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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41화 (41/147)

#41

아까 전엔 부정적인 말을 잘도 늘어놓더니 지금은 갑자기 존경하는 듯한 말투다. 얘도 진짜 웃긴 애라니까. 바인이 낄낄 웃자 리그다가 또다시 궁금하다는 듯 아! 하고 손바닥을 쳤다. 열심히 순찰을 돌아야 한다더니 지금 누구보다 딴청에 진심이었다.

“그래서, 진짜 사람들 말처럼 잘생겼어?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 같다고 하던데. 목소리도 엄청 좋다면서.”

참나. 지도 딴에 여자라고. 바인은 갑자기 못마땅해진 심정으로 인상을 팍 구겼다. 그걸 본 리그다가 왜, 왜, 하며 옆구리를 쳤다.

“못생겼어? 다 헛소문이야? 악시드 대공하면 꼭 같이 따라붙는 소문이 저렇던데, 북부에서 꾸며 낸 수작인가?”

바인의 치졸한 마음은 리그다의 말에 그렇다고 동의하고 싶었으나, 양심이 그를 찔렀다. 대공은 거짓으로라도 추하다고 말하기가 힘든 얼굴이었다. 전투 중에는 그의 외양을 위압감이 눌러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전장을 벗어나 마주한 악시드 대공은….

“뭐, 좀 봐줄 만하지.”

리그다가 들은 소문처럼, 대공은 세심하게 빚어 낸 날카로운 조각상 같았다. 그가 어딘가에 모습을 드러내면 일종의 불가항력처럼 시선이 뺏겼다. 흔히 보기 어려운 월등한 장신과 너른 어깨가 시선을 먼저 빼앗고, 차갑고 무표정한 분위기에 두려워하다가도 얼굴을 흘끗 보면 넋이 잠시 나갔다.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는 외양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의 이목구비는 하나같이 세련되고 섬세했다. 흠 하나 없는 완벽한 이목구비라 인간미가 없을 정도였다. 시원스레 넘긴 검회색 머리칼 또한 어디서 보기 힘든 색인지라, 스쳐 가기만 해도 평생 기억에 남을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인정하기엔 남자로선 좀 자존심이 상해서, 바인은 알아서 조율해 말했다. 리그다가 실실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진짜 잘생겼나 보다.”

“아니, 그냥 그런데?”

“넌 어지간하면 다 못생겼다고 하잖아. 봐줄 만하다는 소리는 레사스 전하 외엔 못 들어 봤는데. 그럼, 둘 중 누가 더 잘생겼어?”

“그만 물어봐. 남자 얼굴에 내가 왜 관심을 갖겠냐.”

리그다의 불필요한 관심을 싹둑 잘라내는 차, 저 앞의 통로에서 태양의 빛 소속 기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냉큼 자세를 바로하고 근엄한 표정을 지은 바인을 따라 리그다도 근무 태세를 취했다. 바삐 가던 근위대의 부단장이 둘을 발견하곤 외쳤다.

“거기, 레사스 전하의 기사들이지? 티테르들께서 입궁하셨다. 두 시간 내로 연회가 시작될 테니 각자 관할 구역으로 돌아가서 대기해.”

“네, 알겠습니다!”

씩씩한 리그다를 따라 바인도 경례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사라지는 부단장을 보자니 새삼 그들의 처치도 나아졌다 싶었다. 예전엔 왕실 근위대 누구도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하께서 좋아하시겠네.”

바인은 또 그만 속마음을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귀가 밝은 리그다가 물었다.

“전하가 왜?”

“아니, 그냥.”

바인의 머릿속으로 반년 새 부쩍 달라진 레사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각성한 시점을 계기로 얼추 눈높이가 비슷해진다 싶어지더니, 한참 앓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로 눈높이가 달라졌다. 눈에 띄게 큰 키 때문인지는 몰라도 주군은 스물한 살의 청년이라고 보기엔 아주 성숙한 미남이 되셨다. 그전에는 중성적이고 아름다운 어린 청년같았다면, 지금은, 음, 뭐랄까.

좀, 이런 말로 하긴 그렇지만… 퇴폐적인 미남처럼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주군이 궁에 돌아온 뒤로 근처를 다니는 하녀마다 기절하겠다고 난리가 났다.

‘대공이 궁에 들면 내게 가장 먼저 소식을 말해 줘, 바인.’

오늘 아침 대공을 언급하며 명을 내리던 레사스는 지난 겨울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울새와 놀고 계셨다. 작고 통통한 회색 울새는 날아가라 풀어 줬음에도 전하의 곁을 맴돌며 놀고 가기를 반복해,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명물이라 불렀다. 새를 좋아하냐는 바인의 물음에 전하는 회색이 마음에 든다는 엉뚱한 답을 하셨다.

울새는 황금으로 테두리를 금칠한 유리병을 특히 좋아했다. 거기엔 반투명한 노란 사탕이 단내를 풍기고 있었다. 왕실의 귀한 분만이 먹을 수 있다는 사과로 만든 사탕은, 레사스 전하가 근래 들어 모으기 시작한 것이었다. 새 주제에 먹지도 못하는 사탕을 눈독 들이는 것이 전하를 닮아 참 특이하다 싶었다.

