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대공, 이게 무슨 짓입니까!’
기사들의 목숨이 순식간에 사라진 그 찰나, 기이한 반응이 돌아왔다. 거대한 그림자 괴물을 버젓이 뒤에 두고도 왕후는 그걸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주변을 살피다가, 죽은 기사를 보자마자 은발의 여자에게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니르아가 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요? 지금, 갑자기 기사들을 왜…!’
왕후가 그렇게 비명 같은 질책을 퍼붓자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왕후의 반응은 주변의 다른 기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 괴물이 아닌 은발의 여인을 주시하며 웅성거렸다. 그 광경을 즐기듯 그림자로 만들어진 뱀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왕후에게로 가까워졌다.
‘실드라스, 넌 보이는 거지? 왕후 폐하를 당장 안전한 곳으로 모시라고!’
여인의 외침을 따라 뱀이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왕후를 삼킬 듯이 뱀이 빠르게 접근해, 남자와 왕후의 뒤에서 아가리를 벌렸다.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이 명백함에도 왕후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외려 두려운 기색으로 여인을 질책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대공! 분명 경고했습니다. 지금 그대의 행동은 정상이 아니에요. 폐하께 그대의 정화를 부탁드릴 터니…!’
뱀이 쉭, 소리를 내며 왕후에게 달려들었다. 기괴하고 환상 같은 무서운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소년들 중 하나가 헉, 소리를 내며 눈을 가렸다. 앞서 기사들이 죽을 때부터 공포로 얼어붙어 있던 재스퍼는 차마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다.
여인은 왕후의 말을 무시하고 뽑아 든 장검을 들고 뱀을 향해 도약했다. 소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빠른 속도로 삽시간에 거리를 좁힌 그녀는 검을 왕후의 머리 위로 크게 휘두르며 뱀의 목젖을 찔렀다.
‘꺄아아악!’
놀라서 주저앉은 왕후의 머리 위에 목이 베인 뱀의 머리가 덜렁, 흔들렸다. 목이 잘리고도 살 수 있는 생물은 없으니, 어린 재스퍼의 머릿속으로 미미한 안도감이 순간 퍼지려 했다.
죽었겠지?
그런 순진한 생각을 비웃듯이 뱀은 덜렁거리는 머리를 빙빙 돌리다가 이내 제자리로 붙었다. 그 사이 주변에서는 난리가 났다. 기사들은 그림자 괴물에게로 뛰어가는 대신 경악에 찬 외침으로 여자를 말렸다.
‘대공을 막아라! 티테르가 폭주한다!’
검을 뽑아 든 이들이 여인을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여인에게 채 닿기도 전에, 왕후의 뒤를 도사리고 있는 뱀의 꼬리에 휩쓸렸다.
‘아악!’
‘대공,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비명이 여기저기서 산불처럼 퍼졌다. 여인을 질책하는 비명을 유언으로 남기며 기사들이 괴물에 의해 죽어 나갔다. 여인은 크게 동요하는 몸짓으로 팔을 휘둘렀다. 그녀의 손짓을 따라 바닥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뱀을 어떻게든 붙들었다.
‘다들 제발 피해, 피하라고! 실드라스, 이 빌어먹을 놈! 대체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그림자가 그림자를 붙드는 모습이, 얼핏 보면 뱀마저도 여인의 힘으로 인해 불려 나온 것처럼 보였다. 왕후의 옆에 서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던 금갈색 머리의 중년은, 여인의 말을 듣고 나서야 검을 뽑아 들었다. 얇은 세검이 눈 시린 빛을 광장 전체로 번쩍, 반사했다.
‘정화를 그렇게나 거부하더니 결국 미치고 말았군. 니르아가 어디 있다는 거지? 이곳엔 아무것도 없어. 미쳐 버린 북부의 광인 외에는.’
남자는 그러고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팔을 펼쳐 보았다. 그와 함께 뱀을 잡고 있던 여인의 이상한 힘이 풀려났다. 몸통을 붙든 힘에서 벗어난 뱀은 기다렸다는 듯 광장을 휘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상했다. 그들을 쫓아오는 것이 명백히 보이는데, 반대로 도망가긴커녕 외려 그것에게 달려들어 잡아먹히거나 깔려 죽었다. 하얗고 청량했던 광장은 순식간에 피로 물든 지옥이 되었다. 피 냄새가 너무 짙게 퍼져 숨이 막혔다. 내내 굳어 있던 소년들은 상황이 점차 걷잡을 수 없다는 걸 인지하자 드디어 도망칠 용기를 얻었다.
