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42화 (42/147)

#42

베트리아로부터 들은 정화에 대한 이야기까지 합치면 이는 확실했다.

‘정화를 받으면 어떻냐고? 처음 듣는 질문이군. 글쎄, 대공도 알다시피 물 밖으로 나온 기분이지. 통증이 사라지고, 숨이 트이면서 살아있는 기분이야. 한층 세상이 살 만해진다고 설명하면 와 닿으려나….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이어갈 수 있는 건 가이드 덕분이 아니겠어?’

아스테르의 정화가 어떤 식으로 폭주에 영향을 미치는진 모른다. 오히려 폭주는 티테르의 불안정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여겨지니, 감정이 사라질수록 폭주를 막는 게 아닌가.

하지만 베트리아의 설명은 레사스와 있던 일을 떠올리게 했다. 그와 닿을 때마다 흘러 들어온 온기는 마음을 어수선하게 했다. 그것은 확실히 불편하고 유쾌하진 않았지만 베트리아의 묘사대로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세이아드는 혹한기 동안 일부러, 아스테르와의 정화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다행히 아직은 돌아오자마자 겪었던 환청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는 노릇이다. 세이아드가 겪은 과거가 상당 부분 바뀌기 시작했고, 그런 연유로 폭주가 전처럼 5년 뒤에 찾아오리라 여길 수가 없었다.

환청이 들리지 않았다 뿐이지 정화의 횟수가 적어 세이아드는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두통은 이제 무덤덤해질 정도고, 전신을 찌르는 뾰족한 파장이 주는 고통도 당연한 감각 같았다. 수도로 향하는 동안 세이아드는 일부러 겨울간 생각하지 않았던 레사스에 대해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마주보긴 해야 하는데….’

껄끄럽다. 차라리 그가 의무적으로 군다면, 어떠한 감정의 교류도 없이 깔끔하게 접촉하고 끝날 수 있지 않나. 그렇다면 레사스가 실드라스 공작의 친우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 터인데.

일부러 레사스의 소식을 찾지 않았음에도 종종 파르마는 성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가져왔다. 레사스는 베트리아 공작령에 도착해 그의 상성이 스텔라와도 맞음을 확인했고, 나아가 큰 접촉 없이도 그의 힘을 외부로 흘려 정화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는 걸 증명했다. 실드라스 영지에서 궁으로 귀환하던 시기에는 광역 정화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들었다.

분명히 세이아드에게는 필요한 힘인데, 마주치면 레사스가 어떻게 반응할지 이젠 가늠조차 안 됐다. 마지막 회의에서 끝내 그의 옆에 있겠다고 하던 고집스러운 무표정이 떠올랐다. 한동안 덤덤하던 마음이 살짝 술렁였다.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아스테르를 멀리하고 레사스를 옆에 두는 게 맞다.

세이아드는 어쩔 수 없는 결론을 내렸다. 시온 실드라스나 왕후에 대한 악감정은 당장 접어 두고, 목표를 위해서 레사스를 그의 가이드로 일정 기간만큼은 빌려 와야 했다. 문제는 그러기 위한 합당한 방안이 필요했다.

시온 실드라스에게도 가이드는 필요하다. 과거의 시온은 레사스가 늘 옆에 있었지만, 세이아드가 그 과거를 바꾼다면 시온에게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세이아드는 실드라스의 몰락을 바랐음에도 지금 이 상황에서 티테르는 지켜야 할 존재였다.

머릿속이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차 터질 것 같았다. 끊임없이 머리 안쪽을 건드리던 두통이 일순 심해져, 세이아드는 짤막한 신음과 함께 걸음을 멈췄다. 눈두덩이를 꾹 눌러 몇 초간 침묵하다가 눈을 떴다.

펼쳐진 풍경이 묘했다. 중앙 궁으로 가는 길은 분명 이쪽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발 디디지 않은 곳이나 기억까지 흐릿해진 건 아니다. 세이아드가 멈춘 곳은 그가 절대 올 일 없는 장소였다.

‘하필 여기로 왔나.’

낭패감에 다시 발길을 트는 동시에, 그는 바로 뒤에 다가온 인기척을 느꼈다. 세이아드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타인이 그의 근처까지 왔는데 눈치채지 못했다니. 살기 어린 경계심을 세우며 그가 휙 몸을 틀어 검을 뽑으려는데, 듣기 좋은 중저음이 먼저 들렸다.

“나를 베면 그대 또한 다칠 텐데.”

익숙한 동시에 기억보다 좀 더 남자같은 음성이었다. 세이아드는 흠칫 고개를 들어 상대의 눈을 보았다. 그렇다.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러니 검은 거둬요.”

