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뜬금없는 대꾸에 세이아드가 표정을 굳히자 아스테르가 즐거운 듯 웃었다. 하하, 경쾌하게 울린 소리를 흘린 그는 마지막으로 뒤돌아 레사스에게 다정한 형처럼 인사했다.
“부디 무탈하게 겨울을 나길 바라마, 레사스.”
밀리지 않고 아스테르에게 대꾸하던 레사스는, 아스테르와 세이아드가 지나치게 가까워진 순간부터 말이 없었다. 무슨 속셈인가 싶어 그를 살피니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가 이곳에 들어선 이후 한 번도 세이아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레사스의 눈가가 불긋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그는 세이아드의 얼굴 어딘가를 훑고 있었다. 시선이 가는 곳을 어림잡아 보니 아스테르의 입술이 닿은 듯 보인 뺨이었다.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길에 점점 더 힘이 실리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미동조차 없이 그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한 시온이 그를 일깨웠다.
“레사스, 이만 가자.”
그의 말을 듣고서야 레사스가 시선을 풀었다. 숨 쉬는 것도 잊었던 사람같이 얕게 숨을 들이켠 그는 천천히 웃는 얼굴을 하며 시온의 말에 응했다.
“알겠어.”
시온은 레사스가 그리 웃어 주자 비로소 안도하는 눈치였다. 눈에 띄게 안심한 시온이 손을 내밀자,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레사스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걸 보자 어제부터 혼란스러웠던 세이아드의 머릿속도 정리되었다. 그가 익히 알고 믿어 온 광경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이아드가 알던 과거가 허공으로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자꾸만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와중에, 그가 분명히 기억하는 과거와는 달라진 사람들의 행동이 당혹스러웠다. 그의 행동에 따라 현실이 변하길 원했기에 조금씩 다르게 움직이곤 있지만, 그가 겪은 것들이 아예 뒤바뀐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비교군이 있을 땐 선택한 반대를 고르면 되지만,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면 스스로가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
두려웠다.
그다지 마주하고 싶은 감정은 아니었다. 공포는 티테르가 제일 먼저 거세해야 하는 감정이니까. 누구보다도 니르아를 많이 조우하는 티테르가 공포를 느낀다면 전투가 불가능하기에, 어린 티테르는 정식으로 작위를 잇기 전까지 공포를 극복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배웠다.
그러니 죽음은 기실 그에게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실패였다. 어떤 방식의 실패를 두려워했는지를 죽고 나서야 알게 된 점이 모순이었다.
한결 차분해진 심정으로 세이아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 그를 지나쳐 나가려던 시온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노려보았다. 세이아드는 그보다 한참은 어리고 작은, 갓 스무 살이 된 둘을 살폈다.
이리 보니 시온 실드라스 또한 참 어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지고, 마주치지 않는 것이 최선인 존재지만… 이번 삶에서는 그와 전처럼 얽히긴 싫었다.
“먼저 가도 좋아, 실드라스 공작.”
기원제는 내년 봄에 있을 왕실 회의에서 폐지될 터니, 큰일이 생기지 않는 한 시온 실드라스는 거의 볼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로 얽히고 보내는 편이 나았다.
“갑자기 무슨 꿍꿍이로 사람처럼 구시는 겁니까, 대공? 레사스에겐 어떤 소리를 했고요?”
한 번도 이 정도로 무난하게 서로 스쳐 간 적이 없어서인가, 시온은 잔뜩 경계했다. 레사스와 비슷한 듯 살짝 작은 그는 시선을 올려 세이아드를 보는 게 싫은지, 턱을 치켜들었다. 영락없는 어린 청년의 행동이라 세이아드는 피곤해졌다. 레사스가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애였다는 걸 자각한 며칠 전에 느낀 감정과 엇비슷했다.
“우리가 숨 쉬는 것조차 비웃던 분께서 친히 길을 양보하시니, 누가 보면 미친 줄 알겠습니다.”
브레드히트 공작도 비슷한 말을 했다. 세이아드는 침묵으로 대꾸했다. 이 둘을 상대로 날을 세우지 않는 것은 세이아드 본인에게도 낯설고 불유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의미 없는 행동임을 뼈저리게 자각했기에, 비효율적인 짓을 하지 않는 것뿐이다.