‘도망가자, 재스퍼.’
‘가야 해, 우리 죽어!’
그의 팔을 붙들어 끄는 친구 중 하나에 의해 재스퍼도 드디어 움직였다. 주저앉을 뻔한 걸 간신히 참고 덜덜 떠는 다리로 어린 소년 역시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미친 듯이 차올랐다. 그의 꿈에 잠든 기억에 압도되어 있던 쿠르투는 점점 그녀를 압박하는 재스퍼의 공포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어린 소년이 느낀 공포가 어찌나 무겁던지 숨이 막혀 왔다.
‘실드라스―!’
분노와 배신감에 찬 여인의 외침이 쩌렁쩌렁 숲을 울렸다. 도망가던 재스퍼는 여인의 그 목소리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여인은 그녀를 향해 쇄도하는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분명 같은 편으로 보였던 그들은 서로를 죽일 듯이 검을 주고받았다. 여인의 검은 무언갈 어떻게든 막고자 하는 모습이었다면, 남자는 어떻게든 상대를 죽이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사람의 싸움이 아니었다. 형체만을 간신히 목격할 수 있었을 뿐.
‘이 찢어 죽여도 모자랄 놈! 날 함정에 빠트렸구나!’
‘미쳐도 제대로 미쳤군. 세레나, 보거라. 이곳 어디에 니르아가 있단 말이냐. 네가 부리는 추악한 그림자 외엔 아무것도 없다!’
경합이 이어지다 잠시 멈춘 차, 남자는 확신에 찬 상태로 외쳤다. 그의 말에 여자가 순간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그곳엔 정말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죽어 널브러진 기사들의 시체만이 무언가 일어났다는 걸 말해 줬을 뿐, 거대한 그림자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그럴 리가?’
놀라서 흔들리는 목소리가 크게 광장에 울렸다. 그 모습을 보던 남자는 결심을 내렸는지 여인을 죽이기 위함이 분명한 동작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여인은 그걸 알고도 내버려 두는 건지, 아니면 너무 놀라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우뚝 멈춰서서 사방을 미친 사람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몇몇 기사들이 그 광경을 두려운 듯 경계하며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그만, 안 돼! 시르칸, 티테르의 처형은 그대의 권한이 아니에요!’
당장 여인을 죽이려던 검이 그 외침에 멈칫했다. 남자가 그의 등 뒤에 주저앉아 있던 왕후를 돌아보았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왕후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폭주가, 멈춘 것 같으니, 대공을 제압해 왕궁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오라버니가 나설 일이 아니에요.’
헐떡거리며 힘겹게 말하던 왕후는 서서히 진정하며 또렷하게 의견을 표출했다. 재스퍼는 그 찰나 남자의 검이 살짝 움직이는 걸 보았다. 분명 거리가 멀었는데도, 이상하게 검 끝이 흔들리는 모습만큼이 그의 눈에 잡혔다.
그렇게 멍하니 넘어져 있는 재스퍼를, 친구들이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와 이끌었다. 황급히 달려온 꼬마들이 양팔을 끌어 그를 일으켰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고!’
절박한 속삭임을 따라 재스퍼도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뛰어가는 그의 머릿속은 미칠 것처럼 죄다 꼬여 있었다. 나도 미친 건가? 분명 그림자 괴물이 사람들을 죽였는데, 왜 다들 그걸 못 본 것처럼 굴지?
‘너희도 봤지?’
속도를 내 친구들에게 따라붙은 재스퍼는 그들을 붙잡으며 물었다. 다급히 달려가던 소년 중 하나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고, 다른 하나는 화를 냈다.
‘우리는 그런 걸 봤어도 보지 않은 척 해야 해. 왕후가 저기 계셨잖아. 이런 건 우리가 있었다는 흔적도 남기면 안 돼. 높은 사람들의 일에는 절대 얽히지 말라고 아버지가 그러셨어!’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안 봤어!’
