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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36화 (36/147)

#36

멈칫하며 그를 보자 레사스는 진실로 의아한 사람처럼,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흰 미간에 약한 주름이 졌다.

“대공께서 말하는 소중한 이가 설마, 제 어머니는 아니겠지요.”

그런 가정 자체가 진심으로 말이 되지 않는 듯이 레사스의 긴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그러자 당황한 쪽은 세이아드였다.

‘꾸며 낸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말이 나올 리 없다. 긴 시간 보아 와서 알고 있지 않나. 레사스가 어머니인 왕후로 인해 항시 슬퍼하고 실망하던 것을.

하지만 말을 지어내는 행동도 레사스답지는 않았다. 세이아드가 말문이 막혀 그의 기괴한 질문을 어떻게든 해석하려는 사이, 레사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태어난 이래 얼굴을 본 적이 손에 꼽히는 분을 내가 왜 소중히 여길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왕후 폐하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습니다. 제게는 유독 모질긴 하셨으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유감 또한 없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럴 리가.

“왕후께서는 전하의 어머니이십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건 자연의 섭리입니다.”

“모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듯, 자식이라 하여 부모를 무조건 사랑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절 낳은 분이죠.”

그게 끝이라는 듯, 레아나 왕후에 대한 레사스의 감상은 이어지지 않았다.

“전대 대공의 일은 분명 억울한 죽음입니다. 하지만 왕후 폐하의 피를 이었단 것만으로 날 배척할 정만큼의 비극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세이아드는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모순적인 감정이 동시에 올라와 충돌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억울하다고 표현한 것이 묘하게 그를 위로하면서도, 레사스의 말이 순 엉망이라고 느껴졌다.

“반대로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하실 겁니다. 설명하고 싶지도 않군요.”

머리를 슬쩍 기울인 레사스는 입을 다물고 세이아드를 빤히 보았다. 한숨을 삼킨 세이아드가 다시금 말하려는 차, 기이한 답이 나왔다.

“나는 그대가 무슨 짓을 했어도 괜찮았을 겁니다. 내게는 대공만이 의미있었으니까요.”

레사스의 고백은 기이했다. 그렇게 스스럼없이 사랑을 베풀고 남을 돕던 이가,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누구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느껴 본 적 없다는 말을 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터무니 없는 말이었지만, 레사스에게만큼은 가능한 일 같았다. 단지 이 고백을 지금 듣는다는 것이 너무나 혼란스러울 뿐.

“나는 내가 미천하고 한심하여, 그대가 내게 질렸다고만 생각했어요. 전대 프로시어스 공작께 생긴 일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거라곤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건 나와 그대 사이에 있던 일이 아니니까요.”

세이아드가 당혹스러운 고백을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해석하려는 사이, 레사스는 고백을 이어 나갔다.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에 세이아드는 그에게 반박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설령 전하께서 왕후를 그리 여기신다 한들, 정치적으로도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어제까지 나는 정치적 영향력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이지 않았나요? 아무도 상대하지 않는, 왕족 같지도 않은 왕족에게 입지란 게 있나요?”

또다시,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한 목소리.

덤덤한 레사스의 고백을 듣고 있으려니 고기 방패라도 되어 도움이 되겠다 말하던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그의 말은 순 엉터리같으면서도 진실되게 들리는 힘이 있었다.

굳건하게 쌓아져 있던 거부감이 안에서 한번 요동을 쳤다. 그와 협조하겠다고 결심한 후에도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던 그것은, 세이아드가 일부러 지켜 온 레사스를 멀리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것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실드라스 공작가의 가호를 받고 계신 몸이지 않습니까. 전하의 오랜 친우이자 왕후 폐하의 먼 친척이기도 한 시온 실드라스를 버젓이 옆에 두고도 그리 말하십니까.”

시온을 언급하자 레사스의 표정이 변했다. 곤란한 듯 내리까는 눈을 보며 세이아드는 일순 흔들렸던 자신을 질책했다.

하마터면 저 순진해 보이는 말을 다 믿을 뻔했다. 이렇게까지 절 회유하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사스의 말은 진실이라기엔 현실감이 없었다.

“시온은 분명… 좋은 친구입니다. 그때 내게는 반드시 그가 필요하기도 했고요.”

레사스는 이번만큼은 사실을 말했다. 혼란으로 가득하던 마음이 저 말에 차라리 안도감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누군가와 감정적으로 부딪힌 것이 까마득한 과거였던지라, 세이아드는 더는 레사스와 말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뭔갈 기대하기 싫었다.

“그만 듣겠습니다.”

세이아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느새 밤이 깊어져 있었다. 경계심을 잔뜩 드러내는 표정을 본 레사스가 드디어 침묵했다.

