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완벽하게 자취를 감췄다고 여긴 어릴 적의 면모에 세이아드의 마음도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온연한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잘도 그를 농락하려 들어 몰랐지만, 레사스는 고작 스물하나였다. 바뀐 해를 더하면 세이아드의 원래 나이는 서른이었으니, 아홉 살이나 어린것에게 너무 진심으로 굴었다.
시온 실드라스나 레아나 왕후는 잠시 다른 쪽으로 밀어 두고, 세이아드는 제 잘못을 수습하기로 했다. 가이드에게 다른 가이드와의 일을 언급하며 비교하는 것은 티테르의 능력을 저울질하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역할과 힘이 있는 것을.
“…싫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남에게 미움받아도 무시하거나 스스로도 자신을 무시해 왔던 터라, 남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말을 하는 게 아주 간만이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니 세이아드는 지긋이 고개를 드는 수치심을 억누르고 말했다.
“정화 과정에 대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서, 심술을 부렸습니다. 앞선 말은 무시하셔도 됩니다.”
하염없이 처량한 눈을 하고서도 세이아드를 피하지 않고 보던 레사스가 표정을 바꿨다. 창백하게 질렸던 안색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상한 것이 있는 모습이었다. 한동안 침묵에 잠긴 레사스를 세이아드도 기다렸다. 이대로는 두고 가기가 그랬다.
“대공께서도 아시겠지만…, 나 또한 남자인지라.”
그때, 레사스가 속삭였다.
“다른 남자를 입에 담으면 참기가 어렵습니다.”
쳐 내졌던 손을 다시금 잡아 오며 그가 세이아드를 당겼다. 키가 커진 만큼 힘도 세진 것인지, 방심한 찰나에 확 끄는 힘이 상당했다. 휘청인 그의 허리에 레사스가 팔을 둘렀다. 갑작스러운 밀착에 심장이 놀랐다. 밀어내기 위해 어깨를 꽉 쥐는 차 레사스의 말이 이어졌다.
“형님에 비해 제 경험이 부족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게 정화를 부탁하며 찾아온 것은 대공이에요. 그대도 원치 않는 날카로운 말로 나를 아프게 하지 말고, 대신 가르쳐 주세요.”
레사스의 손가락이 깍지를 껴 왔다. 사이사이 파고들어 단단히 그를 붙든 레사스가 속살거렸다.
“나를 대공의 형태로 완전히 물들여 주세요. 그대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만족시킬 수 있게끔.”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고하는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경건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세이아드가 원하는 것에 맞추겠다는 그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레사스 솔리아스는 이제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존재임에도, 가진 것 하나 없는 그때처럼 세이아드만을 보고 있었다. 몇 분 전에는 생판 다른 사람처럼 여겨졌으나, 지금의 레사스는 마치 예전과 같았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대공이 직접 내게로 돌아왔으니, 다시는 날 두고 가진 못할 겁니다. 그러니 날 그대의 방법으로 길들여요.”
거부할 틈도 없었다. 붙들린 손으로부터 감히 거절하기 어려운 평온이 찾아들었다. 어딘가로 표출되고 싶어 요동치던 파장을 기꺼이 덜어 간 레사스는, 뒤이어 그의 기운을 밀어넣어 세이아드의 엉킨 파장을 풀어 냈다. 시원한 느낌이 전신으로 퍼지며 고통 또한 녹아들었다.
내내 긴장하고 있던 전신이 이완되었다. 뾰족하게 날을 세운 신경이 드디어 쉴 수 있게 되어 안도하며 누그러졌다. 억지로 참고 있던 부작용이 의외로 상당했던 것인지, 레사스의 압도적인 힘이 밀려들자 몸의 힘이 살짝 풀렸다.
이 순간만큼은 잠시 기대어 있고 싶다는 욕망이 언뜻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걸 눈치챈 것인지 레사스의 팔이 허리를 조여 왔다. 보이는 것과 달리 군데군데 날렵히 빠진 세이아드의 몸은, 장성한 레사스가 품을 만한 체격이었다. 안정적으로 허리를 받쳐 주는 팔이, 언뜻 미세히 떨리고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세이아드는 빤히 레사스를 주시했다. 잘도 저런 말을 능숙히 지껄여 놓곤, 막상 닿은 부위마다 긴장하며 떨고 있는 모습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했다.
그러나 시선만큼은 절대 피하지 않는다. 서로를 말없이 마주 본 채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말을 곱씹었다. 정화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모르는 이가 들으면 마치 고백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아스테르와 비교당하고, 아스테르에게도 홀대받으며 컸으니… 여러모로 신경 쓰이겠지. 아스테르의 티테르였던 제게 그보다 잘한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건 당연한 욕구다. 저 정도의 호승심은 있는 게 낫다.
“그렇게 말해도….”
하지만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요구대로 그를 길들일 생각은 없었다.
“남의 것을 길들이는 취향은 없습니다. 전하의 방식은 결국 시온 실드라스의 방식일 테니.”
정화가 필요하니 레사스와 어느 정도는 접촉하겠지만, 말한 것처럼 남의 것을 건드리는 취향은 없었다. 겨울 동안 이미 레사스는 시온 실드라스와 수도 없이 정화를 주고받았을 텐데, 조만간 연인이 될 이들의 방식을 건들긴 싫었다.