“대공은 아무 것도 안 했어. 내가 대공의 가이드가 되고 싶었던 거야.”
가만히 시온의 시비를 듣고 있던 레사스가 그다지 반갑지 않게도 세이아드의 편을 들었다. 시온이 이것 보라는 듯 경악했다.
“레사스, 대공이 협박이라도 했어? 아니, 아니지. 솔리아스의 일원에게 그 정도로 무례하고 위험한 짓까진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대공.”
세이아드 또한 그의 행동 중 어느 것이 레사스를 변심하게 했는지 의아했다. 안카를 구했을 땐 그의 언행에 불쾌해했고, 그의 편을 드는 행동도 싫어했으면서, 각성에 대한 이야기를 흘린 뒤로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역시, 감정처럼 위험하고 불확실한 요소가 없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를 자꾸만 만들고 발목을 잡을 뿐이야.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전하를 모시고 어서 가는 게 어떤가.”
시온은 차라리 이쪽이 낫다는 듯 세이아드를 노려본 뒤 레사스를 당겼다.
“레사스, 가자.”
“…알겠어.”
세이아드의 말은 그리 듣지 않더니, 레사스는 시온의 말에는 고분고분했다. 세이아드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가루처럼 얼굴에 묻은 시선의 흔적이 거슬렸다. 한 번 더 세이아드를 돌아본 레사스는 이내 시온과 손을 마주 잡은 채 회의장을 나섰다.
끈질기게 손을 잡아 오며 ‘정화’가 중요하다 우기던 레사스의 모습은, 굳이 세이아드에게 국한된 게 아닌 그냥 시온으로부터 비롯된 습관인 것 같았다.
‘저렇게 다니면서, 잘도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군.’
어쩌면 레사스는 뛰어난 연기자일지도 모른다. 순전한 눈동자로 세이아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묻던 얼굴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혼란스러웠으니까.
그러나 더는 생각해 봤자 의미 없는 일이다. 일단은 목표한 걸 이뤘다. 이 정도의 관계라면 레사스의 정화를 위급할 땐 빌릴 수 있을 것이다. 초기에 구상했던 것과는 다르긴 했으나 선택지는 그래도 만들었다.
원래 그는 레사스가 다른 영지로 떠나기 전까지만 힘을 빌리려고 생각했었다. 아스테르의 뜬금없는 독점욕과 레사스의 돌발적인 요구가 변수로 작용해 결국엔 무산되었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레사스와 거리를 두는 것이 편했다.
베트리아와 브레드히트의 목숨도 일단은 연장시켰으니, 한동안은 폭주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며 니르아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세이아드는 그 자신이 티테르이면서도 정화나 가이드에 대해 아주 잘 알지는 못하는 걸 이번 기회에 새삼 실감했다. 그에 관한 서적과 사례는 모두 왕실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부터는 과거엔 하지 않았던 일을 할 차례였다. 정보를 모으고, 그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도 있을 그림자를 만드는 것. 언제나 스스로가 그림자였던 세이아드에게는 아주 낯선 일이었지만, 필요했다. 니르아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잘 알아야만 했다.
어쩐지 폭주와 관련된 이 모든 것들이 니르아로부터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부상자가 생겨 꼼짝없이 발이 묶였던 손님들이 모두 성을 떠날 준비가 되었다. 새로운 손님인 파르마와 베트리아를 남겨 둔 채, 브레드히트를 비롯한 이들이 채비를 끝냈다. 내내 머무르던 마차와 말들이 죄 한곳에 모여 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하지 못했어. 뭔갈 잊었나 했더니 그거였어.”
브레드히트는 가는 길에 시온과 함께 베트리아 공작령에 들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셀피니 베트리아와 가까이 지냈으니, 딸인 스텔라에게 이 소식을 본인이 직접 전하는 게 낫다고 여긴 것 같았다. 마차에 오르기 전 의무적으로 배웅을 나온 세이아드에게 그는 성큼 다가와서는, 감사를 표했다.
