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쿠르투는 텅 비어 있는 거대한 저택을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던 악시드 대공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흔적은 저택의 규모와 문양들뿐, 거미줄과 먼지가 내려앉은 빈 공간은 오히려 유령들이 사는 곳처럼 느껴졌다.
유령. 무서워.
그녀를 키워 준 데세르투스의 원로 중 한 명인 나나는 어려서부터 쿠르투에게 유령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다. 영혼을 잡아먹는 니르아가 죽고 나면 그것들에게 삼켜진 영혼은 니르아에게서 빠져나와 현실을 떠돈다. 그렇게 원한이 많은 유령은 살아있는 사람의 몸을 차지할 기회만을 노린다고 했다. 악마가 하는 짓을 그대로 배워서 그렇다나.
“……악시드 대공은 정말 유령을 부려?”
쿠르투의 뜬금없는 질문에 티아키가 고개를 젖혔다. 어디선가 주워 온 의자에 앉아, 그걸 아슬아슬하게 뒤로 젖히고 있던 바람에 그는 뒤집힌 얼굴로 쿠르투를 보았다.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나나랑……사람들이 그랬잖아. 북부의 티테르는 대대로 어둠을 다루니, 그 속에 숨은 유령을 조심하라고.”
재스퍼를 감시하라고 명하던 대공을 떠올리자 쿠르투는 괜히 그 말이 사실처럼 느껴졌다. 표정 하나 변함없이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것 같은 차가운 인상의 남자는, 숨이 막히게끔 잘생겼고 그만큼 위압감이 넘쳤다. 키가 워낙 크고 체격이 좋으니 움직일 때마다 그 기척이 잘 느껴질 법도 한데, 소리 없이 그들을 두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떠올리자 대공 자체가 유령처럼 여겨졌다.
“티키는, 몇 번 봤으니까…… 그런 모습을 봤나 싶어서.”
“대공 자체가 악령처럼 위협적이긴 하지. 그런데 티테르의 힘은 그런 게 아닌 걸 알잖아. 그들의 힘은 모두 니르아에 대항하기 위함이니 오히려 유령으로부터 보호하겠지.”
“그럼 우리의 힘도…… 원래는 니르아와 싸우기 위한 거야?”
그녀의 질문을 들은 티아키는 입을 다물었다. 쿠르투는 진심으로 의아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내 이상한 힘에도 달님의 뜻이 있는 걸까?”
쿠르투의 능력은 현실에선 종종 더러운 일을 캐내기 위해 쓸모가 있는 편이었지만, 니르아를 죽이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고작 기억을 읽는 걸로는 니르아와 싸우는 일에 힘이 되지 못했다.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마.”
티아키가 끝내 그녀를 질책했다. 날카로운 눈매 안으로 착잡한 기색이 어렸다. 데세르투스의 일원은 자라나며 한 번쯤은, 아니, 어쩌면 살아있는 평생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것이다. 그들에게 티테르의 조각이 깃들어 있는 이유가 뭐냐고.
드러내 쓸 수도 없는 힘이고 티테르처럼 완전하지도 않다. 그 덕에 정화가 없어도 폭주 같은 무시무시한 일이 생기진 않는다곤 하지만 다들 평생 몸속에 도사리는 실질적인 고통을 벗어 내지 못한다.
티아키의 경우 주기적으로 고열에 시달리며 악몽을 꿨고 쿠르투는 종종 본인이 느끼는 감각을 구분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통증이 사라져 손이 불에 데고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덕분에 쿠르투의 오른손은 흉측한 화상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우린 그냥 사고 같은 거야. 고귀하신 티테르들이 실수로 만든 자국 같은 거라고.”
“하지만 티테르의 힘은 반드시 니르아를 무찌르기 위한 거라며? 우리의 힘도 잘 살펴보면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의미 없는 가정은 그만하라니까.”
티아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자리를 피하려는 티아키의 뒷모습을 쿠르투의 시선이 따라갔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을 빠져나가려던 티아키는 문을 열고 우뚝 멈추더니,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방으로 돌아왔다. 이상한 행동에 쿠르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티아키가 물러난 문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기척도 없이 나타나시는군요, 대공.”
티아키가 살짝 질린 목소리로 악시드 대공을 맞이했다. 싸늘한 얼굴로 안에 들어선 사내가 망토를 벗었다. 너른 어깨에 걸친 망토부터 시작해 모든 게 검은색 일색인 사내는 얼굴만은 색이 옅었다.
그때는 시간이 어두워 몰랐는데 낮에 보는 대공의 머리칼은 햇빛 아래에선 잠시 은발처럼 보이는 검회색 머리를 지녔고, 눈동자는 예쁜 회색이었다. 피부도 남부에선 보기 힘든 창백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재스퍼는 잘 감시했나.”
