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정화…!”
티아키가 놀라운 듯 탄식했다. 조건으로 그걸 내걸었던 주제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던 건지, 기뻐하는 얼굴로 그가 되물었다.
“소문의 왕자님을 설득한 거야?”
당사자에겐 아직 말도 꺼내지 않았다. 세이아드는 입을 다물고 일단은 쿠르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을 굴렸다. 깊게 생각하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아프게 되면, 해 볼게.”
“정화를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우리는 평생 부작용을 달고 사니까, 그것만 해결한다면 분명 가능성이 있어.”
세이아드는 한숨을 삼켰다. 애당초 티아키가 내건 조건이었기도 하니 결국 생각해 봐야 하는 일이었는데, 원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그 상황이 닥쳤다. 당장 얼굴 보는 것이 제일 껄끄러운 이를 자처해서 만나러 가야 한다니.
믿어도 되는 건가?
이들과 교류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레사스가 데세르투스 자체에게 해를 끼칠 인물이 아님을 알지만, 그는 실드라스를 옆에 둔 사람이기도 했다. 거듭하여 시온이 그의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 왔어도 세이아드는 몇 번의 말보다는 긴 세월 그가 보아 온 것을 믿었다. 고작 말 몇 마디에 레사스를 신뢰하는 게 외려 어리석었다.
게다가 재스퍼가 실드라스 기사단에서 굳이 레사스의 수하로 오게 된 경위도 의심스러웠다. 시온이 그를 통해 레사스를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고, 레사스가 이걸 알고 있었는지도 의심되었다. 삽시간에 혼란스러워진 마음에 세이아드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또다시 누군갈 믿어도 되는 건가?
지난 과거, 분명 아스테르와 공동의 목표를 두고 함께 하고 있다고 믿었다. 아무도 찾지 않던 세이아드를 찾아 주며 그를 대변해 주겠다 했던 따스함에 멍청하게 넘어갔다. 그러나 결국 세이아드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고, 아스테르는 중요한 순간에 그를 버렸다.
저 자신이 부족해서 생긴 일임을 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없었으니 버림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결정적인 찰나에 믿었던 이가 제게 등돌린 걸 겪던 순간이 세이아드에게는 고작 반 년 전의 일이다.
레사스에게는… 아스테르에게 원했던 걸 바라는 건 아니니까.
이들을 내비친다면 그는 레사스에게 어머니의 일을 조사하고 있음을 토로하는 꼴이다. 그가 시온의 편이라면 분명히 이 일은 그의 귀에 들어가 방해받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레사스가 자꾸만 강조하던 말이 어쩌면 조금은 진실일 수 있겠지.
“내일 낮에 여기로 돌아오지. 왕자를 데려올 테니 이 기사를 감시해.”
“정말 가능한 거요? 내가 요청하긴 했지만, 대공이 둘째 왕자와 썩 좋은 관계가 아닌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잖아.”
세이아드 또한 분명 그런 줄 알았다. 필요에 의해 그에게 접근하던 때도 그같은 관계가 바뀔 거라고는 여기지 못했는데….
“네가 신경쓸 바 아니다. 원했던 것을 들어주는 점이나 확실히 하지.”
“정화만 받아 본다면야 앞으로 성의껏 각하를 돕는 건 보장된 일 아니요? 지금까지도 이렇게 충실한데.”
유들거리는 티아키의 발언에 세이아드는 입을 다물었다. 복잡한 마음에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그는 경고같은 부탁을 남겼다.
“잘 감시해.”
“걱정 붙들어 매시고.”
티아키가 손을 흔들자 옆에 있던 쿠르투도 손을 흔들었다. 망토 사이에서 삐죽 나온 손이 살랑거리는 걸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세이아드는 저택을 떠났다.
왕궁의 거처로 돌아가면 재스퍼의 일로 인해 누군가 와 있을 거라고 내심 예상했는데, 돌아왔을땐 별 일이 없었다. 대신 퀼리만이 세이아드를 위해 엄청난 것을 사 왔다며 수도에 파는 온갖 단 것들을 내밀어 호들갑을 떨었을 뿐이다.
레사스가 재스퍼의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 스쳐 간 기사가 이미 셋이나 되니 모두 그에게 보고했을 텐데, 그걸 알고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억지로 휴식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을때도 레사스의 속내를 알기 어려워 그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새벽 해가 동쪽에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세이아드는 눈을 떴다. 채비를 끝낸 그는 어떤 식으로 레사스를 마주 볼지를 고민하며 아침을 보냈다. 그 사이 마저 훑어본 서고의 다른 책에서는 마땅히 얻은 결과가 없었다. 대신 그가 한번도 본 적 없던 설화를 하나 읽었다.
악마는 달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그를 데려오고 싶어했으나, 달이 태양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 태양을 질투했다. 달은 언제나 태양의 주위를 돌며 그가 하늘에 없을 때에도 항상 같은 자리를 지켰다. 악마는 숭고한 마음의 타락을 가장 기쁘게 여겼으므로, 달의 순수한 애정을 물들이고 싶어했다.
