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연회는 중앙궁의 거대한 무도회장에서 열렸다. 왕궁 전체가 별 모양으로 조각된 등불로 길이 밝혀져 반짝였고, 무도회장으로 향하는 입구부터는 화려한 샹들리에로 인해 대낮처럼 빛이 퍼졌다. 방사형으로 퍼진 거대한 황금 촛대는 하나같이 꽃처럼 매달려 있었다. 하얀 대리석 벽마다는 별조각 램프가 높게 꽂혔고, 짙은 남색 대리석 바닥은 금색과 흰색을 섞어 원형의 밤하늘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각자의 시종을 대동한 귀족들이 줄줄이 입장했다. 모든 이들이 들어선 후 그다음은 티테르가, 그 뒤로는 국왕의 가족이 등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무도회장으로 내려가는 중앙궁의 대기실에 일부러 가장 늦게 도착한 세이아드는, 불행하게도 그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티테르들과 조우했다.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티테르들이 거기 있었다.
막 자리를 나서려던 시온 실드라스의 뒤로 스텔라 베트리아와 노바 브레드히트가 있었다. 담소를 나누며 대기실을 나오던 그들은 세이아드를 마주하는 순간 조용해졌다. 시온의 눈이 삽시간에 찡그려졌다.
“이제야 얼굴을 내비치시네요, 대공. 하도 보이지 않으셔서 홀로 또 무슨 일을 벌이시려나 했습니다.”
“공작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자리를 피했는데, 내가 운이 나빴군.”
세이아드는 나름대로 예의를 차려 말했다. 과거였다면 그는 시온의 말에 개가 짖는다고 답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미 몇 번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듣기 싫으시다니 앞으로 더 열심히 지껄여야겠습니다.”
그게 시온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애당초 시온은 말싸움에는 큰 재주가 없어서, 과거에도 레사스가 그를 대신해 나서 주곤 했었다. 브레드히트보다도 늦은 나이에 자식을 본 전대 실드라스 공작이 원체 자식들을 아끼고 키워서인지, 시온은 티테르치곤 순진한 면이 있었다.
그 점이 바로 세이아드가 싫어하는 것이기도 했다. 낮을 질투하는 밤처럼 그는 시온과 늘 정 반대에 있었다.
“오늘따라 평소보다 상냥하시네요, 세이아드 님! 시온의 말에 대답도 해 주시고 말이에요!”
그때, 고개를 꼬박 치켜들고 대드는 시온의 뒤에 있던 노바가 쑥 튀어나왔다. 한참을 내려보아야 하는 작은 키의 요정 같은 노바는, 브레드히트 공작이 품에서 놓질 않는 외동딸이었다. 시온과 더불어 세이아드가 껄끄러워하는 ‘과도하게 밝은’ 부류였다.
“못 보던 새 더 잘생겨지시기도 했어요!”
노바는 레사스보다도 한 살이 더 어린, 세이아드의 기준으로는 꼬맹이에 가까운 소녀였다. 올해 가까스로 성년이 되긴 했다만은 전투에 데려갈 생각 자체로 심란해지는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부친은 어디 두고 혼자 여길 온 거지, 노바?”
“아버지는 국왕 폐하와 논의할 게 있으셔서 자리를 비우셨어요. 대신 저보고 세이아드 님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답니다!”
양 갈래 은발 머리를 파닥이며 노바가 양손을 맞잡았다. 노바는 세이아드와 가장 마주한 경험이 적어서인지, 그를 무서워하는 대신 이상한 소리를 하며 따랐다. 그랬던 소녀가 세이아드를 끝내 미워하게 되었던 것은, 작년 기원제 이후에 있던 브레드히트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 당시 숲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세이아드의 책임이기에 그러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비를 잃은 소녀는 비극의 원인을 찾고 싶어 했다. 노바가 탓할 수 있는 건 세이아드뿐이었고, 세이아드는 그녀를 달래 주는 대신 브레드히트의 무능함을 이야기했었다.
그 뒤로 세이아드가 마주한 노바는 상처받아 그를 경멸하기로 마음먹은 소녀였다. 그같은 시선에 익숙해져있던 세이아드는, 까마득한 옛날에나 보던 경쾌한 노바의 태도에 잠시 적응하지 못했다.
