 느낀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쿠르투를 지탱해 주고 있는 거센 손에서 흘러 들어오는 감정은 여전했다. 속이 녹아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쓰라린 고통이 대공으로부터 전달되었다. 티테르끼리는 서로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힘을 쓸 수 없으니 당연하게도 그의 기억이나 다른 것은 읽을 수 없지만, 분명 쿠르투가 느끼는 감정만큼은 대공의 것이었다.
이 사람은 왜 드러내어 슬퍼하지 않는 걸까?
쿠르투였다면 그 자리에서 미쳤을 것이다. 비록 부모 없이 자랐지만, 그녀를 길러 준 나나가 이렇듯 억울하게 죽었다면 분명 그랬을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보아도 끔찍한 일인데, 대공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평정을 되찾은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저 새겨진 기억을 읽어. 그걸 보는 동안 거짓말을 꾸며 낼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지도 않고….”
의아하고도 안쓰러운 눈으로 대공을 보며 대꾸하던 차, 쿠르투의 코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빗방울처럼 후두둑 떨어진 피가 이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이드의 정화로 평상시의 한계를 넘게 힘을 써 보긴 했지만, 그만큼 과하게 능력을 해방했으니 몸이 버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피를 닦아 냈지만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 숙여.”
그때 대공이 삭막한 음성으로 명했다. 쿠르투가 눈을 데구르 굴리며 그의 말을 따르자,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쿠르투의 팔을 놓은 뒤 그녀의 코를 잡았다. 팔을 꽉 잡던 힘과 달리 지그시 누르는 압박감에 코의 피가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작은 콧잔등을 눌러 주는 엄지와 검지에서 햇볕에 녹은 눈 내음이 났다.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 이렇듯 자신의 부작용을 챙겨봐 준 게 오랜만이었다. 데세르투스는 서로의 이런 면모를 당연히 여겨 대수로운 일조차 되지 않았다. 제 하찮은 상처가 대공 같은 사람에게 신경 쓸 일이나 되는가 싶었는데….
“너희는 일단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말거라. 당시의 일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저 꼴이 된 것 같으니, 돌아가서 내 지시를 기다려.”
피가 멈추는 걸 확인한 대공은 손을 뗀 후 티아키를 보며 명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이던 티아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대공, 괜찮아? 정말, 그…, 유감이야.”
“이미 지나간 일이다.”
대공은 싸늘히 말하더니, 레사스 왕자에겐 눈길을 주지 않고 멍하니 서 있는 재스퍼에게 시선을 잠시 멈췄다. 스스로의 힘으론 기억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으나, 믿고 있던 것이 뒤바뀐 상황이 무척이나 놀란 모습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떠는 재스퍼를 잠시간 눈에 담은 대공이 등 돌린 채 왕자에게 말했다.
“전하의 기사이니 처분은 뜻대로 하십시오. 죄에 연루된 것은 아니나 이런 상태로는 한동안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진 않는군요.”
“대공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제야 레사스 왕자는 입을 열었다. 마치 대공의 허락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사람 같았다. 대공은 그의 말에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곤 왕자를 보았다. 무표정 아래로 어른거리는 묘한 분노와 원망이 얼핏 드러나는 듯하더니, 냉소어린 목소리가 그에게서 새었다.
“전하께서는 제가 원하는 어떤 것도 들어주실 수 없습니다.”
그리 말한 대공은 감정을 말끔히 얼굴에서 지우곤 고개를 짤막히 숙여 보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더는 말조차 섞고 싶지 않은 듯 대공은 냉랭한 태도로 왕자를 등지고 먼저 방을 나섰다. 왕족에게 저래도 되는 건가, 싶었는지 티아키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곤란한 기색을 했고, 재스퍼는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쿠르투가 그런 광경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레사스 왕자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비통한 표정이던 그는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그들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왕자의 목소리가 희미한 촛불같이 꺼질 듯 일렁였다.
“괜찮다면 이따가 재스퍼를 궁 근처까지 바래다줄 수 있겠어?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질 않으니 조금 추스르는 쪽이 나아 보여서. 호위해 준다면 충분히 사례하지.”
“어려운 일은 아니니 따르겠습니다.”
“고마워.”
그리 말한 레사스는 이내 쿠르투를 보더니 가라앉은 눈웃음을 미미하게 지었다.
“가엾게도 몸이 많이 상했구나. 이번 일로 고생을 했으니 종종 마주친다면 내게 정화를 받아.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너희를 도와줄게.”
그러더니 손이 뻗어 왔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닿지는 않고 쿠르투의 이마 근처에서 멈춘 손으로부터 청량하고 평온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진탕이 되어 얽혀 있던 내부의 파장이 차차 가라앉으며 조용한 강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스퍼, 돌아오는 것은 네 의지야. 이번 일로 북부의 가문이 너의 생각과는 다른 곳임을 알았을 테니 앞으로의 처신 또한 전처럼 무례하지 않기를 바라.”
손을 거둔 레사스가 마지막으로 재스퍼에게 명했다. 그의 말을 멍하니 듣던 재스퍼가 고개를 치켜들곤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주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같은 티테르끼리 왜, 그, 그런 짓을… 한 거죠? 저로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일입니다. 저자가 사이한 힘으로 그저 거짓을 읽어 낸 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일이….”
