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33화 (33/147)

#33

그러나 많은 게 달랐다. 저곳은 왕궁의 지하 감옥도 아니었고, 베트리아는 제압할 당시 팔을 완전히 박살 낸 것이 아니니 사지가 멀쩡히 있었다. 늘 단정하게 묶여 있던 푸른색 머리칼은 헝클어진 채였으나, 그래도 처참한 몰골이라 보기 어려웠다.

“…다들 오셨군요.”

갈라진 목소리 틈으로 고통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린 뒤로는 정화를 비롯한 의사의 손길 조차도 거부하고 있으니 필시 몸 상태가 끔찍할 것이다. 폭주의 여파로 속이 진탕이 되었을 터.

“상태는 어떻습니까, 공작.”

브레드히트의 질문에 베트리아가 힘없이 들었던 고개를 다시 숙였다.

“보시는 대로.”

작은 웅얼거림을 듣던 아스테르가 나섰다.

“그대의 폭주에 대해 감이 잡히는 것이 있는가, 공작? 파르마 고모님과 그대는 문제 없이 수월히 정화를 이행하는 것으로 아는데. 숨기는 것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사실대로 고하는 게 좋아. 폭주하고도 그대의 숨이 붙어 있는 이유는 오직 악시드 대공 덕인 것을 알겠지.”

베트리아의 처우는 티테르들과 가이들이 모두 모여 정해야 하나, 결정에 큰 힘을 지닌 건 왕실이었다. 아스테르의 말에 고개를 쳐든 베트리아가 외쳤다.

“파르마 후작님께서는 의무를 철저히 지키셨습니다. 정화를 소홀히 한 적은 맹세코 없습니다, 전하. 이런 순간이 찾아온 건 이번이… 기필코 이번이 처음입니다.”

브레드히트가 안타깝다는 듯 물었다.

“하필 왜 그 순간 정신을 놓은 것이오, 베트리아 공작?”

최악의 상황에 일어난 폭주이긴 했다. 그러나 폭주는 티테르가 ‘원해서’ 생기는 일이 아니다. 언제나 힘의 ‘대가’를 안고 사는 이들이니 매번 도사리는 위험이면서 예측이 절대 불가능한 사고였다.

세이아드만큼이나 그것을 잘 아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 탓인가. 베트리아가 아닌 세이아드로부터 냉소적인 답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폭주는 원해서 생기는 일이 아닌 것을.”

브레드히트가 멈칫, 세이아드를 보면서 생각지도 못했단 눈을 했다.

지금 그들은 폭주에 대해 질책하기보다는 폭주의 원인을 알아야 했다. 그의 폭주 또한 전투 중에 벌어졌다. 힘을 많이 쓰는 상황이니 위험성이 올라간다 치더라도 정화를 꾸준히 받은 상황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는 건….

정화 자체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이드는 애당초 이러한 폭주를 막기 위해 존재했다. 티테르가 폭주한다는 건 가이드가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 않나.

세이아드 자신만의 문제라고 여겼던 생각이 몸집을 불렸다. 그저 정화의 문제라고 짚어 가긴 또 애매한 점이, 역사상 제대로 된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 티테르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생에 걸쳐 완벽한 정화를 받아 보지 못했을 텐데, 폭주했다고 기록된 이가 그 숫자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세이아드는 자신이 생각보다 더 가이드나 티테르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문제라고만 여겼는데, 역사 전체를 통틀어 살필 필요가 있었다.

“어떤 것이든지 좋다. 짚이는 다른 이유가 있나?”

아스테르의 물음에 베트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뭔갈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는 끝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제가 더는 바깥을 활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뿐….”

“한번 폭주한 티테르는 언제고 터져 나올 불꽃과 같지. 그대의 말처럼 내일 회의를 통해 자네의 처분을 결정할 것이다.”

“…인지하고 있습니다.”

