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가이드의 정화가 티테르에게 독이 될 수 있을까?
베트리아의 말을 들은 뒤부터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세이아드를 사로잡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며 가정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가이드는 티테르의 절대적인 아군이니까.
설령 관계가 좋지 않더라도 그들의 능력이 있어야만 티테르는 살아갈 수 있다. 정화를 받지 않아서 죽거나 폭주하면 몰라도 정화를 받고 폭주한다는 건 이상했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가장 불가능한 일, 시간을 되돌려 살아남을 겪은 이다. 만약 모든 것이 알고 있던 틀을 벗어나 일어나고 있다고 가정하자. 두 가지를 알아야 했다.
첫째. 아스테르의 정화가 실제로 티테르를 폭주로 몰아가는지.
둘째. 그렇다면 왜 그걸 원하는 것인지.
어쩌면 이건 그저 기괴한 우연의 일치를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베트리아가 아스테르와 닿은 것은 고작 한 번이고, 그마저도 정화의 수준이 옅었다. 반면 세이아드는 긴 시간에 걸쳐 아스테르와 있었음에도 아주 오랜 뒤에 폭주를 겪지 않았나. 이것은 아직 심증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만약 아스테르가 이걸 원하고 있다면, 혹은 그가 아닌 어떤 존재가 티테르의 폭주를 일으키는 이유가 뭘까? 개인적인 원한? 그것이 아니라면 티테르를 죽이는 건 솔리아스에 살고 있는 이에겐 최종적인 자살 행위였다. 티테르가 사라질수록 니르아를 막을 존재가 없어지니까.
…음?
‘니르아를 막을 존재가 없어진다…. 니르아, 니르아를….’
세이아드는 과거 베트리아와 브레드히트가 죽게 된 이후를 신중히 생각해 보았다. 성년이 되지 않은 노바가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되었고, 스텔라 역시 뒤를 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을 지도하던 부모 티테르가 그 시기엔 모두 죽은 상황이었다.
그때 당시 니르아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티테르는 단 다섯.
공작의 작위를 이은 티테르를 제외하면, 각자의 가문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던 티테르는 시온 실드라스의 남동생 뿐이었다. 세이아드의 여동생은 전투형 능력이 아니었고 그마저도 자취를 감춰 버렸으니 포함될 수 없었다.
이들을 제외한 왕국의 티테르는 수도에 거주하는 비전투형이었으니, 현재의 티테르에게 새 자손이 생기기 전까지 솔리아스의 안위는 고작 다섯에게 달려 있었다. 그러니 솔리아스의 현 국왕이 티테르에게 더는 의지하지 않게끔 집착하며 기사들을 양성하는 거겠지. 하지만 아무리 힘을 키우려는 국왕도 티테르의 필요성을 절대 무시하진 않는다.
다섯은 지나치게 적은 숫자다. 원래는 전대 공작들이 자식을 도와 같이 영지를 지켰고, 수는 그때보다 항시 많게 유지되었다. 이처럼 청년들만을 남기고 경험 있는 티테르가 죽은 적이 없었다. 당시 전투 경험이 가장 많은 이는 세이아드가 유일했다.
그런 상황에서 세이아드가 죽었다.
마음속에 무언가 하나 탁, 걸렸다. 끔찍했던 기억으로 돌아가 세이아드는 그 당시 제가 죽인 시체들 사이에 시온의 동생 또한 있었음을 상기해 냈다. 당장이라도 세이아드를 죽여 달라 울부짖던 시온의 얼굴이 겹쳐지며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후에 남은 것은 오직 셋.
세이아드가 죽고 난 솔리아스에는 고작 세 명의 티테르만이 남았다. 세이아드가 죽은 시점에서 광활한 북부 지킬 이는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그렇게 되면, 그러고 나면 솔리아스는….
그 순간, 세이아드의 뇌리로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세이아드가 겪어 본 적 없고 어디서 목격한 적도 없는 장면이었다.
왕궁이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에는 달이 없었고, 어두운 밤 아래 불타는 궁만이 유일하게 주변을 밝히는 빛이었다. 시체가 길을 이룬 궁 속을 여태 본 적 없는, 아주 거대한 암흑이 기어 가고 있었다. 뱀을 닮은 그것은 왕국의 정전에 홀로 서있는 이를 찾아냈다.
흰 검, 피가 묻었음에도 하얗고 깨끗한 검신을 든 레사스가 암흑을 마주보고 있었다. 세이아드를 죽였던 그 검이었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는 슬픔과 고통이 가득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찢기는 듯한 감각에 세이아드가 허억, 큰 숨을 들이켰다.
왕자가 검을 뻗었다. 죽은 사람들을 지키듯 그들을 감싸며 암흑에게 대응하면서. 그러나 그 하찮은 노력을 비웃듯 암흑은 긴 몸통을 사납게 비틀더니,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며 레사스에게 달려들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었음에도 레사스의 표정은 공포에 질려 있지 않았다. 다만 그는 한없이 슬프고 비통한 눈으로, 어딘가를 보고 있었을 뿐이다.
“대공?”
우뚝 멈춰선 채로 출처 모를 기억에 붙들려 있던 세이아드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정신 차렸다. 불시에 그를 습격한 이상한 환상은 정신이 들기 무섭게 빠르게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봐선 안 될 걸 누군가 빠르게 거둬 가는 기분이었다.
‘방금은 뭐였지?’
