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40화 (40/147)

#40

3. Peccata

솔리아스의 봄은 모두에게 의미가 남다른 계절이었다. 혹한의 시기가 끝나고 찾아온 따사로운 볕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니르아로부터 살아남고 또다시 한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안도의 표식이기도 했다.

더는 밤길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가 영지마다 깃발로 표시되면, 그 이후가 진정한 봄의 시작이 되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왕국 전체에서는 온갖 행사가 열렸다. 건국 시조인 라만 1세에게 감사를 표하는 왕실 주관의 감사제를 시작으로, 태양에게 그해의 풍년을 비는 축제 주간이 이 주일 내내 이어졌다.

각 영지마다 전통도 구색도 다른 것이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으나, 바인은 몇 해 전부터 수도에 묶인 몸이었으므로 올해도 꼼짝없이 수도의 축제나 봐야 하는 운명이었다. 수도엔 원체 잘 가꿔진 미인들이 많아 그걸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지만, 음식은 아무래도 남쪽 실드라스 지방이 맛있었다. 그리고 술은 자고로 북부의 것이 최고라고 했다.

말로만 듣던 북부의 술을 작년 시월 경에 드디어 맛본 뒤로 바인은 북부의 술을 인정하기로 했다. 용병으로써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북부만큼은 가 볼 길이 없어서 보류했던 판단을 작년에 내린 것이다. 바인을 거둬 주고 왕실 소속 기사로 있게끔 힘써 준 안카 단장님 또한 동의하신 바였다.

“하…. 차라리 싸우면 몰라도 왕궁 순찰은 진짜 더럽게 재미없다.”

분명 속으로 말한 것 같았는데 옆에서 짝을 이루어 가고 있던 리그다가 듣고 말았다.

“불경죄로 끌려가고 싶어?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드디어 사람답게 살게 되었는데 감사하진 못할망정.”

허리춤에 갈무리해 둔 검집을 만지작거리던 바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사단 동료인 리그다와는 평민으로 태어나 스물일곱 해를 같이 보냈다. 악연인지 인연인지 몰라도 한 마을에서 태어나 이곳까지 같이 왔다.

남쪽 실드라스 령과 서쪽 브레드히트 령 사이에 자그맣게 위치한 마을인 타칸은 예로부터 니르아가 잘 나오는 곳이 아니었다. 거대한 숲의 장막을 영지들이 막고 있어서 그곳까지 내려올 일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다 바인이 태어난 해, 남쪽이 니르아에 뚫렸다. 그 피해가 타칸까지 끼쳤다.

삽시간에 고아가 됐다. 리그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로를 가족삼아 붙어다니던 둘은 어쩌다 마을에 쉬어 가는 용병들에게서 눈대중으로 검을 배웠다. 그러다가 운 좋게 용병단 하나에 들어간 뒤로 전국을 떠돌며 별별 일을 다했다.

돈도 나름 괜찮았는데 일이 참 별로였다. 늘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일이다 보니, 마지막으로 맡은 화물 호위에서 바인과 리그다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그때 목숨을 구해 준 게 귀하디 귀한 왕족 나리, 레사스였다.

화물의 정착지가 타칸이었던지라 그길로 서로 일을 멈추고 한동안 쉬자고 정했던 것이, 하마터면 마지막 임무가 될 뻔했다. 실드라스 영지에 들렀다가 수도로 돌아가던 길인 레사스는 그 길목에서 리그다와 바인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은혜를 갚겠다는 고지식한 리그다의 말에 레사스는 안카의 밑에 그들을 들어가게끔 했다.

‘원하면 언제든지 떠나도 돼.’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지만 바인은 아직도 어린 청년을 처음 만났던 그 겨울을 기억했다.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죽기 전에 보는 신, 뭐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어서 바인은 그 길로 몇 달간 남몰래 얼굴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러워했다.

그가 솔리아스의 유명한 ‘쓸모없는 왕족’이라는 건 나중에나 알았다. 어차피 그런 건 바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먹고사는 게 중요했고 왕자는 그걸 가능하게 해 주었다.

레사스는 귀하디 귀한 힘이 없는 것만 빼면 모든 걸 갖춘 사람이었다. 훤칠한 키에 아름다운 용모, 그리고 화를 낼 수 있나 싶은 차분하고 다정한 성정. 아무리 천대받는다 한들 왕자는 왕자니 재물도 많을 것 아닌가.

물론 왕자의 곁에 있다 보니 그가 잘 사는 귀족보다 못하다는 걸 체감했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다. 가이드로 각성한 이래 왕자는 그의 허름한 궁을 떠나 왕세자와 버금가는 으리으리한 궁을 배정받았다.

그간 받던 대우가 더럽고 치사했어도 사람이라면 좀 기쁠 법도 한데, 왕자는 이상하게 크게 기뻐 보이진 않았다. 기실, 바인은 왕자가 기뻐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손에 꼽혔다.

우스운 것은 왕자가 잘 웃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미소를 보면 쉽게 감동하고 좋아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언제나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었다.

주군은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그저 덤덤히 견디거나 웃을 뿐.