홀린 듯 얼굴을 감시하던 쿠르투가 대공의 낮은 저음에 흠칫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깊게 울리는 저음은 듣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들어 괜히 조심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럼. 한번 깨어났을 때 수프 정도는 먹게 하고 다시 기절시켰지. 이 정도면 복지가 좋지?”
티아키가 뺀질거리며 답했다. 나나가 맨날 타박을 주는 뻔뻔한 태도에 쿠르투가 속으로 웃는데, 대공이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뭔갈 신경 쓰는 듯한 모습에 쿠르투의 시선도 그를 따라갔다. 거기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어디서 보기 힘든 장신의 대공보다도 키가 더 큰, 엄청나게 아름다운 남자가 보였다.
와. 진짜 예뻐.
반짝반짝하는 보석을 본 것처럼 단숨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흰 피부가 말로만 듣던 동화 속 공주 같았는데, 얼굴을 이루는 콧대며 입술은 남자답고 조각 같았다. 환상처럼 보이는 비현실적인 외모에 쿠르투가 입술을 벌렸다. 이상하게 눈에 담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 어어…?”
티아키 또한 쿠르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인지, 남자를 보자마자 바보 같은 소리를 냈다. 그 반응을 본 대공이 눈을 찡그리더니 티아키에게 매서운 말을 했다.
“정신 차리거라.”
그러자 티아키가 휙휙 고개를 흔들었다. 머쓱한 표정을 한 그는 얼른 허리를 숙여 보이며 상대에게 예를 표했다.
“이야, 저분이 정말 말로만 듣던 왕자님이셔? 안녕하십니까, 저는 티아키라고 합니다. 쿠르투, 너도 와서 인사드려. 고귀한 분이 친히 이곳에 와 주셨다고.”
쿠르투는 쫑쫑 달려가 그 앞에 섰다. 대공의 뒤에 있는 소문의 왕자님은 그런 그들을 보더니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갓 피어난 꽃잎처럼 보드랍고 향긋한 미소였다.
“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라고 들었네. 부족한 솜씨지만 도움이 되면 좋겠어.”
“부족한 솜씨라뇨!”
호들갑을 떠는 티아키를 대공이 표정 없는 얼굴로 쏘아보았다. 쿠르투는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너무 떨리는 바람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얼굴을 푹 숙였다. 그런 그들을 보던 왕자가 천천히 대공의 앞으로 나왔다. 얼핏 보기엔 대공이 훨씬 커 보였는데 이리 보니 왕자가 대공을 가릴 만큼 컸다. 호리호리한 몸집 같은데 신기한 일이다.
“그, 정화는 어떻게 받는 걸까요? 듣기로는 뭔가 닿아야 한다고 했는데…. 저희같이 미천한 것들이 왕족께 닿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티아키의 목소리는 덤덤해 보였지만 쿠르투는 그가 굉장히 긴장했음을 알았다. 보아온 세월이 얼만데. 그전까지만 해도 정화, 정화 노래를 부르더니 막상 왕족과 닿으려니 걱정되는 것 같았다. 쿠르투가 속으로 헹, 비웃고 있자 왕자가 다정하게 웃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 다행히도 나의 힘은 다양한 방식으로 쓸 수 있어서.”
왕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차분한 얼굴로 쿠르투와 티아키를 번갈아 보았다. 웃고 있는 입매와 달리 보라색 눈은 음색만큼이나 잔잔했다. 그러더니 팔을 들어, 하나하나 조각한 것 같은 흰 손을 둘의 앞에 내밀었다. 허공을 어루만지는 듯한 손을 쿠르투는 홀린 듯이 응시했다. 티아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시선이 손에 뺏긴 사이,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손끝으로부터 따듯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허공에 퍼지는 게 느껴졌다. 언제나 뾰족 가시처럼 피부 아래를 돌아다니던 쿠르투의 파장을 찾아 뻗어 온 기운은 빠르게 몸에 안착했다. 그러고는 괜찮다는 듯, 다정하게 가시 돋친 파장을 어루만졌다. 혈관을 틀어막고 있는 덩어리 같던 힘이 파스스 녹아 몸에 제대로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와…!”
쿠르투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티아키 또한 그걸 느끼고 있는 건지, 가픈 숨을 들이켜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왕자를 보았다.
“말도 안 돼. 살면서 이렇게 몸이 가뿐했던 적이 없는데…!”
티아키가 기쁜 듯한 얼굴로 외쳤다. 그러자 덤덤히 그걸 보던 대공이 쿠르투를 보며 물었다.
“네 상태는 어떤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하면 돼?”
