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훌쩍이던 파르마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물기 젖은 푸른 눈이 놀라움을 담고 세이아드를 관찰했다.
- 감시라고 했나, 대공? 무슨 감시를 말하는 건가?
안 그래도 지난번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국왕의 음색엔 껄끄러움이 가득했다. 아스테르의 개로 인정받던 때도 국왕은 세이아드를 늘 불편해하던 바여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폐하께서 염려하시는 바는 폭주한 티테르를 때맞춰 막을 이가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현재 공작은 저의 감시 하에 유폐되어 있지요. 그녀의 힘을 쓰기 어려운 환경에서 감시한다면, 설령 폭주하더라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흠…. 놀랄 일이군, 대공. 그대가 베트리아 공작과 이리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네. 아니면 사람이 바뀐 건가? 최근 들어 전과 다르게 끼어드는 일이 많아졌어.
국왕은 실로 놀라워하면서도 그를 비꼬았다. 세이아드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무표정으로 긍정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 그러나 아무리 그대가 공작을 감시한다 한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곁에 두는 건 불가능하네. 그때 공작이 폭주한다면 어찌 감당하겠나?
“그날이 오면 제가 직접 목을 치겠습니다.”
덤덤히 베트리아를 죽이겠다는 말에 시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브레드히트 공작은 영문을 모르게끔 기대하는 눈으로 세이아드를 보고 있었다.
- 그러다 불필요한 피해가 생긴다면 그것은 어찌 책임질 텐가?
“폐하, 사고는 언제 어디서나 생기지 않습니까. 티테르는 한 명이라도 살려 두는 쪽이 이롭습니다. 이런 식으로 혹 폭주의 징조가 보일 때마다 티테르를 죽인다면 조만간 씨가 마르겠군요.”
듣고 있던 시온이 냉담한 목소리로 그를 지적했다.
“입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불길한 가정을 하고 있군요.”
세이아드가 흘끗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일부러 피하고 있던 레사스와 그 순간 시선이 얽혔다. 내내 세이아드를 보고 있었던 건지 몰라도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시선이 섞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레사스가 내내 침묵한 것이 의외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레사스라면, 이런 일에 앞장서서 나설 거라 여겼는데.
…아니, 그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 어제부로 무너졌지.
사실 세이아드가 아는 레사스는 어린 시절을 기반으로 했다. 그렇게 잘 안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의 레사스마저 정작 몰랐던 게 있으니, 누군가를 ‘안다’라고 단정하는 건 의미 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티테르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건 맞으니까.”
침묵하고 있던 레사스가 그때 입을 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편을 든 것이 믿기지 않는지, 시온이 고개를 슬쩍 틀었다. 레사스에게 상체를 붙인 그가 속삭이는 게 희미하게 들렸다.
‘레사스, 지금 네가 변호하는 사람이 대공이라는 건 알고 있는 거지?’
레사스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여 시온의 말을 긍정했다. 뭔가 잘못된 걸 목격한 이처럼 시온의 입매가 굳었다.
“자식인 스텔라 베트리아가 공작을 감시하다 죽이는 것보다는 타인의 관할에 있는 것이 낫고, 공작이 최대한 힘을 쓰지 않게끔 관리한다면 파장이 안정될 것입니다. 파르마 후작님의 정화로도 부족하다 여겨지신다면, 제가 여기에 남아 악시드 대공을 돕겠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레사스!”
북부에 남겠다는 말에 시온이 경악하며 작게 외쳤다. 모두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 대화를 듣고 있던 국왕이 이마를 짚으며 장내를 중재시켰다.
- 됐네. 그만하게. 악시드 대공의 뜻이 그러하고 안식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으니, 베트리아 공작을 악시드 령에 머물도록 하게나. 현 시점부터 그녀의 작위를 자식인 스텔라 베트리아에게 넘기고, 파르마 너는 책임의 대가로 이곳에서 그녀를 돌보거라. 북부의 혹독한 추위를 자처한 것은 너라는 걸 명심해.
파르마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오라버니.”
왕은 크게 한숨 쉰 뒤 다음으로는 레사스를 질책했다.
- 레사스, 이미 정해진 가이드가 있는 티테르를 네가 도울 필요는 없다. 막 가이드가 되었으니 잘 모를 법도 하나, 확인된 네 능력이라면 실드라스 공작이나 베트리아 공작의 곁에 머무는 게 옳아.
“만약 형님보다도 제가 대공과의 상성이 더 좋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사스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스테르의 푸른 눈이 서늘히 가라앉았다. 레사스를 우습다는 듯 쳐다본 아스테르가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어찌 그리 자신하느냐, 레사스?”
레사스의 각성 이후 처음으로 아스테르가 그와 말을 섞었다.
세이아드는 눈앞의 광경을 보며 진심으로 레사스가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레사스가 필요한 건 맞지만, 세이아드가 생각한 방향은 이게 아니었다.
“네 상성이 아무나 쓸 수 있는 걸레처럼 편하다 한들, 어려서부터 나의 정화만을 받던 세이아드마저 편하게 여기리라 믿느냐?”
- 아스테르.
천박한 표현에 왕이 점잖게 그를 제지했다. 아스테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왕의 지적을 받아냈다.
“가이드로서 솔리아스를 최대한 위하는 방법을 택하진 못할망정, 벌써부터 권력에 눈이 먼 것이 아닌가 저어되었을 뿐입니다.”