아니, 이건 기억보다 더하다. 아무래도 살아서 돌아가게된 브레드히트가 노바에게 저에 대한 이야길 덧붙인 모양이었다. 피부 위로 느껴지는 호감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평소처럼 칠흑 같은 검정을 두르셨지만, 색다른 점을 주기 위한 아름다운 흰 수건까지…! 이 노바는 세이아드 님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 것 같아요.”
노바가 뺨을 감쌌다. 내내 침묵하며 대화를 듣고 있던 스텔라 베트리아가 미간을 찡그렸고, 시온이 한숨을 쉬었다.
“제발, 노바.”
노바와 거의 동갑이나 마찬가지인 시온이 결국 그녀를 뜯어말렸다.
“끔찍한 말 좀 그만해….”
“왜? 시온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 한 떨기 검은 장미 같으시단 말이야.”
노바의 기괴한 소리를 멈춘 사람은 연회장에서 걸어온 왕실 집사장이었다. 티테르가 참여하는 연회를 오래간 관리해 온 그는 드물게 모인 네 명의 티테르를 보더니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곧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들에게 손짓했다.
“곧 국왕 폐하 내외께서 도착하실 겁니다. 부디 지금 입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안내 고마워요, 로페.”
시온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왕세자와 버금가는 권위의 티테르임에도 세이아드를 제외한 이에겐 상냥한 그는 왕실에서도 꾸준한 사랑을 받아 온 존재였다. 활짝 웃는 시온의 인사에 중년의 집사장 얼굴에 푸짐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의 입지를 따라 시온이 먼저 앞장서 로페와 함께했고, 그 뒤를 노바가 따랐다. 한 발자국을 내딛고 세이아드를 뒤돌아보길 반복하는 노바를 무시하며 세이아드는 스텔라의 뒤에서 행렬의 끝을 지켰다.
“…어머니 일은 고마워.”
묵묵히 앞장서 걷고 있던 스텔라가 연회장 계단을 내려가기 전 입을 열었다. 근 삼 년 만의 대화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시기 이후 그녀의 어머니인 셀피니만이 북부로 왔으니, 그래, 그 정도였다. 한때는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던 친우였으나, 멀어진 뒤로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던 사이었다. 그런 시기를 보내다 결국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쳤던 것이 그가 죽던 날이었다.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다. 감사는 됐어.”
공치사를 받으려 한 일이 아니라 세이아드는 냉정하게 들리는 답을 했다. 스텔라는 여전히 앞을 본 채로 대꾸했다.
“어쨌든 네 덕에 어머니가 살았어. 몇 년 전 일에 대해서도… 말해 줬다며.”
계단을 내려가며 대화가 이어졌다. 세이아드는 일제히 그들에게로 몰리는 좌중의 시선을 보며 묘한 답답함을 느꼈다. 이리 많은 군중을 마주하던 때마다 세이아드는 항상, 무언갈 잘못했다. 누군가는 그가 구해 주지 않아 죽었고, 혹은 그가 포기해 죽었다. 가만히 그를 보며 속삭이는 시선들 너머로 하나같이 ‘악마’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 같았다.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것을 조용히 주먹 쥐어 숨겼다. 다만 숨이 막혔다. 이곳에 서 있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아,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렀다.
“그래서 괜찮다면 내일이나 모레, 언제든 영지로 돌아가기 전 차 한잔해. 너에게 사과하고 싶은 게 많아.”
스텔라의 말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는 군중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스텔라의 푸른 머리칼에 시선을 두며 고민하다 수긍했다.
“그래.”
그 말에 비로소 스텔라가 뒤돌아보았다. 막 계단의 끝에 이르러 연회장에 발을 디딘 후였다. 무표정하던 스텔라의 얼굴 위로 가느다란 미소가 맺힌 게 보였다. 그걸 보는 순간, 지금은 과거와 조금 다르다는 것이 와닿았다.
괜찮다.
아직 엄청 늦지 않았어.
세이아드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과거의 그가 묻힌 피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돌아온 현재에는 그의 손에 죽어 갈 이들은 아직 살아 있다. 자리를 뜨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세이아드는 전통대로 국왕 일가를 맞이하기 위한 자리에 섰다. 연회장에 있는 세 개의 계단 중, 왕족만이 쓸 수 있는 중앙 계단으로부터 국왕 내외의 모습이 보였다.