소년들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암묵적인 동의가 내려졌고 모두 입을 다문 채 최선을 다해 숲을 빠져나가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서서히 저 멀리 숲의 경계가 보였고, 저기만 벗어나면 도심으로 이어지는 큰길이 나올 터였다. 앳된 얼굴들에 안도감이 간신히 내려앉으려는 차,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쥐새끼들이 이렇게 많았네?’
나직한 청년의 목소리였다.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 재스퍼가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급히 멈춘 몸이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땅 위로 나동그라졌다. 분명히 대낮임에도 어둠이 내려앉은 듯한 숲속에서 붉은 눈이 보였다. 형체 없는 붉은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차, 그것은 재스퍼를 스쳐 가며 여전히 달리고 있던 소년들을 따라잡았다. 미끄러져 뒤로 접근한 어둠은 그대로 소년들을 삼켰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울리지 않고 달려가던 몸뚱이들이 엎어졌다. 털썩, 소리와 함께 힘이 빠진 작은 몸들이 인형처럼 땅을 굴렀다. 데굴데굴 엎어져 나무 몸통에 퍽 머리를 박고 멈추거나, 흙에 그대로 무너지는 친구들이 보였다.
공포가 움직임을 막았다. 온갖 숨구멍이 막힌 것처럼 컥컥대는 재스퍼에게 어둠이 다가왔다. 하하, 웃는 천진한 목소리가 울렸다. 꼭 머릿속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건 네게 맡겨 볼까, 시르칸?’
기절하기 직전의 재스퍼의 귓가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얗게 뒤집힌 눈이 깔딱거리며 넘어가려던 차, 금갈색 머리칼이 보였다. 착잡한 표정의 중년 사내는 죽은 아이들과 재스퍼를 번갈아 보더니 느릿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많이들 죽었으니 됐다. 네 힘이라면 충분히 세뇌할 수 있을 테니, 기억을 차라리 지워.’
‘네 알량한 양심이 집에 있을 어린 아들을 떠올렸나 봐?’
‘입 다물어.’
‘네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면 어차피 이 땅의 모든 것은 죽을 텐데, 이제 와서 인간다운 척 구는 게 더 역겹다는 걸 아나?’
그러나 말과 다르게 청년은 즐겁다는 듯 웃고는 재스퍼에게 가까워졌다. 어둠이 만든 흐릿한 형상을 마지막으로 재스퍼의 의식이 까맣게 잠겼다.
‘그냥은 재미없지. 그래, 재미있는 소문을 만들어 주자. 이런 것들이 모여 그들을 고립시킬 테니, 얼마나 즐거운 일이 벌어질지 기대되는걸.’
그 말을 끝으로 재스퍼의 기억은 끝났다.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점점 잠이 밀려들었다. 쿠르투는 그녀의 영혼을 잠식하는 공포를 피해 잠들고 싶어졌다. 보이는 것을 무아지경으로 내뱉던 쿠르투는 입을 딱 다물고 눈을 까뒤집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몸이 뒤로 쏠렸다. 그대로 무너지려던 쿠르투를 거센 손길이 콱, 잡았다.
침잠하려는 영혼을 끌어당기는 힘에 쿠르투는 헉! 비명을 내지르며 번쩍 정신을 차렸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 전신이 축축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발발 떨고 있던 몸을 억지로 추스르며 일어선 그녀는, 코앞에서 절 내려다보며 팔을 쥐고 있는 악시드 대공을 발견했다.
“대, 대, 대공….”
헐떡이는 목소리로 쿠르투는 대공을 불렀다. 불긋한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무 말도 없이, 부릅뜬 눈으로 쿠르투를 붙잡고 있는 사내의 엄청난 고통이 순간적으로 그녀에게 흘러들었다. 아아, 너무나도 날카롭고 뾰족해 몸 속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피부가 벗겨지고 혈관이 죄다 터지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또 고통스러웠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나 처절하고 절망스러울 수 있다는 게 두려울 정도로, 대공은 소리없이 절규하고 있었다.
그녀는 색이 사라진 회색 눈으로 형형히 절 내려다보는 대공에게 진심으로 슬픔을 전하고 싶었다. 방금 전 흘러온 기억이 너무나 거대하고 혼란했지만,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정말… 미안해.”
세간의 모두가 알고 있던 전대 대공의 폭주는, 사실 일어난 적도 없던 일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