베트리아는 냉소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이 그저 괴로워 보였다. 불안정해 보이는 목소리가 세이아드의 심기를 건드렸다. 지금 베트리아가 겪고 있는 일들은 어머니의 상황에 비하면 무척이나 인도적이었음에도, 그녀가 저렇듯 괴로워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더 짜증나는 점은 세이아드만이 베트리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이만 물러가겠다.”

의사를 표명한 아스테르가 먼저 등을 돌렸다. 브레드히트는 심란한 표정으로 베트리아를 보다가, 딱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을 아는지 아스테르를 따랐다. 그러나 세이아드는 그들에게 합류하지 않았다.

“저는 잠시 뒤에 합류하겠습니다.”

“대화는 이미 끝났다. 무슨 용건이 남은 거지, 세이아드?”

아스테르는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홀로 남아 이곳에 있을 만큼 베트리아와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긴 했다.

“오래된 탑이고, 손보지 않은 시기가 상당하니 한번 주변을 살피려 합니다. 혹여나 다시금 공작이 자아를 잃고 탈출하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성의 주인인 제 역할입니다.”

베트리아는 그럴 의사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탑은 추우니 성으로 곧장 오거라.”

아스테르가 의심을 거뒀다. 브레드히트는 그와 왕세자 쪽을 번갈아보다가, 근심어린 얼굴로 탑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두 명의 발소리가 사라지길 한참 기다리던 세이아드는 어느 정도 조용해지자 베트리아에게 다가갔다.

살아있는 시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세이아드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세이아드가 폭주하던 상황에 대해서 물어보려던 차였다.

“……대공의 눈엔 내 모습이 같잖고 우습겠군. 세레나의 일을 지탄한 내가 똑같은 일을 겪고 있다니, 뿌린 것은 반드시 거두게 되는 모양이야.”

베트리아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흩어졌다.

“모든 티테르는 폭주를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생기지 않을 거라 믿어. 나 역시 그랬어. 세레나에게 생긴 일을 보고서도 그것이, 나는, 그녀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네.”

고개를 치켜든 베트리아의 청록색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방금 그대가 말했듯이 원해서 생기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세이아드는 베트리아와 이런 대화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일에 대해 그녀를 저버렸던 이와 말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끔 저 말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세이아드는 여전히 어머니가 폭주하지 않았으리라 믿고 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베트리아를 비롯한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머니가 당신의 소중한 친구이긴 했습니까?”

베트리아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아무리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고 해도, 신뢰하고 사랑하는 존재의 편에 서 보려고 했습니까? 손해를 보더라도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노력이라도 해 봤냐는 겁니다, 공작.”

“증인이 너무 많았다. 다른 이도 아닌 왕후까지 위험에 처했으니 세레나의 목숨을 살리는 건 불가능했어….”

“그런 걸 당신에게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세이아드가 원했던 건 단지, 어머니의 말을 믿는 시늉이라도 해 주는 것뿐이었다. 다수인 한쪽의 말만을 듣고, 그들이 한 말을 그대로 퍼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어중간한 태도가 역겨웠을 뿐입니다.”

베트리아는 어머니의 친구로서 역할하려고는 했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프로시어스 남매를 돌봐주려고 했고, 장례식은 치를 수 없어도 그걸 기념할 위패만큼은 몰래 만들었다. 아버지가 자살한 뒤에는 그의 장례식을 도왔다.

그러나 이 모든 다정한 행동에는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베트리아는 항상 세이아드에게 ‘네 어머니의 죄를 답습하지 않게 조심하거라.’ 하였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를 막으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굳이 제압해 여기까지 데려온 거지? 네 능력이라면 죽이는 쪽이 더 쉬웠을 텐데?”

“니르아와 그대를 같이 상대하면 브레드히트 공작도 다쳤을 겁니다.”

“대공이 언제부터 사람의 안위를 신경 썼다고? 그렇지 않은 존재가 되기로 4년 전 그때 결심한 게 아닌가?”