턱을 살짝 올리자 비로소 상대의 보라색 눈과 마주쳤다. 세이아드보다 미세히 낮았던 눈높이가 기억보다 훨씬 높아져 있었다. 스물아홉 살의 세이아드에게는 익숙한 모습이나, 지금의 세이아드에겐 이상하리만치 낯선 레사스가 그의 앞에 존재했다.

“…전하.”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발밑이 이상하게 철렁 내려앉는 듯하더니 심장이 고통스레 조여 왔다. 세이아드는 무의식중에 그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읊조리던 레사스를 떠올렸다. 경멸을 비추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무미건조하던 하얀 얼굴의 레사스.

반년 만에 본 레사스는 그때의 모습을 갖췄다. 곳곳에 부드러운 선은 남아 있었으나 거의 자취를 감췄다. 세이아드보다 커져 버린 완연한 성인 남성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간만에 뵙네요, 대공.”

세이아드의 인사 같지 않은 인사에 레사스도 화답했다. 가기 전 자신의 티테르가 되어 달라 붙잡던 모습과 달리, 간만에 본 레사스는 무척이나 담담해 보였다. 이편이 세이아드에게 훨씬 익숙한 레사스이니 안도해야 하는데 심장이 불안하게 자꾸 뛰었다.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세이아드를 죽였던 모습의 레사스를 마주하니 속이 울렁였다. 칼끝이 심장에 닿던 당시가 생생하게 뇌리를 덮쳤다.

그 순간 세이아드가 마주하고 괴로웠던 것이 레사스의 바로 이 눈이었다. 감정 하나 없이 그저 끔찍한 존재를 보는 시선. 저를 그리도 따르고 저 역시 아꼈던 존재가 보여 주던 무감각한 눈이 세이아드를 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다 만나면 정화에 대해 곧장 말해 보자 했는데, 저 모습의 레사스를 보자 손끝이 떨렸다. 폭주로 수많은 이를 죽였던 끔찍한 당시로 돌아온 것 같았다. 존재하는 것 자체로 스스로가 역겹다 느껴져, 한없는 후회가 갑자기 솟구쳤다.

숨이 막혔다. 목구멍이 모래로 틀어막힌 것처럼 호흡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소멸해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는 어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죽음보다 두려운 죄책감이 세이아드를 덮쳤다. 사방의 색채가 사라지며 흑백만이 남았다.

숨을, 숨을 쉬는 게….

“세이아드.”

뜨거운 온기가 양 뺨에 닿았다. 조여 오던 숨구멍이 탁 트이는 느낌과 함께 세이아드는 허억, 참았던 호흡을 들이켰다. 멈춰 버렸던 세상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밝은 빛이 내리쬐는 남쪽 궁의 풍경이 시간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북부와는 달리 요란하고 해맑게 울렸다.

“괜찮습니다.”

뭐가 문제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거면서, 레사스는 괜찮다는 말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가 제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뺨을 쥔 단단한 레사스의 손으로부터 아찔할 정도로 아늑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팽창했던 예민한 정신이 서서히 진정했다. 차갑게 식어 버렸던 몸이 활기를 띠고 덥혀졌다.

타인의 앞에서 굳어 본 기억이 없었다. 방금 제가 겪은 일이 한심하고도 수치스러웠다. 약점을 그대로 내비쳤다. 책이 잡힐 만한 꼴을 하필이면 레사스에게 보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놔주십시오.”

세이아드는 턱을 비틀어 그에게서 빠져나오려 했다. 각도가 바뀐 탓에 입술이 레사스의 손바닥에 살짝 닿았다. 입술에 닿는 온기가 소름 돋을 정도로 뜨거워 세이아드는 흠칫 상체를 움츠렸다. 뺨을 쥔 레사스의 손이 살짝 경련한 것 같기도 했다. 소화하기 어려운 긴장감에 세이아드는 결국 뒤로 물러섰다. 레사스의 손목을 잡아채는 것도 부담스러워 택한 방법이었다.

간신히 벌린 한 발자국만큼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를 만나면 정화가 필요하다 청하려 했던 다짐이 무색했다. 입만 열면 되는데, 정화를 하기 위해선 그와 다시 닿아야 한다는 게 미칠 노릇이었다. 왠진 모르겠지만 그냥 감당하기 어려웠다.

“…연회가 곧 시작될 텐데, 주인공께서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그래서 그냥, 최대한 다른 주제를 꺼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러는 대공은 왜 여기 있을까요.”

말문이 막혔다. 레사스야 이곳이 거처겠지만, 세이아드는 이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실수라고 말하기도 전에 레사스가 선수를 쳤다.

“나를 보러 왔네요, 그대는.”

아니라고 반박하기 위해 피했던 시선을 마주친 세이아드는 그대로 굳었다. 세이아드를 내려다보는 보랏빛 눈이 화사하게 휘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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