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그들은 침묵을 동행 삼아 눈 내린 숲을 나아갔다. 햇볕이 내리쬐는 이 순간만큼은 괴물이 서식하는 곳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요했다. 새 지저귐과 눈을 사박사박 밟는 소리만이 간간이 평온한 정적을 깨트렸을 뿐이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건 세이아드의 일상이었음에도, 레사스와 둘만 있는 상황이 묘한 긴장감을 불러왔다. 불편하고 어색했다. 깊은 간극을 사이에 둔 관계이면서도 영혼을 온전히 맡기는 순간을 공유한 사이라는 점이 레사스를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끔 했다.
“니르아는 동물은 해치지 않나 보군요.”
나무와 해를 지침삼아 방향을 찾던 세이아드가 고개를 틀었다. 레사스는 나무 위를 살피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니 나뭇가지에 앉은 울새들이 보였다. 작은 머리통을 쭉 내밀어 그들을 살피는 모습은 북부에선 흔히 보이는 광경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잡아먹는 괴물이라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사는 것들의 정신을 오염시키니, 결국 다 죽여야 할 것들입니다.”
냉정한 답을 돌려준 후 세이아드는 마저 주변을 살폈다. 안력을 집중해 유심히 훑으니 멀리 붉은 끈이 매인 가지가 보였다.
잘됐군. 나흘 전 숲에 들어올 때 남겨 둔 표식이다.
“그만하고 싶지 않나요?”
레사스는 영문 모를 질문을 했다. 다시금 그를 보니, 레사스는 여전히 새가 앉은 나무를 보고 있었다.
“끊임없이 싸우는 거요.”
새를 보던 레사스가 시선을 돌려 세이아드를 주시했다. 별다른 표정 없이 차분한 모습임에도 그는 다정한 낯빛이었다. 저런 게 천성인가 싶었다.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그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 다른 길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못했다.
“만약 모든 게 다 끝나면 그땐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한평생을 통틀어 세이아드는 이런 질문을 들어 본 적 없었다. 니르아는 사라지지 않는 지옥이었고 티테르는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정 자체가 무의미하다 여겼던 건지, 세이아드 본인을 비롯한 그 누구도 이 같은 의문을 같지 않았다.
“없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그리 말하는 레사스의 표정이 일순 어린 청년답지 않게 초연해 보였다.
“허황된 걸 꿈꾸는 건 삶을 더 괴롭게 할 뿐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는 삶은 이미 그것만으로 끔찍한걸요.”
레사스는 일부러 무시해 온 것들을 마주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세이아드는 그가 지금 나누는 대화가 살면서 해 온 가장 의미 없는 내용이라고 여기면서도, 레사스가 하는 말에 계속해서 대꾸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전하가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꼬박꼬박 답하던 레사스는 이 질문에만 입을 닫았다. 딱히 대답을 바랐던 것은 아닌지라 세이아드는 묵묵히 걸어 나갔다. 빨간 끈이 매인 나무에 이르렀을 때쯤 레사스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눈을 얕게 헤집었다.
당장 눈에 띄는 니르아나 짐승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가이드를 보호하기 위해 세이아드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검을 꺼내 들어 그의 옆에 서자 레사스가 눈 속에서 작은 털덩어리를 꺼냈다. 뭔가 했더니, 죽은 울새였다.
“죽었군요.”
“살아 있는 것 같아요.”
레사스가 손으로 그것을 감싸자 새의 날개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날 힘은 없어 보였다. 무덤덤한 눈으로 살펴보니 다리가 부러진 새끼였다.
“낙오된 새니 곧 죽을 겁니다.”
“치료해 준 뒤 돌려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이 숲의 짐승은 사람을 공격한다고 말했을 텐데요.”
“하지만 오는 내내 새들은 울기만 하고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잖아요.”
세이아드는 가만히 레사스의 흰 손에 감싸진 울새를 살폈다. 살고 싶어 날개를 움찔거리는 모습이 눈을 떼기 어려웠다. 그냥, 이상하리만치 저 모습이 불편하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세상의 모든 걸 구할 순 없습니다.”
순진한 왕자에게 세이아드는 그리 말했고, 레사스는 다정한 눈길로 새를 보며 답했다.
“그래도 최대한 노력하는 게 맞아요.”
이렇듯 말하는 이였으나 그는 끝내 저를 포기했다. 세이아드는 문득 미래의 레사스가 절 죽일 때, 얼마나 끔찍하게 여겼을지를 어림잡아 보았다. 그 깊이가 가늠되지 않지만 아마도 레사스의 삶에서 제일 증오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깨끗한 것 옆에 있는 더러운 것이 유독 지저분해 보이듯, 세이아드는 혐오스러운 스스로의 모습을 일순 보았다. 순간 레사스의 옆에 있는 것이 숨이 막혔다.
“가는 게 좋겠습니다.”
세이아드의 말에 레사스는 새를 조심스레 품 안에 넣었다. 겉옷을 갈무리하는 레사스의 손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그에게 필요 외의 행동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가이드를 신경 쓰는 본능이 세이아드를 성가시게 떠밀었다.