“빚을 졌네. 베트리아와 있던 일은 자칫하면 모두 죽거나 크게 다칠 수 있는 일이었어. 그대의 판단 덕에 최소한의 피해로 끝났어. 솔직히 말하자면 대공다운 행동처럼 보이진 않아. 다 각자의 사정이 있고, 행동엔 이유가 있지만….”
브레드히트가 씩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개인적으론 지금 대공의 행보가 아주 마음에 든다네. 그러니 감사의 포옹, 어떤가?”
세이아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브레드히트가 포옹을 악수로 바꿨다.
“그렇다면 악수라도?”
“이번에 생긴 일을 보면 아시겠지만, 니르아의 양상이 기이합니다. 동부에서 볼일을 끝내면 영지로 돌아가 미리 겨울을 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끝끝내 브레드히트의 제안을 무시하고 세이아드는 진짜로 필요한 경고를 했다. 브레드히트는 입맛을 다시더니 세이아드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무래도 두 눈으로 목격한 게 있다 보니, 그래야 할 필요를 느끼네. 긴 시간 동안 이렇게 혼란스러운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방긋 웃은 그가 미련을 버리고 마차로 향하며 작별을 고했다.
“내년에 보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어 세이아드는 짤막한 고갯짓으로 대꾸했다. 시온 실드라스는 진즉 성을 떠났고 수도에서 내려온 이들도 아까 길을 나섰다. 그리고 시온 실드라스가 떠났으니 레사스 또한 이미 갔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고 성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는 막 말을 타고 나온 바인과 마주쳤다.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던 그는 세이아드를 보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손에 뭔가를 들고 뛰어왔다.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도착할 땐 몰랐는데 떠나는 행렬을 보니 사람이 정말 많았네요.”
“무슨 용건이지?”
“아. 전하께서 제게 부탁하신 게 하나 있어서요. 대공께 이걸 전해 드리라 했습니다. 내참, 이른 새벽부터 어딜 나가시나 했더니 이상한 걸 주워 오셨더라고요.”
바인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이아드에게 작은 알갱이들이 여러 개 달려 있는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얼핏 보면 석류 같기도 한 열매는 예로부터 악마를 쫓는 부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북부에서만 나는 스코샤 나무의 꽃이었다. 꽃잎이 없는 안갖춘꽃이지만, 엄연히 꽃인 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꽃말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뵐 때까지 지니고 있어 달라고 하셨어요. 옛날처럼요.”
세이아드가 받기 전까진 꼼짝하지 않을 기세로 바인이 가지를 내밀었다. 도통 손이 가지 않았으나, 차라리 받고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는 일단 손을 뻗었다. 바인이 냉큼 가지를 넘기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다들 대공님이 무섭다고 하지만 여튼 신세를 졌습니다. 다시 뵙기까지 건강히 지내십시오.”
인사를 마친 바인은 뒤처지기 싫은지 말에 얼른 올라탔다. 이랴, 박차를 가하는 짧은 외침 후 바인은 금세 성을 떠났고 세이아드만이 빈 광장에 남았다. 그는 손에 든 붉은 가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스코샤 열매의 꽃말은 흔치 않은 내용을 지녔다. 붉은 열매 안에 맺힌 뜻은 ‘나만은 당신의 곁에 있겠습니다’였다.
한참이나 가지를 들고 있던 세이아드는 바닥에 그걸 버리려다가, 이것이 나름대로 좋은 약재라는 것을 자각했다. 이대로 열매를 꿀에 절여 굳히면 독한 고뿔에 타 먹는 음료가 되므로, 성에 있는 의사에게 이걸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별 의미 없는 열매였다. 한겨울의 숲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얻을 수 있는, 그냥 그 정도의 번거로움이었다.
그 길로 성으로 들어간 세이아드는 그를 찾는 이들로 인해 가지를 잠시 서재에 두었다. 의사에게 건네주려던 그것은 그 길로 그대로 잊혀, 이듬해 봄이 되어서야 다시금 세이아드의 기억으로 돌아왔다.
반년의 긴 겨울이 지난 후, 왕국 전체에 봄이 찾아온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