베트리아는 지원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일이고, 그 시기로 돌아가는 힘이 있지 않은 한 뒤바꿀 수 없는 사건을. 레사스에게 그러했듯 그저 흘려 넘기는 쪽이 편하다고 여겨졌으나, 마음이 갑자기 고집을 부렸다.

동쪽의 강인한 공작이 예기치 못하게 보여 준 속내 때문인지, 세이아드는 기이한 충동을 느꼈다.

“공작이 기억하는진 모르겠지만, 그해 겨울은 내가 처음으로 혹한기를 감당하는 시기였습니다. 선대부터 충성해 온 훌륭한 기사가 나의 판단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베트리아가 멈칫했다. 벌겋게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공작이 세이아드를 멍하니 보았다.

“당신을 돕기 위해 보낼 인력 자체가 없었습니다. 북부가 뚫리면 마주한 동부 또한 결국 무너질 터.”

없는 사람으로 대해 온 데다가, 그와 특별히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오히려 그래서인지 하기 쉬운 말이 있었다.

“나는 사람이 죽는 걸 그만 보고 싶습니다.”

충분하다 못해 끔찍할 정도로 많이 보았다. 세이아드는 아주 오래전부터 산채로 썩어 가고 있었다.

“공작이 죽는 걸 딱히 바란 적 없습니다. 다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남았을 뿐.”

창백하게 질린 안색의 베트리아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가느다란 흐느낌과 괴로운 숨소리가 이어졌다. 긴 시간이 흐른 뒤 고개를 든 그녀가 눈매에 힘을 주며 말했다.

“뭐가 궁금하지?”

“여태 느끼지 못한 감각이나 전조 증상이 있었습니까? 환청, 환각, 이런 것들 말입니다.”

베트리아의 청록눈이 묘하다는 듯 세이아드를 담았다.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냐는 듯이.

“아니, 여태까진 그런 일이 없었어. 니르아를 상대하며 최대한 힘을 다루는 데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의식이 끊겼다. 깨어나 보니 이곳이었고.”

세이아드처럼 환청과 환각을 들은 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폭주의 원인을 파헤쳐야 하는지 고민하던 차, 베트리아가 갑자기 일어났다. 그러고는 광증이 인 사람처럼 철장으로 다가와 철봉 사이에 얼굴을 바짝 댔다.

“여태까지 한 번도 이상한 걸 느낀 적 없었고, 파르마와의 정화는 항상 안정적이었네. 어떤 폭주의 기미도 없었던 내게 생긴 변수는 딱 하나뿐이야, 대공.”

베트리아는 신경이 곤두서고 두려운 표정으로 유령처럼 속삭였다.

“숲에 들어가기 전 왕세자 전하께 받은 정화. 파르마 후작이 아닌 이에게 정화를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특별히 이상한 건 느끼지 못했지만… 뭔가, 파르마와는 달랐어.”

그 순간, 세이아드의 목덜미를 타고 날카로운 소름이 돋았다. 몸이 싸늘히 식으며 차가워졌다.

“말이 되지 않는 걸 안다네. 불경하고 죽어 마땅한 발언인 것도 알아. 하지만 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죄인. 그러니 자네만큼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어. 이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걸 알지만….”

철장 너머 베트리아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스스로 말하고도 버거운 내용이었는지, 그녀는 비틀거리며 곧 물러섰다.

나의 폭주와 공작의 폭주 모두 아스테르가 연관되어 있는 거라면….

어떤 설명으로도 말이 되진 않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 분명 이러했다. 세이아드는 표정을 굳히며 서둘러 그가 알아낸 것을 정리하고자 발을 틀었다. 그러다 자리를 떠나기 전, 허망하게 서 있는 베트리아에게 짤막히 말했다.

“그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등을 돌린 그는 미련 없이 복도를 떠났다. 그가 베트리아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 철장 너머로 베트리아가 선명히 속삭였다.

“…미안하네, 대공.”

그것이 어떤 대공에 대한 사과인지는 오직 베트리아만이 알 터였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