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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51화 (51/147)

#51

세이아드는 짧은 기침을 뱉었다. 달큼하게 퍼지던 사과 맛도 잊혀질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그는 서른 해 평생을 통틀어 귀엽다는 표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에도 세이아드는 차기 대공이 될 의젓한 소년이었고, 행동거지가 귀여운 건 그의 동생인 세실리아였다.

기겁할만한 발언에 놀란 세이아드가 한 입 베어물은 사과 튀김을 더는 먹지 않자, 레사스가 물잔을 내밀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런가요? 맛이 별로였나요? 방금 전엔 맛있게 드시는 것 같았는데요.”

“구경거리가 되는 기분이 썩 좋진 않군요.”

방금 전의 표현에 대해 묻는 것조차 꺼려져 세이아드는 왜 그런 말을 했냐고는 추궁하지 않았다. 실수든 고의든 이유를 알기 싫었다.

“아, 미안해요. 옛날부터 대공이 단 음식을 좋아하는 걸 귀엽다고 생각했거든요. 간만에 그런 모습을 보니 보기 좋아 눈을 떼기 어려웠어요.”

세이아드는 포크를 놓았다.

“…딱히 좋아하지 않습니다.”

식욕이 일지 않아 손이 가는 대로 두었더니 실수를 했다. 세이아드는 남들에게 얕보일 수 없없게 된 시기부터 그를 하찮게 볼 수 있는 모든 면을 거세했다. 단 걸 찾는 행위도 그쯤부터 그만두었을 것이다. 사람은 외양으로부터 지레 상대를 짐작하는 성향이 있어서, 그 기대를 어긋나는 행위를 보면 불필요한 평가를 더했다.

레사스는 포크를 내려놓은 세이아드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름다운 얼굴 위로 곤혹스럽다는 표정이 떠오르더니, 그가 다른 음식을 집어 세이아드의 앞에 놓았다. 누가 봐도 달아 보이는 매실 절임이었다.

“그렇다면 매운 음식은 어떠신가요?”

세이아드가 눈을 찡그리자 레사스는 절임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분홍빛 입술 아래로 새큼한 과육이 반쯤 사라졌다. 절대 매울 일이 없을 절임을 먹고 레사스는 매운 척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에게나 통할 장난에 세이아드는 순간 기가 막혔다. 헛웃음을 치자 가당치도 않은 연기를 하던 레사스가 멈칫 굳었다.

“전하께서는 제가 열 살 난 아이라도 되는 줄 아시나 봅니다.”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꼴이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해 버석한 냉소를 흘리는 것을 레사스가 멍하니 구경했다. 조소가 멎을 때쯤 레사스가 어딘지 간절한 기색으로 물었다.

“…내 행동이 우스웠을까요?”

어째서 그리 묻나 싶어 그를 살폈다. 전과 다르게 그를 비웃을 생각은 없었지만, 아까 전의 행동은 그냥 어이가 없었다.

“비웃으려던 것이 아니라 기가 막혔을 뿐입니다.”

“내가 또다시 그렇게 굴면, 방금처럼 웃어 줄 수 있나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웃는 걸 보고 싶어서요.”

포크를 놓은 채 식탁에 올려져 있던 왼손으로, 레사스의 손이 살며시 다가왔다. 조심스레 뻗어진 손가락이 세이아드의 손등을 문질렀다. 손끝이 간질거리며 흉터를 매만졌다.

“내가 어떻게 해야 그대가 예전처럼 웃어 줄까요?”

긴 시간 마음에 담아 둔 듯한 말이었다. 진심으로 고뇌하는 목소리로 묻는 레사스의 모습에 세이아드의 말문이 막혔다. 스스로도 잊어버린 지 오래인 부질없는 모습을 레사스가 찾고 있다는 것이 마음 어딘가를 찔렀다.

그게 대체 뭐라고.

“본다 한들 도움될 것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드가 웃는 모습은 무척이나 예쁜 걸요.”

손등을 간질이던 레사스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반대 방향에서 깍지를 끼며 그가 손가락을 매만졌다. 귀엽다느니 예쁘다느니, 사람을 꾀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 것이, 나이도 어린 주제에 사람을 유혹하는 법을 잘도 배웠다 싶었다.

그러나 대상이 잘못되었다.

“그런 말은 제가 아닌 시온 실드라스에게 하십시오.”

“…시온이요?”

레사스의 흰 미간이 설핏 굳어졌다.

“왜 내가 시온에게 그런 말을 해야 하나요?”

거야….

세이아드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잡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래간 그래 왔다는 것처럼 익숙한 모습은 분명 둘 사이에 무언가 있음이 명백했고, 가까운 미래에 둘은 깊은 관계가 될 터였다. 기억하는 것들이 바뀌긴 했지만 시온과의 관계는 그다지 변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때가 이른 모양이었다. 둘은 언제나 친밀했던지라, 연인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시기도 정확하지 않았다.

하긴, 레사스는 이제 스물하나다. 전처럼 시온과 깊은 관계가 되려면 아직 세월이 더 필요하려나.

그리 생각하는 세이아드에게 레사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대는 분명 시온을 보고 싶지 않아 하면서 왜 자꾸 나에게 시온에 대해 말하는 건가요? 지금은 온전히 나와 대공만의 시간인데?”

허를 찔린 세이아드가 입술을 달싹였다. 레사스의 말대로 세이아드는 시온이 레사스의 곁에 있는 모습을 보면 자신이 그 모습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무의식중에 자꾸만 레사스가 시온과 함께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오랜 시간 보아 왔던 모습이라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면 분명 시온 실드라스가 레사스의 곁에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다.