혼란스러운 얼굴로 세이아드는 최대한 기억을 붙들려 했다. 맹세코 그가 겪은 적 없는 일이었는데도 기시감이 있었다. 이러한 꿈을 얼마 전에도 꿨던 것만 같은 느낌이.
“대공.”
목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팔목이 잡혔다. 따듯한 감각이 단숨에 체내로 스며들었다. 몸이 살짝 떨렸다. 그제야 세이아드는 자신의 팔이 아주 차갑다는 걸 자각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깜빡이니 성의 외진 곳에 있는 정원이었다. 탑에서 돌아오는 길에 걸음이 샌 모양이었다.
“이곳에서 뭘 하시는 겁니까?”
흰 눈으로 가득 덮인 정원의 중앙에 레사스가 있었다. 고개 숙여 늘어진 눈덮인 정원수 아래에서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겨우 현실로 돌아온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제 팔목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괴한 장면을 보고 동요하던 내면이 레사스를 만나기 무섭게 안도하며 평온을 찾았다.
“성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호위 없이 홀로 이곳에 계셔선 안 될 텐데요.”
성주이자 티테르로서 하는 냉담한 말에 레사스의 얼굴이 희미하게 가라앉았다.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세이아드의 손을 보던 레사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사람들이 많은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조용한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이 난리가 났댔나. 오자마자 할 일이 많아 그 꼴에 대해선 캘러안으로부터 간략히 들은 게 다였다.
기분이 더러울 것이다.
적어도 세이아드라면 그럴 터였다. 인간은 언제나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동물이니 이 상황이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당장 저번 주까지 레사스를 모욕하거나 무시하던 이들이 태세를 완전히 바꾸었으니 그 가식적이고 모순적인 면이 역겨웠다.
“그렇다면 적합한 곳을 찾으셨군요. 이곳엔 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실리아와 세이아드가 자주 부모님을 피해 숨던 이 정원은, 원체 외진 곳에 있는 데다가 조경이 훌륭하지 않아 사람이 찾을 곳은 아니었다. 간혹 이곳을 찾아 밀회를 즐기는 하인들이 있긴 하지만 한겨울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북부의 겨울은 현지인들에게도 가혹한 추위니, 밖을 굳이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서였다.
“…자주 오는 곳인가 보군요.”
대답하려던 세이아드는 레사스가 내내 절 잡고 있었다는 걸 인지했다. 원체 느낌이 좋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마는, 의식하기 시작하자 불편했다. 힘주어 그를 쳐 내려는 차에 레사스가 자연스레 뒤엉킨 파장을 풀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이른 아침 이곳에 오면서도 할 수 없던 한층 진화한 정화 방식이었다.
“…그새 능숙해지셨군요.”
이 정도로 빠르게 능력을 다루기 시작하는 게 놀랍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 물어본 말에, 레사스의 얼굴이 조심스레 밝아졌다.
“그런가요? 오늘 배운 게 효과가 있었나 봅니다.”
세이아드는 ‘배웠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시온 실드라스를 떠올렸다. 당연히 그가 개입했겠지.
순간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저조해졌다. 시온이 아무리 정당하고 선량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를 인지하면 전대 실드라스 공작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세이아드가 더는 사감에 따라 움직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더라도,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를 떠올릴 때마저 침착할 순 없었다.
어머니의 다리 힘줄을 자르고, 사형까지 주도하던 시르칸 실드라스.
시온은 그의 아버지인 전대 실드라스 공작을 지나칠 정도로 빼닮았다. 브레드히트보다도 나이가 많았던 시르칸 실드라스는 여러모로 야욕이 많은 사람이었다. 선량하고 우아한 용모와 달리 그는 티테르의 영향력을 지금보다 더 넓히고 싶어 했고, 그를 위해 민심을 사로잡는 법 또한 잘 알았다.
남부는 대대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일을 많이 했다. 영지를 부유하게 가꾸는 것부터 시작해 치안에도 티테르가 직접 참여했으며, 그들의 경이로움을 긍정적으로 부각해 티테르가 영웅이라는 인상을 깊게 심어 주었다.
시르칸의 큰 그림을 어머니는 그다지 따라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티테르의 힘을 니르아에 대항하는 일 외에 쓰는 것을 경계했고, 스스로를 포장하거나 과시하는 것을 귀찮아했다. 원체도 마찰이 많았다. 티테르를 대동한 일에는 프로시어스의 승인이 필요했고, 시르칸이 원하는 일들은 어머니에 의해 무산된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의 폭주는 시르칸에게 좋은 기회였다. 그는 영웅으로만 보이던 티테르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어머니를 죽여야 했고, 그와 반대 노선에 있던 프로시어스의 권위를 깎으며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시온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행동도, 외양도, 모두…. 다른 것이 있다면 레사스를 버리고자 하던 시르칸과 달리 시온 스스로는 그를 챙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시온 실드라스는 레사스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세이아드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모두 그럴 것이다.
세이아드는 레사스와 시온에 대한 어떤 이야기조차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레사스에게 있어 시온은 소중한 친구이자 미래의 연인이 될 이였다. 왕자에게 소중한 이를 제 감정과 원한으로 인해 떼어놓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무시하고 피하는 쪽이 나았다.
“정화는 이렇게까지 자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이드인 전하께도 부담이 가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계속 노출될수록 티테르에겐 평온을 심어 준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보다는, 시온 실드라스에게 베풀어 주심이 낫겠습니다.”
시온의 이름을 언급하며 세이아드는 팔목을 쳐 냈다. 다정하게 감싸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레사스의 단정한 검은 눈썹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