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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대를 증오할지라도-32화 (32/147)

#32

그보다 작은 청년을 마주 안아 준 레사스의 웃음이 짙어졌다.

“네가 여길 올 줄은 몰랐는데, 시온.”

“괜찮아? 다친 데는…! 어…?”

레사스의 안위부터 확인하려던 시온이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포옹을 풀었다. 시온 또한 다른 누구도 아닌 티테르이니 당연히 눈치챘을 것이다. 레사스를 본 순간 느껴지는 가이드의 힘을.

“내가… 이상한 건가? 이게 무슨…?”

세이아드는 혼란스러워하는 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시온 실드라스를 발견한 순간부터 굳어 있던 세이아드의 회색 눈에 서늘함이 고였다. 레사스를 다시 상대하리라 결정한 뒤 실드라스와도 당연히 마주치리라 여겼지만, 이리 빠를 줄은 몰랐다. 시기상 그는 막 아버지의 장례를 끝낸 뒤였기 때문이었다.

언제 보아도 도통 불쾌했다. 실드라스의 핏줄은.

다시 기회를 얻었으니 실드라스에 대한 적대감을 갈무리하기로 정했지만, 긴 시간 품어 와 굳어진 감정이 사라진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얼굴을 보자마자 본능처럼 끔찍한 거부감이 드는 걸 보니.

시온의 반응 또한 세이아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사스로 인한 기쁨에 가득 찼던 기색이 싹 사라지며, 적대적인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기분 나쁜 티를 숨길 생각 없이 서로를 싫어하는 게 그들 사이의 관례처럼 변질된 지 오래라, 다른 이들에게도 당연하게 비춰지는 모습이었다.

“대공도 계셨군요. 전투 중에 실종되었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멀쩡하신데요.”

세이아드의 모욕을 참아 주던 레사스와 달리 시온은 그를 대신해 저와 다툰 적이 많았다. 그들이 같이 있는 이유를 짐작조차 못하겠는지, 시온이 잔뜩 경계하며 레사스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전하? 제가 헛것을 보는 건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두 분이 한 곳에 계시고, 전하로부터 가이드의 힘이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야 세이아드를 의식했는지 시온이 격식을 차렸다. 레사스는 과하게 경계하는 시온을 잡아끌어, 그의 옆에 서게끔 했다.

“나는 괜찮으니 진정해, 시온. 그대가 느끼는 것처럼, 드디어 내게도 솔리아스의 힘이 깃들게 되었으니 차라리 그걸 기뻐하자.”

시온을 따라 말을 맞춰 준 레사스는 진실되게 웃으며 기뻐했다. 그들이 같이 있는 것을 여전히 경계하면서도, 시온은 레사스의 말에 표정을 허물었다.

“정당한 힘이 주인을 찾아 먼 길을 돌아왔나 봅니다. 어서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려야겠어요. 전하를 내내 능멸하고 모욕하던 이들에게까지!”

시온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이아드를 다시금 노려보았다. 한껏 제 주군의 적을 경계하는 모습이 과연 충실한 개이자 미래의 연인다웠다.

아니, 미래가 아니라 현재일지도 모르지.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세이아드가 아는 바는 전무했다.

“이곳 북부까지 한가하게 잡담이나 나누러 온 게 아니라면, 이만 전하를 모시고 성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남부와 달리 북부는 하루하루가 니르아를 경계해야 하는 시기라.”

얼굴을 마주보는 것은 외려 제 쪽이 훨씬 고역이었다. 세이아드는 웃고 있는 레사스로부터 아예 몸을 돌리며 시온에게도 경고했다. 남부를 비꼬는 말에 시온이 발끈해 나서려는 것을, 레사스가 제지했다.

“일단은 돌아가자, 시온. 해결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레사스의 눈길이 등에 닿는 걸 느꼈으나 세이아드는 그를 무시했다. 죽어 가던 세이아드에게 저주를 퍼붓던 그의 목소리가 뒤에서 메아리를 쳤다.