하지만 동시에 혼란스러웠다. 이미 너무 많은 과거의 궤적이 바뀐 차인데, 시온과 레사스의 관계까지 바꿔야 할까? 어차피 그는 이제 목표한 바를 이룬 상황인데?

게다가 세이아드는 지금 이 순간 티테르가 하나라도 더 멀쩡히 존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숲을 없앤다는 목적을 위해서라도, 레사스가 시온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건 전략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쨌든 레사스의 힘은 세이아드가 독점하는 것이 아닌 티테르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도구였다.

“어쨌든 전하의 티테르는 시온이니, 칭찬을 하더라도 그에게 하는 것이 옳다는 뜻이었습니다.”

둘이 연인이 될 것이란 믿지 못할 소리 대신 세이아드는 합당한 말을 꺼냈다. 그러나 레사스의 표정은 외려 더욱 굳어졌다. 하얀 얼굴 위로 균열이 갔다. 유려한 눈썹이 괴로운 듯 휘더니, 레사스가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대공은 내가 다른 티테르를 정화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나요?”

겹쳐진 레사스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세이아드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단호히 대꾸했다.

“거슬릴 이유가 있습니까?”

레사스가 시선을 들었다. 아까부터 짓고 있던 아파 보이는 표정이 더해졌다.

“외려 전하의 힘이 없으면 곤란한 티테르가 둘이나 있습니다. 전하가 원하시는 것처럼 숲을 없애기 위해서는 티테르의 상태가 양호한 편이 무조건적으로 유리하니, 기실 저에게만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베트리아나 실드라스 또한 살펴보시는 게 맞습니다.”

“그게 대공이 원하는 건가요?”

“네.”

세이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점은 예전부터 분명히 했었다. 그는 레사스가 자신만의 가이드가 되길 원한 적 없었다. 아스테르의 정화를 대체하고 제 폭주를 막는 것이 레사스에게 바라는 전부였다.

“내가, 그대를 좋아한다고 했는데도?”

레사스의 마음은 종잡기가 어려웠다.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의아해져 세이아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분명 레사스는 어제 그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었다.

“전하께서 제 불경한 행동에도 한결같이 과거의 우정을 간직해 주신 점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왜 언급되는지는 모르겠군요.”

“나는… 대공을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가이드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거예요.”

레사스의 어조가 묘했다. 세이아드는 그의 모습으로부터 아버지가 아닌 타인과 닿기 싫다고 말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설마, 싶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좋아한다는 의미가….”

서로 만난 시기가 까마득한 옛적이다. 동생처럼 아끼며 다뤘고 레사스 또한 저를 아스테르를 대신한 형처럼 따랐다. 그렇게 서로를 알다가 한참을 단절되어 지냈으니, 지금 그가 물어보려는 ‘그 감정’이 레사스가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영 꺼림칙한 마음에 세이아드는 결국 물어보았다.

“정인에게나 말할 법한, 그런 의미인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레사스는 자꾸만 세이아드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네, 맞아요.”

깍지 낀 손가락을 빼낸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손을 꽈악 붙들었다. 손등을 덮는 손바닥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지금도 당장 그대에게 입 맞추고 싶은 것을 참고 있어요. 당신이 웃는 걸 보고 싶어 안달 난 눈앞의 사내가 보이지 않나요, 대공? 나는 아주 분명히, 그대가 다른 이를 입에 담는 걸 남자로서 참기 힘들다고도 어제 말했을 텐데요?”

세이아드는 목울대로 낮은 침음을 삼켰다. 레사스의 첫 입맞춤을 가져가 버린 것이 저라는 걸 잠시 간과했다. 난생 처음으로 혀를 섞고 자극적인 행위를 했으니, 그로부터 비롯된 욕정을 애정과 착각했을 것이다. 정화란 모름지기 그런 것이다. 힘과 힘이 이끌려 만든 욕정이 눈을 가리고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착각하신 겁니다. 정화를 처음 하셨으니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몸이 닿는 행위니 성욕이 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여러 가지 욕망이 섞인 것을 전하께서 구분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단칼에 그의 말을 자르자 레사스의 입술이 꾹 닫혔다. 잘생긴 얼굴에 우수가 어렸다. 보랏빛 눈이 괴로운 듯 잘게 떨리다 서서히 평정을 찾았다.

“내 마음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대공.”

레사스는 꽉 쥐고 있는 손을 당기더니, 세이아드가 손을 무르기도 전에 그의 손등 뼈 마디에 입술을 묻었다. 깃털에 파묻힌 듯한 보드라운 감촉이 손등을 간질였다.

“나는 다만, 아주 긴 시간을 숨겨 왔을 뿐입니다. 정말로 긴 시간을요.”

순간 그리 말하는 레사스의 목소리는 어린 청년답지 않게 아주 지쳐 보여서, 세이아드는 이번만큼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레사스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세이아드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휘몰아친 풍랑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금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속이 거북해졌다. 레사스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세이아드는 그들을 휩쓰는 급류에서 잠시 발을 뺄 필요성을 느꼈다. 레사스는 언제나 적당이라는 것을 모르고 온통 마음을 쏟아붓는 사람이었으니, 고삐를 당겨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이아드 프로시어스는 이같은 감정 놀음에 휘말릴 시간이 없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마주친 게 문제였다. 휘둘려 준 저에게도 죄가 있었다. 적당한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칼같이 끊어 내며 물러서는 세이아드를 레사스는 잡지 않았다. 다만 예상했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띨 뿐이었다.

“오늘은 도망가게 해 드리겠습니다. 내일 보아요.”

그리 말하는 레사스의 목소리가 잔잔하면서도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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