바인은 그런 주군이 감정을 다채롭게 드러내는 걸, 지난 6년을 통틀어 작년 겨울에 처음 보았다. 소문으로만 접할 수 있던 무시무시한 북부의 대공과 조우했던 그때. 바인은 레사스가 화를 내고, 크게 낙담하는 걸 목격했다.

‘너희의 목숨을 살려 준 건 대공이다. 감정에 휘둘려 사실을 무시하려 하지 마.’

레사스는 세이아드를 보고 ‘솔리아스의 악마’라고 말하며 두려워하던 재스퍼를 그리 혼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 모두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터놓고 말하자면 바인 또한, 악시드 대공을 처음 본 찰나 악마라고 생각했었다.

상황이 너무 안 좋기도 했다. 곰만 한 니르아는 그 덩치 자체로는 깡으로 이겨 냈지만, 그것들을 조우한 순간부터 내면에서 올라오는 본연의 공포가 기이하고 두려웠다. 조금만 정신이 해이해지면 팔이 덜덜 떨렸고 자꾸만 혼자 남은 듯한 썰렁함이 마음을 뒤엎었다.

그러던 차 소리 없이 어둠으로부터 나타난 장신의 사내가 붉은 안광만을 빛내며 인간의 것이 아닌 힘을 선보였을 때, 솔직히 조금 지릴 뻔했다. 자존심 때문에 다들 티 내지 않았지 분명 재스퍼도 지렸을 것이다.

대공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강자가 가진 특유의 힘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서 있었고,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소름 돋게끔 강했다.

막상 검을 다루는 솜씨는 별로일 거라고 재스퍼가 툴툴거렸지만, 바인은 어둠 속에서 대공이 휘두르던 검을 똑똑히 보았다. 묵직한 장검은 희미한 붉은 기를 띤 채 신속하고 날카롭게 약점만을 노렸다. 검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는데, 대공의 검은 불필요한 살수가 없었다. 그의 싸움은 효율적이고 지극히 깔끔했다. 인간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 검이 자꾸 기억에 남았다. 마을 사람들을, 그들의 부모를 학살한 니르아를 홀로 아무렇지 않게 제압하던 힘 또한. 그날 이후 바인은 대공에 대한 두려움보다 니르아를 잡고 싶다는,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어떤 열망과 자꾸 부딪혔다.

그래서 이 순간이 답답했다.

“의미 없이 시간을 때우고 싶지 않다는 뜻이야.”

물론 지금은 봄이니 니르아를 상대할 길도 없었다. 또한 레사스가 한 달 전 막 실드라스 영지로부터 올라와 크게 아팠던 탓에 한동안은 모두 왕궁에 머물 것 같기도 했다.

“의미 없긴 뭐가. 곧 악시드 대공이 왕궁에 온다던데, 위험한 사람이 오니까 최선을 다해서 경계해야지.”

바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명백한 비웃음에 리그다가 삐딱하게 멈춰 섰다.

“웃어?”

그대로 한 대 때릴 기세라 바인이 얼른 이유를 말했다. 리그다한테 맞으면 진짜 아프니깐. 체구는 호리호리한 여성이 힘은 어지간한 남자 이상으로 장사였다.

“적이 오는 것도 아니고 티테르가 왕궁을 방문하는데 뭐가 위험하냐. 그럴 거면 아예 발을 디디지 못하게 해야지.”

리그다는 작년 겨울에 레사스가 시킨 다른 일을 하느라 북부의 여정에 합류하지 못했다. 대공을 보지 못한 그녀가 궁금한 듯 바인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엄청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매? 악마라고 불릴 정도면 왕궁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누가 알아. 전대 대공도 바로 이맘때쯤에 폭주해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잖아.”

리그다가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대공에 대해 말할 때면 정석적으로 하는 말이었다. 북부에 가기 전까진 바인 또한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가고 나서 그가 겪은 일들은, 뭔가,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좀 달랐다. 리그다의 저 말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기엔 바인 또한 대공을 잘 몰랐고, 그 내용들이 하나같이 중대하게 느껴져 감히 떠들고 다니기가 그랬다. 힘이 없는 것들은 모름지기 입을 잘 다무는 게 상책이었다. 그래서 바인은 그냥, 명백한 사실 하나만 말했다.

“어차피 대공이 죽이고자 숨어들면 막을 사람도 없어. 그렇게 강한 사람을 누가 이기겠어.”

“호오….”

바인보다 검에 미친 리그다는 그 말에 흥미로워했다. 소문으로 쌓은 적개심이 누그러지더니 질문이 쏟아졌다.

“얼마나 세길래 그래? 레사스 전하보다 더?”

“전하도 보기 드문 천재지만 글쎄, 대공과는 근본적으로 달라 보였어. 막을 길을 그리기 어렵더라고. 보는 순간 막막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경험이 느껴졌다. 이래저래 사람을 많이 다치게 해본 바인이었으나, 그런 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피가 튀는 전장에 대한 노련함이 몸에 스민 자였다. 그의 말을 들은 리그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롭다는 듯 첨언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북부를 지키지. 북부는 역사상 한 번도 니르아에게 크게 당한 적이 없잖아. 왕국에서 가장 긴 겨울을 나는 거대한 숲을 지녔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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