‘솔리아스의 악귀라 불리더니 끝내 그 이름을 따라갔군.’

당시 세이아드를 죽음까지 몰아간 상처는 대부분 시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정확히 세이아드와 반대되는 상성의 티테르였고, 누구보다 세이아드를 경계하고 파악했으므로 공격하는 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공격받던 순간이 떠오르며 불쾌감이 들이닥쳤다.

나란히 마주선 그들을 보자 죽기 직전 느꼈던 감정들이 삽시간에 올라왔다. 그것은 하나로 정의하기엔 지나치게 복잡했다. 그 누구보다 증오했던 실드라스 가문에게 연이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통탄스러웠다. 그러나 저 자신의 죽음보다 결국 실드라스가 옳았으며, 프로시어스가 틀렸다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악을 처단한 두 영웅이 저리 다정히 있는 것을 보니, 세이아드 스스로가 지워지지 않는 시커먼 덩어리 같았다. 꼭 니르아라도 된 것처럼.

이것은 자괴감이자 수치심일 것이다. 레사스를 마주할 때도 느꼈던 자책과 부끄러움은 시온이 옆에 오자 그 정도가 심해졌다.

정의롭고, 선량하며, 옳은 길만을 걷는 실드라스. 폭주에 미쳐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마는 저주받은 프로시어스. 악마를 처단한 신의 사자.

그 논리 앞에 서면, 어머니의 죽음 따위에 연연하는 세이아드 자신이 그렇게나 끔찍한 존재가 되었다. 그가 느끼는 분노와 통탄마저도 없던 것이 되어야 하는 삶을 잠시 잊고 있었다. 죽음과 함께 사라진 것 같았으나 여전히 세이아드의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

당연하게도, 어쩌면 예상보다도 더, 레사스의 귀환과 함께 성이 뒤집어졌다. 저주받았을지도 모르는 무능한 둘째 왕자가 솔리아스의 힘을 각성했다는 소식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북부, 그리고 왕궁에까지 퍼졌다. 왕국 전체에 퍼지는 것도 하루이틀 내의 일일 것이다.

악시드 대공의 실종과 숲에서 생긴 사고는 순식간에 잊혔다. 어쨌든 대공은 살아나왔으니 말이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축하 연회는 무리였으나, 성은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기원제로 인해 방문했던 귀빈들은 돌아가려던 것을 잠시 미루고 하나같이 레사스 왕자를 보고 싶어 성화였다. 그를 뵙고자 끊임없이 방문을 청하는 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시온 실드라스가 직접, 남의 성에서 보초를 자처했다.

당연하게도 성의 식솔들 모두 레사스에 대한 이야기로 난리였다. 이미 그의 아름다운 외양에 빠진 하녀들도 상당해, 어딜 가도 아랫것들이 소문을 속닥거리는 것이 벽 너머로 들렸다.

모든 것이 세이아드의 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지만, 정작 세이아드는 들뜬 분위기의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는 브레드히트 공작과 아스테르를 대동한 채 성에서 멀찍이 떨어진 작은 탑에 와 있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네, 대공.”

브레드히트가 몇 번째일지 모를 말을 했다. 공작은 무사히 베트리아를 성까지 데려와 격리시킨 뒤 곧장 세이아드를 찾으러 돌아간 모양이었다. 홀로 갈 수 있는 곳까지 최대한 깊게 들어갔으나 세이아드를 찾지 못해 수색대를 꾸렸고, 오늘 세이아드를 찾게 된 당시에도 숲의 다른 쪽을 수색 중이었다.

브레드히트가 이런 사람인 것은 몰랐다. 어릴 적엔 공식 석상에서만 종종 그를 보았고, 전대 실드라스 공작을 도와 프로시어스를 압박한 뒤론 그를 일관적으로 무시했다. 항시 능글거리는 편이라 이토록 은원 관계에 확실한 자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악시드의 대공이 그 정도 일에 흔들릴 리 없지 않나, 공작.”