주군은 덤덤한 목소리로 명했으나, 바인은 문을 닫기 전 레사스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휜 것을 분명 보았다. 아주 자세히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기쁨의 표시였다.

거참, 알 수 없는 사이란 말이야….

분명 서로 아주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작년에 그가 본 모습은 딱 잘라 그렇다고 말하기 그랬다. 전하는 마치 어떻게든 싫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같았고, 대공은 냉정하고 무례하게 굴면서도 묘하게 전하를 받아 주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다가 실종된 대공을 주군이 직접 찾아온 날 이후로, 그는 어떤 제약이 풀린 사람처럼 자꾸만 대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자리를 비우셨다치면 꼭 대공 근처에서 발견되는게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 원대한 복수의 계획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높으신 나으리들은 죄다 정신이 좀 이상하다니까.’

그리 결론 내린 바인은, 주군에게 한시라도 빠르게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냅다 중앙 궁으로 뛰어갔다.

***

북부의 끝인 악시드에서 솔리아스의 수도인 셰아트로 오려면 말을 타고 열흘이 넘게 걸렸다. 그것도 최대한 쉬지 않고 온다는 가정 하였는데, 마차를 탄다면 꼬박 이 주일이 걸렸다. 모든 전령은 왕궁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급하게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긴 시간을 들여야 했다.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기동성을 중요시하는 세이아드는 어지간해선 마차를 타는 일이 없었다. 그는 겨울간 특별히 훈련시켜 차출한 소규모 직속 기사단과 퀼리만을 데리고 어제 자로 수도에 도착했다. 퀼리는 원래 데려오지 않으려 했으나, 수도에 결코 각하를 혼자 보낼 수 없다고 간청한 탓에 일행으로 넣어주었다.

예전이었다면, 그러니까 되살아나기 전이었다면 감히 허락하지 않을 행위였다. 퀼리같은 일반인을 데리고 간다면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세이아드는 이를 허락했고, 예상대로 이틀이나 여정이 길어졌다.

시월부터 시작해 삼월에야 끝이난 긴 겨울 동안 세이아드의 주변은 조금씩 변했다. 활기찰 일이라곤 하나도 없이 삭막한 주인 하나만 뒀던 성에 파르마 솔리아스와 셀피니 베트리아가 들어오며 분위기가 달라진 게 시작이었다.

파르마는 나이에 비해 쾌활하고 소녀같은 여인이었는데, 무뚝뚝하고 예민한 베트리아도 그녀의 옆에서는 잘 웃는 편이었다. 성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든 일에만 방해되지 않는다면 내버려 두라 명한 탓에, 봄이 다가올 때 쯤엔 성의 고용인들이 한층 긴장을 던 기색이었다.

진심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자각한 것과 별개로 행동이 그를 따라가는 것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세이아드는 반년간 딱히 다정해지지도 않았고, 사교적으로 변한 것도 아니며, 감정 표현이 풍부해지지도 않았다. 그나마 변한 점이라면 누군가가 말을 걸면 멈춰서 들어주기는 한다는 것이었다. 시간 조차 내주지 않던 과거와는 분명 달랐다.

애당초 세이아드는 그가 증오할 이유가 없는 이들 외에는 감정 소모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을 죽게 만든 자들을 제외하면 일관적으로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니, 성의 고용인들을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모두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세실리아의 하녀를 쫓아낸 그 일 때문이었다.

딱히 개인적인 성향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뭔가 달라진 건, 세이아드가 파르마나 퀼리의 말을 들어주는 걸 목격하는 이들이 생긴 뒤였다. 특히 퀼리의 성가시기 짝이 없는 행동을 그냥 넘어가 준 뒤부터는 가끔 그에게 용기 내어 말을 거는 하인들이 생겼다.

대부분은 인사였다. 그리고 세이아드는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이해할 수 없게도 성의 식솔들은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영주님에게 깃든 악마가 사라지고 있다, 하는 소문 따위가 요즘 도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이 돌든 사실 상관 없다. 세이아드에겐 할 일이 있었다.

혹한기의 겨울 동안 세이아드는 쉬지 않고 숲의 경계를 초토화시켰다. 그가 계획했던 것 중 하나인 북쪽 숲을 없애는 작업의 초입을 위해서였다. 그 결과, 초겨울 조사대와 함께 목격했던 초입의 핵을 없애는 데 성공했다.

그가 이번 건국 감사제에 초대받아 수도에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게 바로 이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사형된 이후부터 프로시어스의 성을 단 이들은 왕실의 허락 없인 수도에 올 수 없었다.

세이아드 본인 또한 오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회상조차 하기 싫은 지옥이었으니.

그러나 세이아드는 왕궁에서 알아볼 것이 많았다. 숲을 없애겠다는 목적 외에 폭주에 대한 것들을 조사하기 위해선 왕궁에 발을 디뎌야 했다. 겨우내 아스테르를 옆에 두고 그의 정화를 받으면서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스테르는 얼핏 보기엔 완벽하게 그를 안정시키는 듯했지만, 이상한 점이 명백히 있었다. 그의 정화는 사람을 지나치게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언뜻 평온과 닮았지만, 자세히 파헤치자 마비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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