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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53화 (53/147)

#53

재스퍼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붉은 머리라는 것이 원래 흔치 않은 데다가 쉽게 눈에 띄는 편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레사스의 궁 입구에 있는 순찰대로부터 그를 가려 냈다. 재스퍼는 세이아드가 알아볼 수 있는 다른 기사와 있었다. 늑대를 처리했던 날 바인과 있던 모나라는 이였다.

일부러 기척을 눈치챌 수 있게끔 다가가자 모나가 먼저 반응했다. 고개 돌린 그가 놀란 눈을 하더니 얼른 세이아드에게 왕궁식 예를 표했다.

“악시드 대공 각하, 안녕하십니까.”

모나의 말에 붉은 머리의 기사가 흠짓 시선을 돌렸다. 주근깨가 박힌 앳된 얼굴이 세이아드가 찾던 이가 맞았다. 세이아드를 발견하자마자 그의 눈에 두려움과 적개심이 동시에 어렸다.

이상하다, 확실히.

그의 저런 시선 자체는 세이아드가 지겹도록 마주해 온 것이다. 그의 낯선 능력에 대한 두려움인 동시에 악명에 대한 적개심은 그를 항상 따라다니는 동반자였다. 그러나 레사스 수하의 기사들에 비해 유독 세이아드를 저렇게 느낀다면 개인적인 이유가 있다는 거였다.

“…안녕하십니까.”

뒤늦게 재스퍼가 모나를 따라 인사했다. 마지 못해 예를 갖추는 것이 담대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죽고 싶어 환장했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저자를 잠시 데려가겠다. 잠시간의 부재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하지.”

세이아드는 모나에게 용건을 밝혔다. 갑작스러운 선언에 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재스퍼의 눈이 뒤늦게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네, 알겠습니다. 저는 다른 곳을 순찰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나 모나는 눈치가 빨랐다. 상급자의 명에 빠르게 응한 그가 자리를 비켰다. 세이아드는 주변을 훑었다. 딱히 그를 감시하는 이나 보고 있는 눈은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올 내용은 무척이나 민감한 것인지라, 세이아드는 재스퍼에게 명했다.

“따라오거라.”

“주, 주군께 허락은 받으신 겁니까?”

고분고분하게 따라오고 싶지 않은지 재스퍼가 대꾸했다.

“내가 그래야 할 사람으로 보이나?”

세이아드는 살기를 드러냈다. 언제나 파장과 함께 그의 안에 갈무리된 날카로운 기세를 풀어 그를 압박하자, 재스퍼의 안색이 하얘졌다. 우물쭈물하던 그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는 걸 보며 세이아드는 조용한 장소를 찾았다. 중앙궁의 구조는 연회 이후 틈틈이 파악하는 중이나 아직 완전히 눈에 익진 않아서, 과거 레사스가 쓰던 남쪽 궁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곳은 예나 지금이나 세이아드가 아니면 찾는 이가 없었다.

아니, 시온 실드라스가 있기는 했지.

“실드라스에서 왔다고 들었다. 시르칸 실드라스가 널 직접 거뒀다지.”

인적이 완벽히 사라지고 남쪽 궁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을때쯤 세이아드가 입을 열었다. 땅을 보고 걷던 재스퍼가 흠칫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분노에 가득찬 눈으로 대꾸했다.

“전대 공작 각하를 존중해 주십시오.”

“묻는 말에나 대답해.”

“네, 저는 위대하고 공정하신 전대 실드라스 공작께 거둬졌습니다! 배회하던 저를 알아봐 주시고 직접 거둬 주셨죠.”

재스퍼는 실드라스의 명성을 말할 때면 따라붙는 수식어를 강조하며 외쳤다. 정면으로 부딪혀 오는 적개심을 무시하고 질문을 이어 갔다.

“그게 언제였지?”

“열네 살 때입니다.”

오 년 전이다. 시기가 기이할 정도로 맞물렸다.

“봄쯤이겠군, 그러면.”

반 정도 확신을 가지고 내뱉은 말에 재스퍼는 아주 솔직히 반응했다. 동그랗게 뜬 눈이 흔들렸다.

“너 정도 되는 재능은 이 땅에 널리고 널렸다. 다른 이도 아닌 시르칸 실드라스가 고작 너같은 놈을 찾아 거둘 이유는 없어. 내 눈에는 별개의 이유가 있는 걸로 보이는군.”

재스퍼는 시선을 눈에 띄게 피하더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닙니다. 공작께서 직접 제게 그리 말하셨습니다.”

“어디서 널 발견했지?”

재스퍼의 어깨가 그 순간 부르르 떨렸다. 기사답지 않게 과하게 겁을 먹은 그는 세이아드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그건….”

움츠린 채 흘끗 고개를 든 재스퍼는 세이아드를 보더니, 그날 숲에서 보았던 것처럼 공포에 질린 얼굴로 속삭였다.

“솔리아스의 악마에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악마에게는… 악마를 부리는 힘이….”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겁대가리를 상실해 죽음을 자처하긴 했어도 이지가 확실했는데, 자세히 살피자 눈의 초점이 없었다.

“너….”

세이아드가 다가가자 재스퍼는 기사의 체면이나 본분도 잊은 채 허억,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 팔을 뒤로 뻗어 손으로 바닥을 밀며 도망가려는 모습이 기이했다. 그는 세이아드와 허공 사이를 보면서 덜덜 떨었다.

“솔리아스의 악마…! 악마가… 사람을, 사람을 죽인다…!”

