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사탕을 물려 준 아이처럼 레사스는 고분고분 세이아드의 뒤를 따랐다. 오두막을 빠져나온 뒤부터 그들은 사나운 짐승조차도 마주치지 않았다. 기원제 이후부터 쭉 숲 경계를 청소해 두었으며, 그새 기사들이 초입부를 정리해 둔 덕 같았다. 지나치게 안전한 길을 걸어간 탓에 세이아드는 레사스의 손을 놓을 기회를 엿보지 못했다.
주변의 기척을 끊임없이 탐색하다가도 의식이 종종 맞잡은 손으로 쏠렸다. 레사스의 손은 섬세한 외형과 달리 세이아드와 얼추 크기가 비슷했고, 흰 살결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굳은살이 단단히 박여 있었다. 그러나 차갑고 거친 세이아드의 손보다 부드럽고 따듯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깍지 낀 손은 차가운 바람에도 점차 온도가 올라갔다. 간헐적으로 꾸욱, 힘을 주며 손을 붙들거나, 손등에 닿은 레사스의 손끝이 그 위를 간질거리는 것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차츰차츰 예민해진 감각은 레사스가 세이아드의 손등에 진 흉터 하나를 만졌을 때 극에 달했다. 생긴 지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가늘고 긴 흉은 보이는 것과 달리 하찮은 일로 만들어진 거였다.
얕게 파인 부분을 부드러운 손끝이 긁는 차 세이아드는 손목을 흠칫 경련했다. 닿은 부위에서 밀려드는 자그라운 감각이 견디기 어려워 그는 팔을 뺐다.
“전하…!”
전신이 찢어지는 고통은 참기 쉬운데, 이 하찮고 간지러운 감각은 정신을 긁었다. 잡았던 손을 거칠게 망토에 비볐다. 손바닥에서 밀려오는 자잘한 간질거림을 문질러 없애고자 말이다.
“…정화는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과하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정신이 사나웠다. 세이아드는 반쯤 몸을 틀어 레사스를 노려보며 단호히 고했다. 그와 닿는 매초마다 몸 상태가 과분할 정도로 좋아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심각한 상황이 아닌데 이토록 친밀한 접촉이 이어지는 게 더할 나위 없이 어색했다.
“아직도 있군요, 이 흉터.”
레사스는 떨어져 나간 세이아드의 손을 보며 말했다. 하도 오래되고 하찮은 흉터라 레사스의 기억에선 사라졌을 줄 알았는데, 정확히 떠올리다니 의외였다.
상처는 입 밖에 내기도 부끄러운 일로 생겼다. 레사스가 머무는 잊힌 별궁에는 크고 아름다운 사과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나무를 탈 줄 모르는 소년은 가을이면 맺히는 빨갛고 광이 나는 사과를 구경만 하다가, 익어서 떨어진 흉이 난 사과를 줍곤 했던 모양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 그 해의 마지막으로 들른 구월이었을 것이다. 세이아드를 반 년간 볼 수 없음에 슬퍼하는 레사스를 위해 세이아드는 나무를 올랐다. 초록색이 알맞게 사라지고 완벽한 빨간색을 띤 사과를 따다가 문득 아래를 보았다.
크고 예쁜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절 올려다보는 꼬마는, 지나치게 세이아드에게 집중했는지 그의 머리 위로 가지 끝의 사과가 떨어지는 것도 보지 못했다.
떨어질 열매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세이아드는 급히 손을 뻗어 굵은 가지를 반쯤 비틀었다. 돌발적인 행동에 균형을 잃은 그는 제법 높은 위치에서 떨어졌다. 숱하게 나무를 기어오르다 떨어져 본 소년에게 낙하는 별일 아니었으나, 떨어지다 붙든 가지에 손등이 세게 긁혔다. 사과만큼은 꽉 안은 채 떨어진 세이아드를 보고 레사스는 그날 내내 울었다.
이러다 기절하진 않을까 싶게끔, 잠깐 울음을 멈췄다가도 세이아드의 손등을 보면 주르륵 눈물부터 흘렸다. 또래처럼 시끄럽게 소리라도 내면 혼내기라도 할 텐데, 레사스는 끅끅거리는 소리마저 삼키며 그저 조용히 울었다.
그 이후로 레사스는 사과를 먹지 않았다. 달콤한 설탕으로 졸여 만든 파이도, 투명하게 녹여 사과의 껍질 위에 통째로 막을 씌운 사탕도, 어떤 형태로도 말이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저 또한 잊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레사스가 그저 흉터를 만진 것만으로도, 세월이라는 낙엽 아래 파묻힌 기억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이 불어 수북이 쌓인 낙엽을 하늘하늘 날려 보냈다.
지나치게 깊은 물속을 볼 때처럼 아찔해졌다. 한 발자국만 디디면 끝이 없는 저 안으로 빠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어린 레사스의 마음은 언제나 세이아드에게 이런 기분이 들게끔 했다.