“궁금증은 이만하면 충분히 풀어드린 것 같으니,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전하께서 어떤 의도로 제 가이드를 자처하시는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번 생에는 더는 레사스를 기만하고 싶지 않아 직접 정정하려 했을 뿐이다. 어차피 가이드와 티테르의 일은 나라가 정하는 것.

“이제야 겨우 그대가 날 필요로 하는데,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어요.”

레사스는 끈질겼다. 세이아드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뒤따라오지 말라는 의도를 분명히 담아 몸을 돌린 그는, 레사스가 잊은 것처럼 굴고 있는 사실 하나를 짚어 주었다.

“전하께서는 저를 싫어하십니다. 제 행실을 경멸하고 제 악행을 증오하시죠. 그걸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답을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을 보였다. 망설임 없이 성으로 돌아가는 그의 뒤로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나는 기대하지 않으려고 했던 겁니다.”

문장의 끝에 얼핏 이름이 불리었던 것 같기도 했다. 듣지 않으려 해도 들어 버린 속삭임을 일부러 무시하고, 세이아드는 깊은 그림자가 내려앉은 성으로 들어갔다.

***

정화를 충분하다 못해 넘쳐 흐를 정도로 받았다. 그것도 두 명의 가이드에게.

모든 힘에는 한계가 있듯 가이드의 정화도 당사자의 체력을 앗아 가는 일이라, 이 같은 시기에 정화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 넘치도록 받았다.

‘베트리아가 감히 네게 이런 상처를 냈구나. 가엾은 나의 별.’

아스테르는 어젯밤만큼은, 과거의 세이아드가 착각했던 것처럼 그를 진실되게 아끼는 이같이 굴었다. 아물다 만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한 그는 자신의 힘을 상당히 썼음에도 세이아드의 머리칼을 만지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파장 또한 안정시켜 주었다.

‘며칠 전의 내 실수를 용서해. 그대가 이런 위험에 처하리라 생각하지 못하고 심술을 부렸다. 내 하찮은 동생의 일로 괜한 너를 괴롭혔어. 미안하다.’

그리 말한 아스테르의 입술이 이마에서 내려와 뺨에 닿았다. 입술 근처에 닿을 듯 지분거리는 움직임은 내버려 두었다면 입맞춤이 되었겠지만, 세이아드가 그걸 피했다.

과거였다면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입술을 앗았을 것이다.

하지만 묘한 거부감이 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정화는 그저 정화일 뿐이니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닌데.

세이아드가 깊은 정화 의식에 거부감을 가진 걸 알고 있는 아스테르는 별다른 강요는 하지 않았다. 다만, 함부로 다쳐 온 죄로 아스테르의 침실에서 같이 밤을 보냈다. 잠들어 있는 그를 호위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나 남들이 알 수 있는 사정은 아니었다.

세이아드는 그의 침대에 걸터앉아 밤새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금발과 반듯한 얼굴은 이리 볼 때면 태양을 빚어낸 것처럼 신성해 보였다. 복잡한 심정으로 그를 지키며 세이아드는 밤새 아스테르의 정화가 정말 문제인지를 가늠했다.

분명 아스테르와 레사스의 정화는 다르다. 닿는 것만으로도 불안하던 파장이 가라앉는 것도, 전신을 들쑤시던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같은데, 표현하기 어려운 미세한 무언가가 달랐다. 레사스와 있던 때에는 요동치던 감정이 아스테르의 정화를 받고 난 뒤엔 완전히 차분해져서, 외려 아스테르의 정화가 더 좋은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처음 과거로 돌아왔음을 자각했던 때보다 상황이 많이 복잡해졌다.

며칠 전만 해도 세이아드는 그저 자신의 폭주를 막는 것만으로 세상이 안전해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누군가 정말로 티테르를 폭주시켜 그들의 수를 줄이고자 한다면, 끝내 니르아를 막는 존재가 없어진다면, 그땐 이 땅에 있는 모두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다.

불현듯 떠올랐다 사라진 환상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

기이한 환상은 마치 세실리아의 예언처럼 느껴졌다. 자각몽처럼 들이닥친 환상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잊혀 갔지만, 불타오르던 왕국의 모습만큼은 확실히 기억했다.

세이아드의 안에 도사리는 광증이 만든 환각일지 몰라도 이것으로 인해 세이아드는 티테르의 숫자가 줄어든 것이 왕국의 멸망과 연관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문제는 계기였다. 베트리아와 자신 모두 아스테르라는 연결고리가 있지만, 왕국의 후계자가 땅의 멸망을 원할 리 없었다. 이곳에 발 딛고 사는 생명이라면 모두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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