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세이아드는 능력을 풀어 어둠으로부터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림자에 동화된 것처럼 사라졌다 나타나는 모양에 티아키가 하하, 웃었다.
“나 정도면 솔리아스 내에선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 같았는데, 역시 진짜 티테르는 다르단 말이야. 그 솜씨로 암살자를 했으면 왕국에 살아남을 이가 없겠군.”
“잡설은 그만두고 용건만 말해.”
“소식이 있으니 얼굴 내밀었지.”
기대하지 않고 물은 질문에 답이 돌아오자 세이아드의 눈에 안광이 돌았다. 성큼성큼 티아키에게로 다가가자 워, 워, 진정시키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형체가 있는 것까진 아니야. 다만 ‘그날’ 축제 광장 쪽에 있던 사람들의 행적을 찾았다는 거지. 여기저기 숨어 버려서 시일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그중 한 명의 인상착의가 왕궁 기사단의 누군가와 비슷해서 알려 주려 온 거야.”
티아키는 솔리아스의 지상에 존재하기 꺼림칙한 이들이 모여 만든 단체의 수장이었다. 세이아드가 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죽기 전쯤으로, 레사스가 타칸에 나타났다는 낮의 니르아를 수색하다 발견한 뒤였다. 목격자를 찾는 과정에서 그는 티아키의 단체인 ‘데세르투스’와 조우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데세르투스의 일원은 부정한 방법으로 태어난 이들이었다. 티테르는 그들의 혈통을 철저히 관리하며 왕국에 적시해야 했지만, 언제나 선하고 정직한 사람만 티테르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드물게 태어난 사생아들이 그들의 혈통을 이어, 불안정한 반쪽짜리 힘을 몰래 쓸 때도 있었다. 이들은 티테르의 방계처럼 족보에 기록될 수 없는 평민인지라, 소리 소문 없이 숨어 뒷돈을 받아 벌고 살았다.
티아키에게는 사물에 새겨진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수하가 있었다. 티테르의 힘을 불안정하게 이어받은지라 그때마다 쓸 수 있는 힘이 동일하지 않았고, 부작용으로 크게 앓아누울 때도 있으니 조사에는 시일이 걸렸다.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하는지, 그들에게는 폭주를 일으킬 정도의 불안정한 파장이 생기진 않았다.
세이아드는 과거의 기억을 토대 삼아 그들의 근거지를 찾아 먼저 접근했다. 그들은 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세이아드는 티아키의 조건을 들어주는 대가로 그의 협력을 얻어 냈다. 티아키가 원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내어 살아가는 거였다. 데세르투스라는 단체에 숨어 사는 지하의 삶이 아닌, 그같은 존재들도 있다는 걸 세상에 밝히고 싶어했다.
그들만의 힘으론 이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곧 티테르의 명성과 비인간적인 완벽함에 흠집을 내는 행위인지라, 왕실과 티테르의 보복을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티테르인 세이아드가 이 일에 개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과거의 세이아드는 아스테르가 자신을 믿어 주고 그를 위해 발언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뒀다. 어머니의 결백을 밝혀 주고, 명예를 복구시켜 주겠다는 말을 믿고 세이아드는 아스테르의 명에 따라 그가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은 모두 아스테르가 아닌 세이아드 자신이 직접 해야 했던 숙원이었다. 당시에는 길을 잃어 방법을 몰랐을 뿐. 지금 되짚어 보면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사람을 믿어선 안 된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도 남에게 의지하려 했다는 것이.
“어느 기사단인지는 알겠나?”
“별의 뭐시긴가 하는 엄청 웃긴 이름이었어. 거기서 빨간 머리를 하나 찾아봐.”
“별의 은총은 근위대 중에서 숫자가 제일 많아. 좀 더 상세한 정보를 가져와.”
“나름 큰 수확인데 칭찬은 없고 타박뿐이야?”
“뭘 원하나?”
재화라면야 남아도니 그것을 바란다면 주겠지만, 그 외의 것은 아직 시기가 일렀다. 티아키가 바라는 일은 어머니의 결백이 뒷받침되었을 때 큰 힘을 얻는다. 실드라스와 왕후의 결점을 잡게 되면 이는 곧 프로시어스에게 힘이 실린다는 뜻이고, 세이아드의 발언권이 커지는 일이었다.
설령 그의 어머니가 폭주한 것이 사실이더라도 이제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세이아드는 그저, 당시의 현장에 있던 제삼자의 눈으로 진실을 알고 싶었다. 그것을 알아내면 알아낸 대로 세이아드는 티아키의 소원을 들어줄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일단은 지금 당장 그가 원하는 것을 하나 쥐여 주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만.
“우리도 정화라는 걸 받아 보고 싶어.”
헌데 티아키의 요구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세이아드가 눈썹만을 치켜뜨자, 티아키가 진지하게 요구해 왔다.
“꼴에 이런 힘도 티테르의 능력이라고, 우리 모두 불면증이든 뭐든 하나씩은 평생 달고 살았어. 남들이 말하는 개운하다는 기분이 뭔지 몰라. 당신도 알잖아.”