숲에서 봤던 모습이 저랬다. 그때는 니르아가 전염시키는 공포에 의한 반응이라고만 여겼던 것이, 지금보니 무언가 그의 정신을 건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세이아드가 다가가려 할수록 발작이 심해지더니 재스퍼는 곧 머리를 감싸쥐며 웅크렸다. 소변을 지렸는지 다리 사이로 액체가 흐르는 게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상체를 숙인 세이아드가 재스퍼의 뺨을 쳤다. 거센 힘으로 내리치는 손길에도 재스퍼는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같은 말만 반복하는 그의 눈이 반쯤 뒤집혀 있었다. 세이아드는 유심히 그 얼굴을 살폈다. 세이아드의 생전엔 본 적 없는 광경이긴 하지만, 티테르의 역사에 대해 배울 때 읽었던 어떤 현상이 떠올랐다.

‘정신 세뇌의 힘에 당한 민간인은 기폭제를 건드렸을 때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그 힘을 다루는 것은 아주 섬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는 갑작스러운 이성의 상실, 금제한 기억에 대한 반복적인 발언, 지나친 거부 반응과 공포심이 있다.’

티테르의 힘은 각성 전까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티테르는 대대로 발현되었던 과거의 힘에 대해 기록해 둔 서적으로 교육을 받는다. 능력이 먼 시간을 되돌아와 겹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이같은 예시와 사용법은 필수적으로 기록되는 게 의무였다.

지금 세이아드가 보고 있는 증상이 기억에 있던 책의 내용과 일치했다. 물론 재스퍼의 갑작스러운 발작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무수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높은 확률로 세이아드가 파헤치는 일과 연관되어 보였다.

일단 이대로 몰아붙이면 겨우 찾은 실마리를 잃을 확률이 크다.

세이아드는 입에 게거품을 물기 시작한 재스퍼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고문이나 압박으로 알아낼 수 없어 보이는 상태라, 다른 방법을 찾는 쪽이 나아 보였다.

“너는 잠시간 나와 있어야겠다.”

기억하지 못할 확률이 크지만, 세이아드는 그리 말한 후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어린 청년의 목을 꽉 압박했다. 피가 흐르는 부위를 일정한 힘으로 짧게 누르자, 재스퍼가 몸을 부르르 떤 뒤 정신을 잃었다. 눈을 까뒤집으며 땅으로 털썩 누운 그를 세이아드가 굳은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정신 세뇌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능력이다. 전대 실드라스 공작의 능력 또한 그와 거리가 멀었다. 그의 힘은 보이지 않는 기운에 실체를 주는 것이었다.

상황이 예상보다 더 기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나 형체조차 잡히지 않던 어머니와 얽힌 일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이 느껴졌다. 묵직하게 그의 가슴을 누르는 불길함이 세이아드를 선득하게 했다.

***

세이아드는 재스퍼를 궁 밖에 있는 그의 저택으로 데려갔다. 몇 년 내내 폐쇄되어 아무도 쓰지 않던 프로시어스 소유의 수도 저택을 이런 식으로 다시 방문하게 될 것이라곤 몰랐다. 왕실에게 반쯤은 압류되어 소유권은 그들에게 있으나 떳떳하게 쓰게끔 돌려받지도 못한 저택은, 굳게 닫힌 대문에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방치되어 있는 저택은 죽어 버린 정원수로 인해 삭막하고 스산했다. 거미줄이 내려앉고 먼지가 곳곳에 있는 그곳으로 들어가자, 어릴 적의 기억이 올라왔다. 수도에 들를 때면 이곳에 머물러 가족끼리 웃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여긴 것이 알고보니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루도 레사스를 피할 틈이 없군.

재스퍼에 대해 묻고 다녔으니 오늘 내로 레사스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갈 테고, 대놓고 그를 데려왔으니 당연히 연락이 올 것이다. 저대로 기사단에 돌려보내는 것도 생각했었지만 지금 시점에서 재스퍼가 도주하는 가능성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가 재스퍼에게 관심을 보였으니 누군가 그를 빼돌릴 가능성 또한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적이 분명 있다.

가장 크게 짐작 가는 대상은 시온 실드라스였다. 실드라스와 얽혀 시작된 일이니 분명 그럴 것이다. 왕후까지 연류된 일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 더 끼어들어 있는지는 이제부터 재스퍼를 통해 밝혀 낼 사안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냈군, 대공 각하.”

등 뒤에서 티아키의 음성이 들렸다. 이곳에서 만나자는 수신호를 보내 놨는데 다행히 빠르게 확인한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그의 옆에는 세이아드가 데려오길 청했던 데세르투스의 일원이 보였다. 재스퍼를 찾는데 공헌한,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자였다.

“이쪽은 쿠르투. 대공께서 빚을 지는 게 바로 이 녀석이야.”

쿠르투는 체구가 작은 여성이었다. 푸석한 검은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모습이 길가의 부랑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세이아드를 주시하는 까만 눈에 도는 이채가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쿠르투는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세이아드를 빤히 보았다.

“네가 사물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사람의 기억도 훑어볼 수 있나?”

“……하면, 내가 아파.”

쿠르투는 작게 속삭였다.

“이미……힘을 많이 써서 제대로 집중할 수도 없고…….”

티아키가 끼어들어 대변했다.

“말했지. 우리는 반쪽짜리 놈들이라 능력을 원하는 대로 마구 쓸 수 없어.”

읽을 수는 있단 소리군. 세이아드는 미간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티아키가 제시한 조건이 떠오르면서 그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능력의 대가가 어떤 고통을 주는지는 그 자신이 제일 잘 알았고, 효율이 떨어진 상태로 쿠르투를 몰아붙이는 것도 낭비였다.

“그렇다면 정화를 받는다면 가능한가?”

정말로 내키지 않지만, 세이아드는 결국 그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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