“전하.”
레사스가 의아한 듯 그를 보았다. 세이아드는 설명 대신 그가 두르고 있던 털 망토를 벗었다.
“지금은 저보다 전하께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뇨, 대공이….”
“돌아갔을 때 존귀하신 솔리아스의 빛이 아프다면 외려 제가 곤란해집니다.”
귀환한 순간부터 레사스는 전과는 완전히 반전된 삶을 누릴 것이다. 그의 안위가 왕국의 안보이니 그의 말은 타당했다.
“그렇다면 내게 대공의 장갑을 주세요.”
세이아드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의 가죽 장갑은 전투로 인해 찢어지고 헤진 상태였다. 안감은 털로 만들어졌으나 망토보다는 보온이 형편없었다.
“난 그거면 됩니다.”
레사스는 맡겨 놓은 것을 찾듯이 고집을 부렸다. 비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딱히 별 수는 없었다. 고민하던 세이아드는 끼고 있던 장갑을 천천히 벗었다. 받아드려는 레사스의 발간 손을 세이아드가 잡았다. 예기치 못했는지 내밀었던 손이 흠칫, 떨리며 굳었다.
“성에 도착하시면 버리십시오.”
얼어붙은 손으로는 장갑을 끼는 게 어려우니, 이쪽이 더 빨랐다. 가지런한 손끝에 살이 닿자 따듯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조금만 닿아도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자칫하면 쉬이 중독될까 두려울 정도였다.
손이 잡힌 그대로 미동 없이 굳어 있던 레사스는, 다른 쪽 장갑을 씌우려 할 때쯤 작게 물었다.
“…형님께도 늘 이렇게 해 주었나요.”
뜬금없이 왜 이런 걸 궁금해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세이아드는 덤덤히 수긍했다.
“네.”
레사스는 입을 다물며 장갑이 씌워지지 않은 손을 뒤로 빼 버렸다. 갑자기 불쾌해진 것처럼 보이는 기색이라, 그의 감정을 종잡을 수 없었다.
“어제… 그대와 내가 한 것도요?”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세이아드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그의 눈을 보았다. 아스테르와는 긴 시간 전투를 같이 한 몸이니, 그 정도의 정화는 당연히 있었다.
“네.”
그러나 아스테르와의 정화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의 행위를 하는 가이드와 티테르도 당연히 있었지만, 세이아드는 그것만큼은 선을 그었다. 그에게 사랑하는 이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가 생전 하던 말이 항상 망령처럼 배회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주는 황홀함을 경계해. 네가 사랑하는 이가 누구인지, 현혹되지 않고 명심하렴.’
아무도 곁에 남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끔 세이아드는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그대에게는 큰 의미가 없겠군요.”
레사스는 장갑을 바라보며 혼잣말에 가깝게 속삭였다. 순간적으로 어떤 감정이 그의 말에 섞였으나, 그걸 곱씹기도 전에 그가 다시 말했다.
“그럼 구태여 거리낄 것도 없겠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사스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세이아드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 놀란 것은 세이아드 쪽이었다. 깍지를 끼며 붙들린 손으로 기분 좋은 파장이 밀려들었다.
“어젯밤의 그대는 정화가 많이 필요해 보였어서요.”
레사스는 거절할 명분이 없게끔 쐐기를 박았다. 정화는 받아도 넘치는 게 없이 유용한 행위였다. 다만 필요한 상황이 아닌 때에 이리 손을 잡은 적은 처음이었다. 붙들린 손이 꼼짝없이 굳었다.
“이편이 뒤를 따라가기도 편하기도 합니다. 눈길은 잘 못 걸어서.”
살면서 이런 헛소리는 처음 듣는군.
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레사스는 잘만 뒤를 따랐다. 다리가 긴 덕에 높게 쌓인 눈도 무리 없이 헤쳐 나온 주제에, 눈길을 잘 못 걷는다고?
어릴 적엔 지금같이 종잡기 어려운 짓은 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성년이 된 레사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불편함을 대변하듯 세이아드의 눈썹 끝머리가 올라갔다.
전투 태세를 갖추는 데도 방해되고, 왕족의 손을 잡은 채로 서둘러 나아갈 수도 없지만, 세이아드는 제게 레사스가 필요하다는 걸 되새겼다. 세이아드 자신에겐 변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쳐도 레사스는 순전 제 태도에 따라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입지니.
어떤 속셈인진 몰라도 장단은 맞춰 줘야겠지.
어쩌면 이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레사스가 자꾸만 한눈을 팔아 숲에 있는 다친 새를 죄다 줍고 다니는 걸 막기 위해서도 말이다.
세이아드는 하는 수 없이 레사스에게 한쪽 손을 내어주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꽉 붙들고 있는 온기를 증표 삼아 세이아드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어쩐지 뒤를 돌아보기가 어려웠던 것도 이유일 것이다.