“정화는 가이드와의 상성이 맞아야만 효과가 있다. 여러 명의 왕족 중 누군가가 맞는 상성인지도 모르는데, 그걸 붙들고 데려와 정화를 시켜달라?”
“상성과 관계없이 가능한 사람이 하나 있잖아? 소문의 왕자님 말이야.”
세이아드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레사스를 만나면서 사라졌던 두통이 갑자기 올라오는 듯했다.
“듣자 하니 대단하다면서?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진다니, 진짜 티테르도 아닌 우리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겠어?”
맞는 말이나, 그러기 위해선 세이아드가 하고 있는 일이 레사스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데세르투스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부터가 위험성이 큰데, 레사스를 끌어들이면 실드라스가 저절로 따라올 가능성이 존재했다.
아니, 애초에 세이아드가 할 일은 누구에게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엔 어리석게 아스테르에게 의지해 모든 것을 그르쳤으니, 이제는 홀로 감내하는 게 맞았다.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일단은 보류해.”
“약속한 거요?”
“약속한 적 없다. 생각해 보겠다는 거지.”
“여태까지는 받는 게 없이 주기만 한 우리 입장도 생각해 보라고. 정화를 받으면 업무 효율도 올라가 서로에게 좋은 일이 있을지 누가 알아?”
적절한 상벌이 사람을 다루는 데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세이아드는 따지자면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같은 방법은 공포 외엔 불러오는 것이 없고, 세이아드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티아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일단은, 고려해 볼 만했다.
“고려해 보겠다.”
“약속이야.”
때맞춰 복도 멀리서 발소리 여러 개가 들렸다. 방향을 보아하니 그의 처소로 오는 것 같았다. 티아키 또한 눈치챘는지 쳇, 중얼거리더니 열린 창문으로 돌아섰다.
“다음엔 교환하는 걸로 알겠어.”
세이아드의 침묵을 신호 삼아 그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그가 모습을 감추기 무섭게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대공 각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중앙 궁에서 각하께 보내온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오거라.”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다. 커다란 직사각형의 상자를 각각 품에 안고 온 시종 둘이 어두운 방을 보더니 흠칫 물러섰다. 세이아드에게는 익숙한 어둠이라 깜빡하고 있었다.
“바람에 등불이 꺼졌다. 기름이 떨어진 것 같으니 확인하고 가져오거라. 선물은 두고 가고.”
“네, 알겠습니다.”
세이아드는 성가신 것들을 빨리 돌려보내기로 했다. 기다렸던 답인지 시종들은 문을 활짝 열어 둔 채, 복도의 불빛을 등대 삼아 얼른 처소의 큰 탁자에 선물을 두었다. 뒷걸음질로 물러난 이들이 등불을 갈러 가는 사이, 세이아드는 성의 없는 손길로 선물을 풀었다. 리본으로 손수 묶여진, 황금으로 장식된 상자는 크기와 달리 무게는 가벼웠다. 보물이나 금화는 아닐 것이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비단으로 감싸진 옷이 있었다. 눈을 찡그리고 그것을 흘끗 무시한 뒤 다른 상자를 열자, 그 안에도 옷이 있었다. 동봉된 카드를 살펴보니 발신인이 각각 달랐다. 공교롭게도 두 명의 장성한 왕자가 각자 다른 옷을 보내 왔다.
하….
왕족이 자신의 티테르에게 연회에 참여할 옷을 선물하는 것은 예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나, 세이아드는 이같은 선물을 받지 못한지 몇 년이 넘었다. 성년이 되기 전에 참석한 축하 연회에서 아스테르가 마지막으로 옷을 줬던 게 벌써 육 년 전이다.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던 성가신 전통인데, 문제는 레사스도 옷을 보냈다는 점이다.
세이아드는 손끝으로 옷을 들춰 보았다. 레사스가 보낸 것은 세이아드와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흰 바탕에 금실로 장식된 정복이었다. 반면 아스테르의 옷은 세이아드가 늘 입어 오던 것과 같이 검은색에 금색이 어우러진 복식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세이아드는 아스테르가 보낸 것을 골랐다. 그의 정화를 거부하는 것과 별개로 세이아드는 당장 아스테르를 티 내어 적대할 순 없었다. 그의 행보가 수상하니 옆에서 관찰하기 위해서라도, 아스테르의 장단에 조금은 맞춰줘야 했다.
게다가 레사스의 옷은 그 자신에게나 어울릴 법한 흰색이었지, 세이아드에게는 맞지 않았다. 상자를 닫아 치우려던 세이아드는 그가 쓴 카드를 곁눈질로 읽었다.
‘그대는 좀 더 드러나서 사랑받는 게 맞아요.’
사랑받는다는 말은 읽는 것 자체로도 어색했다. 한참이나 그것을 눈에 담던 세이아드는, 한숨을 쉬고 상자를 닫았다. 보기에는 좋으나 세이아드같은 죄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