솔리아스 대대로 이어지는 화려한 금발과 벽안을 지닌 국왕의 옆에, 눈에 띄는 검은 머리칼을 틀어 올린 레아나 왕후가 보였다. 레사스에게 물려준 검은 머리칼과 흰 피부가 돋보이는 강인한 인상의 왕후는 전에 보았던 것보다 안정되고 기뻐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이유가 바로 그녀의 뒤에 있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내려오는 왕세자인 아스테르는 언제나와 같이 좌중의 이목을 끄는 존재감을 지녔지만, 오늘만큼은 주인공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귀족들의 시선은 아스테르의 바로 뒤에 있는 레사스에게 쏠려 있었다. 공식 석상에 얼굴 내밀 일 자체가 거의 없었던 레사스를 처음 보는 귀족이 태반이었다. 걸어 나오는 검은 머리칼의 왕자를 보자마자 세이아드의 뒤에서 탄식이 터졌다.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네요.”
“한 번 보면 꿈에서도 잊지 못할 미남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군요.”
레사스의 외양에 대한 찬사는 비단 여성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기민한 청각은 이곳저곳에서 퍼지는 레사스의 이야기를 한 번에 잡아냈다.
“어릴 적에는 아름답기만 하시더니, 몇 년 새 몰라보게 남자다워지셨는데?”
“자네가 언제 전하를 봤다고 그런 말인가?”
“이래 봬도 실드라스 공작님의 영지에서 뵌 적이 있다고.”
연회장을 꽉 채운 수십 명의 사람들의 말이 동시에 파고들었다. 그의 품에 안겨 보길 원하는 이들과 아름다운 용모를 찬양하는 자들, 그리고 새롭게 부상한 왕위 계승권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듣기 싫어도 들렸다.
어딜 가도 레사스의 이야기였다. 세이아드가 그에 대한 생각을 피하는 것을 막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레사스의 동생이자 왕후의 어린 둘째인 라일리 왕자까지 모두 티테르들의 앞에 섰다. 인자한 웃음을 띤 국왕이 그들을 둘러보며 연회를 시작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좌중이 조용해졌다.
“이곳을 빛내 준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근래 솔리아스의 하늘에 큰 빛이 하나 떠올랐네. 짐의 둘째인 레사스가 작년 겨울 안배받은 힘을 비로소 드러냈다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있을 중요한 일을 발표하기 위함이기도 하네.”
왕의 눈짓을 따라 아스테르와 레사스가 앞으로 나왔다. 국왕을 주시하고 있던 세이아드의 눈길이 순간 레사스와 마주쳤다. 좌중 앞에서 부드러운 웃음을 짓고 있던 레사스의 눈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세이아드를 보며 일순 색이 짙어졌다. 그대로 시선이 얽혔다.
“이번 감사제 이후, 짐은 솔리아스의 더 큰 영광과 안위를 위해 나라를 가두는 숲을 없애기로 했네. 짐의 두 아들들이 앞으로 짐을 대신해 어둠을 가르는 빛이 될 걸세. 솔리아스의 미래는 이제 이들에게 달렸으니, 부디 축복을 담아 기도해 주게나.”
왕의 선언에 연회장이 술렁였다. 그의 발언은 티테르들 또한 예기치 못했던 것인지, 시온조차도 살짝 놀란 얼굴로 국왕을 보고 있었다. 세이아드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그만을 응시하는 진한 보라색 눈에게 사로잡혔다.
‘대공은 누구보다 의무에 얽매인 사람이죠. 그러니 내가 그대의 옆에 있지 못할 이유부터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낮에 이 말을 들었을 땐, 기실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결국엔 누군가 해야 할 일이기도 했고 국왕이 원하던 바이기도 했으니 조만간 일어날 것이라고 여겼던 탓이다.
‘나는 숲을 없앨 겁니다.’
그러나 시기가 아주 일렀다. 세이아드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4년이나 앞당겨져, 그가 죽기 전에나 진행되던 숲의 조사가 당장 코앞으로 닥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과거는 세이아드가 돌아온 직후부터 분명 바뀌고 있었고,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완전히 궤적을 틀었다.
내가 한 선택들이 사실 잘못된 거라면?
명백한 이정표가 있던 길을 벗어나 눈밭만이 보이는 숲으로 들어선 기분이 지금과 같았다. 더는 갈 곳을 모르고, 어디로 가야만 ‘정답’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세이아드는 불현듯 아득해졌다. 그를 바라보며 오묘히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의 주인이 만든 이 상황이, 과연 어떤 미래를 그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