세이아드의 옆에서 나란히 걷던 아스테르가 웃으며 그를 거들었다. 보지 못했던 나흘 새에 아스테르는 얼굴이 조금 상해 있었다. 공작과 함께 숲 근처를 수색하던 아스테르는, 레사스의 각성에 대해선 의외로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세이아드를 붙든 채 그의 전신을 샅샅이 살폈다. 다친 곳을 본 아스테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세이아드는 생을 통틀어 오늘 처음 보았다.

‘베트리아 공작의 일이 급한 점은 인지하고 있다. 처분을 정한 뒤에 그대는 내 처소로 들라.’

그의 허락 하에 이렇게 셋이, 베트리아를 가둔 탑으로 온 상황이었다. 공작이 귀띔하기로는 세이아드가 실종된 내내 아스테르는 잠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수색대에게 쉬지 않고 보고를 들었고 하루의 반나절은 아스테르 또한 수색에 참여한 모양이었다. 식사도 거의 하지 않아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스테르가 그를 장기 말로 이용해 왔다는 걸 비로소 자각했는데, 지금 그는 과거엔 겪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과거에는 실종된 적도 없었기에 아스테르의 이 같은 면모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수선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세이아드는 탑에 멈췄다. 기사들 여럿이 탑의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지상으로 한참을 올라가면 나오는 방 하나가 전부인 이 탑은 예로부터 죄인과 손님의 경계에 있는 이를 감금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베트리아 공작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때처럼 미친 상황은 아니야. 다만 누군가 만지려 치면 발작을 하더군. 폭주까지는 아니지만….”

탑을 빤히 올려다보던 아스테르가 세이아드에게 다정히 말했다.

“미리엄 백작이 낮에 수도로 떠났네. 파르마 님을 데리고 오늘 내로 도착할 테니, 정화를 받게 하면 나아지겠지.”

미리엄 백작은 궁에 소속된 티테르로,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전령이었다. 각 전령마다 공간을 오가는 방법과 동행할 수 있는 이의 여부가 다른데, 미리엄의 경우 가이드나 공작들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백작이 나섰다면 베트리아의 가이드인 파르마도 금세 도착할 것이다.

“전령이 출발했다면 금세 오시겠군요.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대공, 차라리 정화를 받게 한 뒤 공작을 살피는 쪽이 어떻겠나?”

“일단 몸 상태를 한번 보고 싶습니다. 폭주 후에 진정한 티테르를 보게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브레드히트는 나름 수긍하는 듯했다. 주의를 준 쪽은 오히려 아스테르였다.

“성의 주인인 그대의 책임은 인지하지만, 너무 가까이 가지는 말거라. 네 상처의 출처가 그녀인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웃고 있는 푸른 눈과 달리 아스테르의 음성은 서늘했다.

“티테르의 존재는 하나하나가 지켜야 함이 옳으나, 언제 다시금 폭주할지 모르는 이이기도 하니….”

베트리아를 살려 가두긴 했으나 아스테르의 말대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미지수였다. 세이아드 자신 또한 어떻게 굴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세이아드가 마주한 폭주한 티테르는 그 자신이 유일했으며, 폭주가 끝난 뒤의 회복 여부를 돌아볼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침묵을 신호로 세이아드가 먼저 탑으로 들어섰다. 나선형으로 끊임없이 올라가는 계단의 끝에 철로 겹겹이 세워진 문이 보였다. 열쇠로 첫 번째 문을 열고 나니 저 멀리, 희미한 횃불이 타오르는 작은 복도 너머로 빽빽한 철장 속 베트리아가 있었다.

인기척을 진즉 눈치챘는지 베트리아는 작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들을 보고 있었다. 천장에 닿을 듯 아주 높이 위치한 작은 창문에서 달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안은 우울한 어둠으로 가득차 있었다. 세이아드는 불현듯 그 비좁은 공간에서 바닥을 기어 다니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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