당사자이면서도 기억할 수 없는 기억이니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런 재스퍼의 말을 듣고 있던 레사스는 대공이 나간 곳으로 몸을 틀었다. 쿠르투에게 보인 가라앉은 웃음을 입가에 습관처럼 매단 채, 그가 침묵하다 짤막하게 한 마디만을 남겼다.
“사람은 논리적으로만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러고는 그에 대해 물을 틈도 없이, 대공의 흔적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음?
왕자의 태도는 이상했다. 그는 대공 본인보다 더욱 희게 질리고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막상 재스퍼의 질문에는 크게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쿠르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티아키와 눈을 마주쳤다. 상황 돌아가는 게 복잡한 것은 마찬가지인지, 티아키는 침음을 뱉으며 잠시 머리를 감쌌다. 그러더니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멍하니 서 있는 재스퍼에게 다가갔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멍청하게 그만 서 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지나 고민해 보라고. 보아하니 실드라스 가문에서 이런 이유로 널 데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뭔가 아는 티를 내면 죽게 되지 않겠냐?”
그러게. 쿠르투는 티아키의 분석에 감탄했고, 재스퍼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티아키에게 물었다.
“당, 당신 생각엔… 실드라스 공작께서 이 일을 알고 계시는 것 같나?”
“그거야 모르지.”
티아키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보이는 것만으로 사실을 판단할 수 없으니까.”
쿠르투는 그 말을 듣고 대공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그를 둘러싼 무수한 소문들 또한 상기해냈다. 유령을 부리는 악마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져, 쿠르투는 괜히 대공이 만졌던 콧잔등을 문질렀다.
***
세이아드는 공허하게 비어 있는 저택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스스로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는 방치되어 낡아 가는 대리석 바닥의 먼지 낀 양탄자를 밟았다. 발소리가 허공에 저벅, 저벅, 울렸다. 덧없이 날아가는 뼛가루처럼 허망한 소리였다.
아무도 없이 텅 빈 저택을 혼자 지키던 과거가 겹쳐졌다. 어둠으로 가득 차 오직 새카만 암흑만이 전부였던 날들을 보내며, 그는 간혹 꿈에서 어머니가 살아있던 당시를 떠올리곤 했었다.
그러면 종종 멍청한 미련이 올라왔다. 어머니가 살아있더라면, 아버지가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세실리아가 그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곳이 어땠을지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짐작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이던 시기가 있었다. 세이아드는 그런 것들로부터 느껴지는 고통이 싫었다. 그리 상상하고 괴로워해도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이미 죽었다. 아버지는 오래전 슬픔의 바다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죽은 이들은 돌아오지 않으니 그 사실에 비통해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집중해야 하는 건 어머니의 증언이 사실이었다는 점과, 전대 실드라스 공작이 누군가와 손을 잡고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그런 일을 했는지 알아내야 했다.
“대공.”
쿠르투가 말하는 재스퍼의 기억 속엔 전대 실드라스 공작 외에도 누군가가 더 있었다. 그자가 재스퍼의 기억을 조작한 능력자라면, 현존하는 티테르 외에 숨어 있는 존재가 있다는 뜻이었다.
세이아드의 생각은 곧 어머니와 재스퍼, 그리고 다른 소년들이 목격한 니르아에게로 쏠렸다. 그 또한 혼란스럽다. 낮에 나타나는 니르아가 있다는 것도 경악할 일인데 심지어 그것은 교묘하게 이성을 가진 것처럼 굴었다. 마치 실드라스와 의문의 존재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
이 외에도 걸리는 게 많았다. 남자는 실드라스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면 이 땅의 모든 것이 죽을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는 건, 실드라스가 그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 된다.
“대공, 잠시만요.”
왜? 실드라스 공작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의 어머니를 그렇게 죽인 것일까?
“잠시만, 아주 잠시면 됩니다.”
대체, 왜? 그렇게나 많은 시간 서로를 의지하며 싸워 왔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은 ‘괴물’을 죽여야 하는 의무를 진 자들이었다. 아무리 서로를 미워할 일이 있더라도 의무를 진 동족이 서로를 저버려선 안 된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유가 없다.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그의 행동을 설명할 길이 보이질 않았다.
“이드.”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으로만 걷던 몸이, 그를 잡아 오는 손에 의해 붙들렸다. 고집스럽게 나아가던 걸음이 멈추는 동시에 세이아드는 날카롭고 매서운 동작으로 그를 붙든 손을 쳐 냈다. 아픈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살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손이 내쳐진 레사스가 그의 뒤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짙은 눈썹이 괴로운 듯 한껏 휜 채로, 레사스는 비통한 얼굴을 한 채 세이아드를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며 세이아드는 이상하게 무언가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피를 토하고도 남을 끔찍한 진실을 듣고도 내내 갈무리하던 감정이 이때 터졌다.
“그 손으로 절 만지지 마십시오.”
실드라스를 만지고 위로했을 손이 제게 닿는다 생각하자 끔찍한 역겨움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