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제가 전하께 바란 것은 어디까지나 약간의 아량이었습니다. 귀한 힘을 남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레사스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허공에 부옇게 서렸다. 밤처럼 잠긴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대는 내 티테르니 남용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전하.”
세이아드는 오두막에서 있던 일을 정정할 시기가 됐음을 깨달았다.
“가이드도 티테르도 한 명을 위한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돌봐야 할 많은 티테르가 있으십니다. 시온 실드라스와 정화를 시험해 보셨다면, 분명 두 분의 상성이 맞다는 뜻이겠죠. 때마침 시온 실드라스는 스텔라 베트리아도 그러하듯 상성이 높은 가이드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티테르가 둘이나 있는 실정입니다.”
처음부터 레사스가 그만의 가이드가 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상성이 높은 전하가 시온 실드라스의 정화를 맡는 쪽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레사스는 모든 티테르와의 상성이 맞았으나, 아스테르라는 가이드가 있는 세이아드에게 두 명이나 되는 가이드를 배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를 알기에 세이아드 또한 레사스의 편이 되거나 그의 옆에 있게 되리라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다.
물론, 레사스의 가이드는 생각보다도 더 좋았다.
다시는 이 감각을 잊지 못하게끔, 영혼을 흔들 만큼 충격적이었다. 이렇듯 몸이 가벼운 적 없었고 언제나 도사리던 추위마저도 사라지는 기분이 든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세이아드 같은 죄인에겐 지나친 사치였다. 세이아드에게는 오직 폭주를 막을 정도의 힘만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아스테르의 정화를 받은 이가 폭주에 노출된다는 추측이 사실이라면, 레사스의 정화는 기실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티테르를 돕는 것은 당연한 가이드의 의무. 그걸 저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대를 내 앞에 둘 거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의 티테르가 되어야 해요.”
레사스는 또 이상한 고집을 부렸다. 그는 세이아드의 지적에도 흔들림 없이, 형형한 보랏빛 눈으로 그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하, 모든 영지가 동시에 혹한기를 맞이할 때, 그때 반드시 제 옆에 있겠다고 확신하실 수 있으십니까? 다른 이들이 다쳤더라도 절 가장 먼저 찾으실 거라고도?”
레사스라면 반드시 이 질문만큼은 답할 수 없을 것이다. 확신을 담은 세이아드의 질문에 레사스 또한 멈칫했다.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로 그는 세이아드를 살폈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럴 겁니다.”
이번에 기가 막힌 쪽은 세이아드였다. 레사스의 성격이라면 곤경에 처한 이를 우선시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어야 하니까 말이다. 짐작 못한 기습을 틈타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대는 분명 내게 약조했습니다. 나의 힘을 빌려주는 대가로 나의 티테르가 되겠다고. 이제 와 물러나기 위해 나를 밀어내는 이유가 뭡니까.”
레사스의 목소리가 일순 고통스럽게 변했다.
“이번에는 이유를 들어야겠습니다. 전처럼 영문도 모른 채 그대에게 도려내질 생각은 없으니, 반드시 내 말에 대답해야 할 겁니다.”
세이아드는 무의식중에 한걸음 물러섰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에게 레사스가 다가섰다.
“그렇게 매정하게 쳐 낼 거라면 그대는 처음부터 날 아는 척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남들이 모두 그러하듯 길가의 돌멩이 따위는 무시하고 지나쳤어야 했습니다. 하찮은 것에게 이름을 주지 말아야 했습니다.”
레사스는 현재를 묻겠다 했으나 과거를 묻고 있었다.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세이아드에게 밀려났던 그 시기를.
“내가 그리 끔찍하여 버리고 싶었다면, 애초에 내게 그대의 곁을 내어주지 말았어야 합니다. 나 같은 것도 살아도 된다며 내게 그토록 아름다운 말을 속삭여 놓고는….”
다시금 물러나려는 세이아드를 레사스의 손이 잡았다. 뜨거운 손은 그대로 세이아드를 녹여 버릴 것처럼 힘이 강했다. 부드럽고 섬세한 외양과는 어울리지 않는 집요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세이아드를 놀라게 했다.
레사스를 모욕하고 냉대한 만큼 그의 마음엔 더는 과거에 대한 미련조차도 없으리라 여겼다. 진즉에 사라져 증오로만 바뀌었을 것이라고, 당연하게도 그리 믿었다.
“과거의 일입니다. 쥐고 있어 봤자 도움되지 않는 것을 왜 버리지 못하십니까? 전하, 소꿉놀이는 끝났습니다. 전하와 저는 깊게 관여되어 좋을 것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금이 가 떨어진 유리는 영원히 그 흔적을 간직할 것이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세이아드가 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한들, 그렇다 하여 레사스를 둘러싼 것들마저 바꿀 수는 없었다.