시온 실드라스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정인이 있는 이가 정화를 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잘 알았다. 세이아드가 남을 괴롭히는 것을 타고났다 하여도 그런 쪽으로는 취미가 없었다.
“시온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레사스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한 적 없습니다.”
“그대가 시온을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걸 지난번의 대화로 확실히 알았어요. 내 어머니를 보기 싫어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라면, 나 또한 그대의 앞에 시온을 불러오고 싶진 않습니다. 대공이 원치 않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 실드라스의 가이드로 정해진 판국인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겨울 동안의 행적을 보면 오늘 있을 연회에서 발표될 내용이 뻔했다.
“전하, 실드라스는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저 또한 전하께 저의 가이드가 되어 달라 부탁드린 적 없습니다.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레사스가 세이아드만의 가이드가 될 수 없는 것은 지난겨울 입이 닳도록 말했다.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는데도 이리 구는 것이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싫습니다.”
“실드라스는 전하의 오랜 친우 아닙니까?”
“시온에게는 빚을 진 게 있을 뿐입니다.”
빚?
그들 사이에 오갈 만한 거래가 대체 무엇인가 싶어 눈을 찡그리는데, 레사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의 말처럼 숲이 존재하는 한, 나는 가이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다른 이를 상대해야 합니다.”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얼굴의 간격이 점차 좁혀졌다. 뒤로 살짝 물러서려는 세이아드를 잡아당기며 레사스가 고개 숙였다.
“대공은 누구보다 의무에 얽매인 사람이죠. 그러니 내가 그대의 옆에 있지 못할 이유부터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코끝이 살짝 스쳤다. 오뚝한 콧날은 생각 외로 부드럽고도 따듯했다. 지척으로 다가온 레사스의 입술이 눈앞에서 속삭였다.
“나는 숲을 없앨 겁니다.”
한 치의 의심조차 없이 확고한 결심이었다. 그것은 국왕이 원하는 바와 같았으나 동시에 한없이 결이 달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깜빡이는 그 찰나.
입술이 아주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연회에서 뵙지요, 세이아드 대공.”
혼날 것을 짐작했는진 몰라도 내내 그를 가두고 있던 팔이 풀렸다. 피하는 만큼 따라오던 것이 무색하게끔 몸을 뗀 레사스는, 나타났던 것처럼 소리 없이 물러났다. 그 뒤를 따라가 무슨 짓이냐고 역정을 내고 싶은 것을 참고, 세이아드는 닿았던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풀잎이 간질이고 지나간 것처럼 자꾸만 비벼진 곳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지워 내도 자꾸만 잔상처럼 입술 위에 남아, 연회를 준비하는 내내 세이아드를 성가시게 했다.
***
감사제는 태양이 중앙에 뜬 정오를 기점으로 시작한다. 왕궁의 성벽을 둘러싼 울창한 숲을 직선으로 가로질러 빠져나오면 축제 광장이 보이고, 그 광장에 세워진 해시계 탑에서 왕과 왕후가 그 시작을 알린다.
주변을 둘러싼 화려한 생화 장식과 조형을 비롯해 감사제를 기획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왕후의 몫이었다. 축제 광장은 왕궁과 가까이 자리한 만큼 오직 특별한 기간에만 열리는 장소로, 그곳에서 왕후는 기사들을 대동해 항시 예행 연습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곳은 세이아드의 어머니가 폭주했다고 일컬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낮에 열리는 감사제에 세이아드는 참가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는 게 맞았다. 왕후는 몇 년 전의 악몽을 아직 잊지 못했다며, 세이아드에게 ‘양해’를 구하며 그의 외출을 제한하는 서신을 보내 놓았다.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라 세이아드는 낮 동안 왕궁의 서고에 머물렀다.
기실 왕궁의 서고는 왕족이 아닌 이에겐 엄격히 출입이 금해진 곳이었다. 티테르에게는 일람을 청할 권한 자체는 주어지나,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왕족의 역사와 힘을 다룬 서적이 많은 곳이니 나름의 신중을 기울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세이아드에게는 별 소용없는 제약이었다. 그는 그림자에 숨어들어 서고로 넘어 들어갔다. 안을 돌아다니는 사서로 인해 자리 잡고 조사하진 못했으나, 수백 개의 책을 눈대중으로 훑다가 마음에 걸리는 제목의 서적 몇 개를 빼돌려 나왔다.
아무에게도 모습을 비치지 않고 세이아드는 배정받은 북쪽 처소로 돌아왔다. 저녁에 있을 연회에는 참석해야 했으니 대충이라도 준비하는 시늉을 해야 했다. 그렇게 소리 없이 어둠이 깔린 방으로 들어가자, 선객이 있었다. 보통 사람은 잘 느끼지 못하는 잔잔한 기척이 창가에 숨어 있었다.
“목격자는 찾았나, 티아키?”
창가의 검은 그림자가 세이아드의 말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짧게 깎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한 남자는 주변을 슥 훑더니, 항복했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언제 보아도 소름 끼치는 능력이구만, 고용주의 힘은. 유령과 대화하는 기분이니 이만 좀 나와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