- 옳은 말이나 삿된 표현은 삼가거라. 네 소중한 동생이 아니더냐.
“그렇습니까?”
얼마 전이었다면 아스테르의 저런 행위를 내버려 두었을 거라는 걸 모두 알았다. 아스테르의 가벼운 되물음에 왕이 헛기침을 했다.
“한창 신날 터이니 얼마든지 내 걸 탐내도 좋아. 그러나 이드는 나의 티테르이니, 감히 눈길조차 주지 말거라.”
아스테르는 그리 말하며 세이아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아스테르의 말을 듣고 있던 레사스의 보랏빛 눈이 순간 깊어졌다. 그 반응을 잡아낸 아스테르는 세이아드에게 상체를 가까이 붙여 일부러 모두 들으란 듯이 속삭였다.
“어차피 이드는 내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이라서. 어제도 내 체온을 품으며 잠들었더라지?”
다소 남사스러운 이야기에 파르마 후작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혼란스러운 것은 세이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스테르가 이렇게나 직설적으로 남들 앞에서 그를 독점하려 든 적은 처음이었다.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도 보지 못했던 소유욕에 허망함이 밀려들었다.
이리 굴 것이라면 끝까지 제 옆에 있어 줄 순 없었던 건가?
레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든, 쓸모 있던 소유물이 빠져나갈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싫어서든, 세이아드는 아스테르에게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표정을 굳힌 세이아드가 아스테르의 말을 끊으려는데, 레사스가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제가 본 대공은 그렇지 않던데요.”
그 말과 함께 레사스의 시선이 어지러이 얽혀 왔다. 덤덤한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여유 없이 끓고 있는 보라색 눈이 꼭, 오두막에서의 밤 같았다.
‘입맞춤은 처음이어서.’
레사스의 반박은 순 거짓이었다. 입을 처음 맞춰 본다는 어린 것의 기술이 아무리 능숙해 봤자였다. 그날의 레사스는 세이아드가 했던 난폭한 입맞춤을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아주 집요하고 끈질긴 방식으로 말이다. 숨을 고르는 법을 익혀 가며 그는 깨어 있는 내내 세이아드의 입술을 새끼 짐승처럼 핥고 맛보았다. 혀까지 섞었을 땐….
“그만, 레사스. 이 정도면 충분해. 어차피 너는 지금 나와 함께 동쪽으로 가야 해.”
세이아드가 회상을 억지로 끝내는 동시에 시온이 질색하며 끼어들었다. 듣기 싫은 것을 잔뜩 들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그가 왕에게 고했다.
“안 그래도 막 말씀드리려던 차였습니다, 폐하. 베트리아 공작령 여명의 숲에서도 벌써 겨울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를 돕기 위해 아버님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남부를 떠났던 차에, 전하의 소식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북부에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확인한바, 레사스 전하의 힘은 상성을 가리지 않는 듯하니, 스텔라 베트리아를 돕게끔 하는 게 타당해 보입니다.”
간만에 시온과 뜻이 맞았는지 왕이 지체 없이 그를 허락했다.
- 실드라스 공작의 말이 백번 옳다. 레사스가 돕게 될 티테르는 수도로 올라와 차후 정하기로 하고, 이번 겨울은 동부를 돕는 것으로 먼저 시작하는 게 좋겠군. 두통이 올 것 같으니 회의는 이쯤 마무리하겠다. 브레드히트 공작 또한 이제 영지로 돌아가 겨울을 대비하시게. 그대들의 말이 맞았어. 숲의 조사는 봄이 온 뒤 계획해도 늦지 않아.
“이제라도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놓이는군요.”
브레드히트의 뾰족한 대꾸에도 왕은 별말 없이 교신을 끊었다. 어지간히 이 대화를 그만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질린 것은 세이아드도 마찬가지였다. 아스테르와 레사스만이 각자의 방식대로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혀 닮지 않은, 분위기마저 완전히 다른 그들이 처음으로 형제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긴 겨울이 되겠네요.”
자리에서 일어난 파르마가 진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브레드히트가 공감했다.
“이렇게 사건이 많은 겨울은 내 살면서 처음입니다. 악시드 영지에 있던 며칠이 일 년 같구려.”
파르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브레드히트의 말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전대’ 베트리아 공작이 된 셀피니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아스테르, 나를 셀피니에게로 안내해 주렴. 그녀를 만난 뒤 나는 좀 쉬어야겠어.”
“네, 고모님.”
아스테르는 퍽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베트리아 공작의 처분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이아드를 둔 레사스와의 언쟁에서 끝내 레사스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해 즐거운 눈치였다. 파르마의 손을 팔에 얹은 그는 먼저 일어나며, 일부러 세이아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그럼 먼저 가 보지. 이제부터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대와 나만의 겨울을 보낼 터니, 손님들을 배웅할 시간 정도는 주겠어.”
세이아드는 흘끗 고개를 틀었다. 아스테르와 입술이 맞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가 낮게 경고하듯 말했다.
“아까는 왜 없는 말을 지어내신 겁니까? 제가 전하의 체온을 품고 잠들기라도 하리라 여기신 겁니까?”
“아니, 내가 그대의 체온을 품고 자겠지. 나는 안기는 쪽보다는 안는 쪽을 더 즐기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