건국 설화에는 원래 많은 해석과 이야기가 따라다녔다. 니르아가 존재하게 된 근원인 악마가 왜 태양을 이길 수 없던 것인지부터 시작해, 악마가 어떻게 태양을 삼켰는지 따위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오갔다. 왕궁에서도 늘 그 흔적을 찾아다니며 연구하는 주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중 어느것도 확실하다 정해진 것은 없었다.
책을 닫은 세이아드는 더는 미루기 힘듬을 인정하고 레사스의 궁으로 향했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따라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졌다. 그의 정원 입구까지 도착했을 때엔 아예 걸음이 멈췄다. 레사스를 만나는 순간 그의 껄끄러운 감정이나 표현을 듣는 게 벌써부터 답답해왔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다. 순수하고 맹목적이던, 아꼈던 동생같은 이와 관계를 회복한 건 생각보다 기쁜 일이었는데… 그것이 버젓이 성장한 사내와의 기묘한 관계로 바뀌자 아예 새로운 관계를 맺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멈춰있던 세이아드는 정원 너머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기운은 얼추 두 명.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이들의 모습이 보이자 세이아드의 입매가 일자로 굳었다. 만나야 하는 사람이 공교롭게도 딱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레사스는 남청색 코트 아래에 흰 셔츠를 입은 비교적 편안한 차림이었다. 종아리까지 오는 가죽 부츠를 신고 정원을 거니는 것이 아침 산책을 하는 와중 같았다. 표정 없는 하얀 얼굴이 무심히 정원의 꽃을 훑다가, 느릿하게 정면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정확히 세이아드와 시선을 마주쳤다.
“어!”
레사스의 곁에 있던 바인이 세이아드를 먼저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레사스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저기 재스퍼의 납치범이 계십니다…!’
저 정도 거리의 귓속말은 세이아드의 앞에서 지껄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일반인이 알 턱이 없다. 납치범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모두 재스퍼가 사라진 걸 알고 있다는 건 확실한데….
멈춰선 세이아드에게로 레사스는 천천히 걸어왔다. 점점 가까워짐에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잘생긴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어제 점심의 애끓던 목소리가 거짓같았다.
‘당신이 웃는 걸 보고 싶어 안달난 눈앞의 사내가 보이지 않나요, 대공?’
매실 절임을 삼키던 분홍 입술이 그리 속삭이는 걸 회상한 찰나,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앞에 멈췄다. 서너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레사스가 먼저 그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공.”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수상쩍어하면서도 세이아드는 그의 인사를 받았다.
“…이른 시간부터 산책하고 계시는군요.”
“날씨가 무척 아름다워 그냥 있기 어렵더군요.”
겉도는 대화가 이어졌다. 그사이 옆에서 바인은 어떤 식으로 세이아드를 대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대한 그의 용건을 아는 이가 적어야 하기에, 바인을 물리라는 요청을 할까말까 고민했다.
그러나 제 입으로 바인을 물리라 말하면 자신의 의지로 레사스와 단둘이 있는 걸 원한다고 여겨짐이 불편했다. 레사스에게 어떤 빌미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사스가 느끼는 감정은 착각이 확실하지만, 그래도 그 착각이 깊어지는 건 지양하고 싶었다.
“바인, 너는 이만 물러가도 돼. 대공께서 용건이 있으신 것 같으니.”
“하지만 전하를 지키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호위 기사는 꼭 한 명 이상을….”
“솔리아스에서 가장 강한 분께서 내 옆에 있을 터인데,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어.”
레사스가 나긋하게 말했다. 바인은 그게 아니라는 듯 입술을 방긋거리다가,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는 갖추었는지 망설이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다가 멈추길 여러번 반복하면서 겨우 바인이 물러나고 나서야 세이아드는 입을 열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네, 말해 주세요.”
데세르투스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사전 설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말로 풀기보다는 일단 그를 적당히 유인해 데리고 나간 뒤, 직접 보여 주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세이아드는 한참을 망설이다 입술을 뗐다.
“감사제가 한창이라 수도 곳곳이 축제더군요. 수도는 오래간 오지 않았던지라 전하께서 안내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축제가 보고 싶었나요?”
레사스의 눈이 그 순간 둥글게 휘었다. 입술은 여전히 덤덤한 모양이었으나, 일순 눈웃음으로부터 ‘귀엽다’라며 저를 구경하던 모습이 겹쳐져 불편해졌다. 세이아드는 정색과 함께 변명을 만들었다.
“선물을 사기엔 수도의 축제가 좋다고 전부터 들은바 있어, 그걸 부탁드리려고 했습니다.”
웃고 있던 레사스의 눈이 차분해졌다. 그는 보라색 눈으로 세이아드의 속을 꿰뚫을 것처럼 한참이나 그를 보다가, 어쩐지 낮아진 음색으로 물었다.
“선물을 주고 싶은 분이 계시나 봅니다.”
무표정인 것은 아까와 비슷한데, 이상하게 레사스의 기분이 갑자기 저조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