세이아드는 평온해질 자격도 없었고 좋은 이를 옆에 둘 자격도 없었다. 그는 죄를 만회하고, 폭주를 막고, 그가 죽인 이들만큼의 목숨 그 이상을 살리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
“아니.”
하지만 레사스는 그를 보내주지 않았다.
“그대의 손에 남은 흉터처럼 명백히 우리의 사이에 남아 있는 일입니다. 분명히 그 자리에 있는 걸 그대는 단지 외면하려고 하는 것뿐.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일을 외면하려면 내게 다시 말을 걸지 말았어야 합니다. 내 도움을 청하지 말았어야죠.”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힘으로 레사스는 절대 놔주지 않을 것처럼 세이아드를 붙들었다.
“그대의 의지로 나와 다시 얽히기로 한 이상, 이번에는 또다시 도망가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것은 더는 하지 않아. 나는 당신이 원할 때면 줍고 버리는 존재가 아니니까.”
몸이 바짝 닿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레사스가 세이아드에게 속삭였다. 격정적인 목소리와 달리 레사스의 얼굴은 달빛처럼 처량하고 슬펐다.
“대체 왜 나를 떠난 겁니까?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리 다정히 알려 줘 놓고?”
몰아치던 풍랑이 가라앉고 그 자리엔 조용히 밀려드는 바다가 남았다. 애틋하게 묻는 레사스의 목소리가 세이아드를 소리 없이 삼켰다. 귓가로 들려온 어지러운 단어들의 조합에 세이아드 또한 아득해졌다.
눈앞에 있는 소년이, 어린 청년이, 순간 어른으로 보였다.
입을 맞추며 정화를 이어 가던 찰나에도 그리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저 단어. 사랑이라는 그 기괴하고 낯선 말을 뱉는 레사스의 모습이 스물다섯의 그와 겹쳐 보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남쪽의 작은 궁에서 보내던 여섯 해의 계절들이 세이아드의 안에서 되살아났다. 기쁨을 안고 들어서면 보이던 창가의 아름다운 소년을 분명, 그 역시 많이 그리워했었다.
가족만큼 아꼈다. 피는 섞이지 않아도 세실리아를 사랑하듯 그를 사랑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절 따라다니던 착하고, 맹목적인 소년을 많이 지켜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의 찬란한 감정이 어쩌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기이한 충동이 세이아드를 흔들었다.
망가진 관계도 다시금 이어붙일 수 있던가?
세이아드는 그 자신의 생각이 바뀌어도 비틀린 관계는 되돌릴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특히나 세이아드 자신이 망쳐 버린 관계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다 문득 세이아드는 근본적인 걸 상기해 냈다. 그가 레사스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세이아드가 레사스를 아낄 수 있던 건 그가 원수의 아들이기 전이었다.
지나간 고통은 자연히 사라지질 않고 흉터가 되어 언제고 그 자리에 존재했다. 세이아드는 평생 더러운 바닥을 기어 제게 오던 어머니를 기억할 것이고, 어머니의 처형과 함께 성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린 아버지의 시신을 기억할 것이다.
세이아드의 악몽은 레사스의 소중한 이들로부터 나왔다.
“전하께서는 어린아이도 알 법한 걸 묻고 계십니다.”
세이아드는 레사스같은 성자가 아니었고 아량이 넓은 호인도 아니었다. 그는 레사스의 주변에서 실드라스의 존재를 볼 때마다 스무 살의 지옥을 떠올릴 터였다.
“전하가 그리도 소중히 여기는 분들은 모두 하나같이, 전대 악시드 대공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분들이 아닙니까. 반역자의 핏줄인 제가 그런 일이 있고도 전하의 곁에 있으리라 생각하신 게 순진하다 해야 할지, 아니면 어리석다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무례하고 위험한 발언이었으나 그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어차피 레사스에게 이런 식으로 지껄인 것이 한두 해가 아닌 터.
“전하의 곁에 그들이 있는 한 제가 전하의 티테르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진즉 이유를 짐작했으리라 여겼다. 상황이 명백했다. 그를 냉정히 쳐 낸 모습에 상처는 입었겠지만, 레사스는 원체 눈치가 빠르고 영민한 소년이었다. 정치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서로가 좋은 사이로 남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당연히 알 줄 알았다.
“하니, 전하의 티테르가 될 영광은 시온 실드라스에게 주심이 맞겠군요. 그게 옳아 보입니다.”
명백한 현실이라 굳이 말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입 밖으로 내고 나니 머리가 식었다. 그냥 이뿐이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건 기실 레사스의 탓은 아니고, 그의 곁에 있는 이들조차 세이아드만의 악몽일 뿐이다. 전처럼 직면하여 스스로의 영혼을 불태우는 대신, 세이아드는 이제 제가 해야할 일이나 하고 싶었다. 그게 죗값을 치르는 길이니까.
“이만하면 충분히….”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대체 누구입니까?”
의도치 않게 조우한 만남을 마무리 짓고 돌아가려던 세이아드에게, 레사스가 불쑥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