의미 없이 꺾어 준 사과나무 꽃잎을 햇볕에 곱게 말려 그의 책에 품던 모습도, 가벼이 만들어 준 나무 조각이 그의 보석함에 들어간 걸 봤던 날도, 세이아드로부터 눈을 떼지 않던 반짝이는 시선을 볼 때도 이렇게 아찔했다.
너무도 깊고 순수한 애정이라 감히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를 만큼, 레사스는 그렇게 저를 따랐었다.
그러나 다 한때라 이제는 소멸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레사스가 그 순간을 기억하며 과거를 입에 담을 거라곤 여기지 않았다. 저를 경멸하고 증오하는 쪽이 차라리 편했다. 왜냐면, 그 순진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원망이 무섭게 그 뒤를 쫓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나를 아꼈다면, 너는 나의 삶을 무너뜨린 이들과는 함께해선 안 됐다.
가장 솔직하고, 이기적인 추악한 마음이 비죽 솟았다. 죽음과 동시에 희미해졌다고 여겼던 이기적인 원망이 불쑥 솟았다. 저 자신의 감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마음이 찰나 들끓는 순간.
“이쪽으로 전하가 향하셨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길이 나지 않은 방향으로도 수색대를 보내야 한다고 하시다, 홀로 나서셔서….”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파가 몰린 쪽으로 세이아드가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희미한 형태로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작은 속삭임들이었으나 세이아드의 민첩한 감각이 그걸 들었다. 수색조로 여겨지는 그들은 말을 탄 채 숲 근방을 찾고 있었다.
세이아드는 일순 불타올랐던 그의 마음을 식혔다. 차갑게 굳은 응어리를 모른 척 삼키고 덤덤히 레사스에게 말했다.
“수색대 같군요. 합류하면 되겠습니다.”
기실 지금까지 수색을 이어 가리라 여기지 못했다. 마을로 가서 탈 것을 얻으려던 계획도 다 이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나흘째가 되었음에도 그가 죽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 게 이상했다.
하긴. 베트리아의 상황도 그런 판국에 티테르 하나가 더 사라진다면 문제가 커진다. 무작정 개체를 늘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세이아드같은 이여도 티테르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직도 사과를 좋아하나요?”
사람들에게 합류하기 위해 휙 몸을 틀려던 차, 레사스가 물었다.
“나는 더 이상 추위를 타지 않는데, 그대는 어떤가 싶어서.”
세이아드는 반짝이고 새빨간 사과가 열리는 별궁의 나무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땅에 떨어진 사과는 흉이 져 모양은 별로였으나 세이아드가 먹어 본 것 중 가장 달콤했다.
레사스는 그가 주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바구니에 모아 세이아드가 올 때를 기다리다 먹었다. 자그마한 머리를 기울이며 세이아드가 사과를 베어 먹는 걸 하염없이 구경하던 얼굴이 우스웠다.
질문이 잘못됐다. 사과를 좋아했던 건 본인이 아닌가.
“글쎄요.”
떠올려 봤자 달라질 것 없는 과거이니 맞고 틀리고는 의미 없다. 그들은 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필요에 의한 새로운 관계를 맺을 뿐이지.
“기억나지 않는군요.”
세이아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척했다. 무심한 답에 묘하게 밝아 보였던 레사스의 낯이 흐릿해졌다.
문득 피곤해졌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상태가 좋았으나, 자꾸만 온갖 기억을 불러오는 레사스로 인해서였다. 칙칙하고 색이 없던 삶에 어중간한 색채가 더해지니 그저 지저분하게만 느껴졌다. 질서가 흐트러지고 규칙이 사라졌다.
“사람은 좋아했던 것을 잊지 않아요. 그저 놓아주거나 붙들고 있을 뿐.”
레사스는 짤막하게 말했다. 진실이었으나 세이아드는 듣지 못한 척했다. 다행히 곤란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멀리서 그들을 찾은 기사의 외침이 퍼졌다.
“어! 저기 누가 있습니다!”
“다들 이리로! 두 분을 찾았습니다!”
“무사하신 것 같습니다!”
용케 레사스의 발자취를 찾았는지, 저 멀리 있던 수색대가 어느새 근접해 있었다. 둘은 동시에 사람들이 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틀었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인파를 살피던 세이아드의 눈이 차갑게 굳었다. 그 속에 여기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있었다.
‘이건… 이 모든 건 과거에 없던 일이다.’
검은 말을 타고 앞장서는 금갈색 머리칼의 청년이 보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오는 사내를 레사스 또한 발견했는지, 놀란 기색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질주하는 검은 말이 금세 그들 앞에 당도했다. 말 위에 탄 어린 청년은 얼핏 보기엔 레사스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누구보다 먼저 도착한 청년은 말을 세우기 무섭게 그 위에서 뛰어내렸다.
“레사스!”
애틋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상대를 확인한 레사스의 얼굴 위로, 세이아드와 있는 내내 볼 수 없던 미소가 떠올랐다.
“시온?”
반갑게 불린 이름에, 실드라스의 주인이 레사스를 와락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