사람의 기억을 읽는 건 어릴 때 실수로 한 번 해 본 뒤 절대 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상태라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티아키가 손짓을 했다. 얼른 그의 옆으로 간 쿠르투는 내내 잠들어 있는 재스퍼의 앞에 섰다. 그는 벽에 기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평온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보고 있자니 낮잠이라도 자는 것 같았다.
“깨운다?”
티아키의 말에 왕자님이 나섰다. 기사를 차분히 내려다보던 왕자가 조심스레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더니, 재스퍼와 시선을 마주치며 그를 깨웠다.
“재스퍼, 일어나.”
깊게 잠든 것 같았는데 재스퍼는 왕자의 부름이 들리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왕자를 본 그가 어… 하는 우스운 소리를 흘렸다.
“주군?”
“그래. 갑작스러운 일에 많이 놀랐을 텐데, 다친 데는 없나?”
“…지금 제가… 어디 있는 걸까요? 그러니까… 어제 분명 대공의 부름을 받고….”
그리 말하던 재스퍼는 곧 뒤에 있는 대공을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벽에 붙였다.
“힉, 히익…!”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가 대공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다급한 목소리로 그는 왕자에게 고했다.
“아, 악마입니다! 저 악마가 어제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주군! 꼭 광장의 그 여자처럼…!”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본 대공이 쿠르투에게 눈짓했다. 쿠르투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재스퍼에게 다가갔다. 다가오는 쿠르투를 보지 못하는 건지 기사는 오직 대공만을 보며 악을 썼다.
“니르아가 나타날 거야…! 전하, 피하십시오!”
몸부림치려는 그를 왕자가 잡았다. 흰 손이 재스퍼의 손을 꽉 잡더니 그가 차분히 속삭였다.
“대공은 널 해치지 않아, 재스퍼.”
조용한 목소리를 따라 재스퍼가 발작을 잠시 멈췄다. 흐느끼는 그에게 다가온 쿠르투가 얼른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그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짙은 공포가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어린 소년의 마음이 쿠르투에게도 흘러 들어왔다. 어찌나 짙고 큰 두려움인지 쿠르투의 몸도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광장이… 광장이 보여요.”
쿠르투는 그의 기억에 같이 묻혔다.
화창한 봄날, 푸른 나무가 둘러싼 축제 광장에 기사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광장의 중앙에 세워진 돌로 만든 단상에 왕자님과 같은 검은 머리의 여성이 보였다. 그녀는 웃으며 금갈색 머리칼을 한 중년과 대화하고 있었다. 기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중년에게는 남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티테르, 티테르 같았다.
재스퍼의 시선은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숲에 몰래 숨은 재스퍼의 옆에는 숨죽이고 있는 소년들이 있었다. 속삭임이 들렸다.
‘저기, 저기 저분이 왕후 폐하 아니야? 우리 어떡해? 걸리면 사형 당하게 될 거야.’
축제 광장에 늘어선 나무는 봄철이면 맛있는 사과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종종 먹을 게 없는 수도의 평민들은 열매를 따기 위해 몰래 이곳에 숨곤 했다. 왕실의 나무이지만 엄격하게 관리하진 않아 평민들의 봄철 주식이 되기도 하는데, 아마 그런 목적으로 숨은 어린 것들이 곤란하게 갇힌 모양이었다.
그러다 재스퍼의 시선이 긴 은발을 늘어트린 여인에게 멎었다. 여인은 왕후와 남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보고 있었다. 뭔가를 경계하는 듯하던 뒷모습이 이내 굳더니, 곧 숲으로부터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무 그림자가 뭉친 것처럼 보인 이상한 그림자는 소름 끼치게도 점점 커지더니, 바닥에서 솟아났다.
‘실드라스, 뒤를 봐! 뒤에…!’
여인은 경악한 목소리로 외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의 경고를 따라 광장에 있던 금갈색 머리의 중년이 뒤를 돌았다. 왕후가 있는 단상 뒤쪽으로 바닥에서 솟아난 그림자 덩어리가 꾸물거리며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진실로 기이했다. 하늘을 밝히는 태양이 환한데, 동떨어진 어둠 하나가 하얀 광장을 빠르게 기어갔다. 뱀의 형상을 한 그것은 사람의 두 배에 달하는 높이로 왕후에게 기어가고 있었다.
‘니르아가 왕후 폐하를 노린다!’
경악한 여인의 외침을 따라 기사들이 반응했다.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뒤돌아보는 왕후를 중년 남성이 낚아챘고, 왕후가 있던 곳으로 니르아가 그림자를 뻗쳐 왔다. 그 근처를 지키던 기사 몇 명이 까만 뱀의 아가리에 그대로 잡아 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